- 유대칠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6-05-02 10:22:13
- 수정 2016-05-02 11:27:03
지옥이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누군가는 암울하다며 ‘흙수저’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이미 부유한 혹은 가난한 누구의 자녀라는 사실이 상당히 많은 것을 결정해 버린 세상이다. 부정하기 어렵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저 경제적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큰 집에 살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며 더 많은 해외 여행을 다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미 이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은 잔혹한 현실을 의미한다. 이미 정해져버린 미래를 향하여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고, 그 노력으로 만든 결실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이미 미래는 상당히 많은 부분 결정 나버렸다. 정해졌다. 누군가는 미래를 향한 투자를 한다. 어학을 익히고 필요하다면 과외를 하기도 하고 어학연수를 장시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미래를 향하여 투자할 수 없다. 당장 지금 이 순간 생존해야 한다.
학교 공부 할 시간도 미래를 위해 준비할 시간도 이미 빼앗겨버렸다. 결국 그들에게 미래는 정해져버렸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망의 가난을 의미한다.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 앞에서 어쩌면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의 이유가 된다.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지옥이다. 나약하다 욕하지 마라. 이것이 현실이다.
지옥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애국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권력을 위해 반란을 해도 당당하다. 부끄럽지 않다. 노년까지 잘 산다. 민중의 가난을 모른다. 오히려 조롱한다. 친일을 했다 해도 무엇이 문제냐며 오히려 화를 낸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능력이라도 되는 듯이 당당하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직 잘 산다.
애국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독립운동을 하고 반독재운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국가를 참으로 사랑하여 국가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하여 싸웠지만, 국가 권력은 그들의 아픔을 안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롱하는 듯하다. 남은 것은 가난한 후손과 노년뿐이다. 애국이란 것은 결국 가난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배신하고 이용하고 살아가는 삶이 성공한다. 늙어도 웃고 산다. 그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옥이다. 과장되었다 욕하지 마라. 이것이 현실이다.
지옥이다. ‘우리’란 말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소리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共感)도 공분(公憤)도 공유(公有)도 없다. 그저 남의 아픔이고 남의 눈물이다. 알바 없다. 그의 아픔 앞에서 나의 기쁨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바로 적이라 비난해 버린다. 독한 욕설을 토해낸다. 조롱하기도 한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지 않는 우리가 과연 ‘우리’일까? 그저 저마다 ‘홀로’ 살아간다. 누군가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하나로 뭉치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저마다 홀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든 삶을 살아간다. 지옥이다. 모든 것이 외롭다. 분노도 기쁨도 외롭다. 그래서 지옥이다. 비관적이라 욕하지 마라. 이것이 현실이다.
지옥이다. 자살로 죽은 이들이 전쟁으로 죽은 이들보다 더 많다는 슬프고 잔인한 소식이 들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부부가 자살 했다. 부근 마트 화장실에서도 그 앞 아파트에서도 자살이 있었다. 힘든 지옥이다. 그런데 혼자 독한 기운으로 살아가라고 한다. 손 내밀며 응원하지 않는다. 지쳐 쓰러지면 다가와 안아주며 위로하지 않는다. 지옥, 그 지옥을 그냥 혼자 살아가라고 한다. 혹시 자살이라도 하면, 독기가 없다 조롱한다. 자살이란 이름의 사회적 타살 앞에서도 그저 잔인하기만 하다. 이 사회 전체가 세월호다. 그래서 지옥이다. 암울하다 욕하지 마라. 이것이 현실이다.
지옥, 이 지옥에서 우린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가장 슬픈 이야기는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식의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원래 이 세상이 그렇다면, 하느님은 지옥을 하나 만드신 것이다. <창세기>의 그 고백, 보기에 좋았다는 그 첫 고백은 무엇이며, 복음서 가득한 희망은 무엇인가? 결국 하느님이 우리를 속인 것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원래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렇지 않아야 한다.
저마다의 철학은 저마다의 이상향을 이야기한다. 전혀 현실에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이상향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그냥 현실적인 삶에 충실히 살라고 한다. 여기에서 실패의 역사가 시작된다. 꿈은 절대 현실적일 수 없다. 노예제 사회에서 현실적인 꿈은 겨우 좋은 노예일 뿐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자유인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혹은 허락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꿈이다. 그러나 노예제 사회가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사회가 온 것은 허락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비현실적인 이상향이 지금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덜 지옥으로 이끈다.
꿈은 비현실적이어야 한다. 꿈이 현실적이라면 이 잔혹한 지옥의 현실은 바뀌어지지 않는다. 꿈이 현실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게 된다. 힘들고 지쳐도 꿈은 비현실적이어야 하고, 그 비현실적인 꿈을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옥을 살아간다. 그래서 힘들다. 그 힘듦이 그저 그 지옥에 ‘안주’하라는 말은 아니다.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 지옥이면 지옥일수록 더 힘들고 간절히 그리고 오랜 시간 조금씩 비현실적인 꿈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현실화시키면서 그렇게 차근히 나아가야 한다. 안주해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너무 조급하지 말자. 차근히 그리고 천천히 이 지옥이란 현실을 부수어버릴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자. 예수가 2000년 전 우리에게 보인 그 이상향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변화되고 어느 순간 바뀌어있을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이 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그 힘든 과정,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것일지 모른다. 행복은 누군가를 이기고 없는 어떤 큰 기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서서히 지옥으로부터 벗어난 자신만의 비현실적 이상향, 자신만의 천국을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는 지옥으로부터의 도전적 도주 과정 그 자체일지 모른다. 지금, 지옥과의 싸움을 시작하자. 어쩌면 싸움을 시작하는 그 순간, 행복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행복, 편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옥, 그렇게 쉬운 상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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