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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생존기

유학장의 생존 일기 - 개똥 철학 개론 2

유학장의 생존 일기 2 


허수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씀


솔직하게 나는 머리가 나쁘다. 인기 있는 글을 쓸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제까지 쓴 논문들이 그렇게 읽혀지지도 않았으며, 책은 나름 정성을 다했지만, 그리 많이 읽혀지고 영향력을 가진 책은 아니다. 그냥 나에게만 소중한 책일 뿐이다. 상황이 이 정도면, 이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런데도 글을 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나는 무식하다. 그래서 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 때문이다. 내가 좀 잘 살아야겠다 싶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좀 잘 존재하고 싶어서다. 나름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고 쓰린 일이 있다고 불행해야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철학(哲學)이나 신학(神學)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배운 지혜(知慧).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철학과 신학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흔히 사상(思想)이라고 부르는 것들, 어찌 보면 인문학(人文學)이라 부르는 것들이 결국은 생존(生存)의 비법(秘法)들이었다. 공자(孔子)는 공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잘 살아서() 있을() 것인지 그 비법을 알려준다. 노자(老子)의 노자의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ele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플라톤(Πλάτων:Platon)은 플라톤의 방식으로 알려준다.

 

이제 철학사(哲學史)는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철학사는 생존의 비법에 대한 역사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생존의 비법들이 가득한 생존의 보물창고다. 나는 이 보물창고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생존의 비법을 알고 이를 체득하기 위한 여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정은 지식(知識)을 구하는 여정이 아닌 지혜를 구하는 여정이다.

 

한 명의 철학자를 만나 구하는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 아닌 지혜. 그가 말한 사상을 이해하고 암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사상을 이해하고, 그 삶을 향한 혹은 존재를 향한 태도를 이해하고, 이를 구체적인 삶 속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궁리하고자 한다. 이렇다면, 철학사를 통하여 만나는 철학자는 지식을 주입하는 스파르타식 학원의 선생이 아니다. 이러한 강압(强壓)의 선생이 아닌 대화를 통하여 고민을 풀어가는 벗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다 질문을 받았다. “왜 철학사엔 서양 철학자들, 그것도 독일 철학자들이 많은가요? 독일이 철학적이고, 우리가 그렇지 않아서 그런가요?” 나는 답했다. 그렇지 않다. ‘철학사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서양 철학사. ‘서양philosophia가 있었다면, 동북아시아엔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이란 이름으로 실천학과 이론학으로 유가(儒家), 도가(道家), 불가(佛家) 등의 사상이 다양했다. 사상가(思想家)들도 다양하고 그 면모도 매우 독창적이고 다양했다. Corea, 즉 고려 땅에도 원효(元曉), 의상(義湘), 지눌(知訥), 권근(權近), 정도전(鄭道傳), 이황(李滉), 이이(李珥), 정약용(丁若鏞), 박지원(朴趾源), 이지함(李之菡), 최한기(崔漢綺), 류영모(柳永模), 함석헌(咸錫憲) 등의 다양할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원효의 불교를 중국 불교의 아류(亞流)이거나 삼류(三流)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황과 이이가 중국 주자학(朱子學)의 삼류 혹은 따라쟁이인가? 아니다. 이들도 나름의 자리에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을 구축한 인물들이다. 성리학의 외부에서도 최한기 등의 인물이 있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함석헌이나 류영모와 같은 이론에서의 이치(理致)와 실천에서의 도리(道理)를 모두 깨우친 뛰어난 사상가들이 있었다. 당연하다. 이 땅 Corea에도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설마 어찌 인간이 살아 존재해야 하는가를 궁리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땅엔 그 누구도 생존의 비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식민지(植民地)를 경험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의 말을 바꾸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이름을 바꾸었다.

 

한밭 大田

한내 大川

널다리 판교동(板橋洞)

쇳골 금곡동(金谷洞)

 

우리네 땅의 이름이 달라지면서 우리네 생각도 바뀐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네 역사를 패배의 역사로 보게 만들었다. 양당정치(兩黨政治) 체제에 서로 다른 이념으로 서로를 논박하며 조선 500년 역사를 일군 이 땅이 가진 사상의 산물을 당파(黨派)정치라고 규정하고, 이것으로 조선이 망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500년이란 긴 역사동안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자 왕이 구현된 사회라도 되는 듯이 철학 즉 성리학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를 일구었다. 물론 조선 후기 친일파(親日派) 혹은 충일파(忠日派)로 변한 이들이 권세를 누리며 상당히 불만스러운 면이 있다 하여도, 분명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사상을 슬픈 역사를 본다. 일본이 우리에게 주입한 시야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조선 유학은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아닌 언젠가 실학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이 500년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제 철학사라고 하면서 그냥 서양 철학만의 역사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철학이 있었다. 물론 철학은 번역어다. φιλοσοφία(필로소피아)라는 그리스말에서 파생된 라틴어 philosophia 혹은 영어 philosophy에 대한 번역어다. 그 뜻은 지혜의 사랑가 된다. 번역어란 말 자체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져온다는 말이 될지 모른다. 분명 철학은 서구의 것이 들어와 번역어가 사용되기 전엔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도 서구의 철학에 준한 다양한 사상들이 있었다. 즉 철학이라 부르지 않았지 철학이 있었다.

 

유럽의 중세 스콜라 철학자(Scholasticus)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주해하고 연구했다면, 조선 땅엔 선비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수도자와 신부에 의하여 철학과 신학이 연구되고 발전되었듯이 이 땅에도 많은 학승(學僧)이 있었고, 사막교부들과 같이 이 땅에도 이판승(理判僧)이 있었다. 누구도 이 땅에 철학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

 

이 땅에도 생존의 비법을 궁리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대부분의 답을 서구에서 찾으려 한다. 서구는 대단하고 무엇인가 우리의 것은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행동은 그렇게 한다. 결과적으로 칸트(I.Kant)가 이황보다 더 익숙해진 것이다.

 

나는 서구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서구에서 공부하여 얻은 지식이 아닌 이 땅에서 공부하여 얻은 지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큰 일이 없는 이상 대구 땅에서 살아가며 이곳에서 나름의 인문학 생산품을 내어놓을 생각이다. 나는 이황과 칸트가 내 안에서 토론하고 고민하기 바란다. 칸트를 더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황이 그렇다고 더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서양만큼 동양, 특히 이 땅에도 비법을 가진 이들이 많으며, 그들이 내 작디작은 머리 가운데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 바란다. 부디 철학이라 불리던 성리학이라 불리는 것이던 많은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난 어쩌면 더 큰 지혜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국사(佛國寺)와 운문사(雲門寺)를 가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엑하르트(Meister Eckhart)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하회마을에서 오캄(William Ockham)과 이황을 궁리하고, 영덕에서 아들과 뛰어 다니며 이암블리코스(Iamblichus)를 고민하고, 신문을 읽으며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나는 유럽의 거대한 대성당을 거닐고, 오랜 역사의 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받은 인물이 아니다. 그냥 대구시립중앙도서관과 대봉도서관에서 번역을 하고 공부를 했고, 대학 강사이면서 과외 선생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며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번역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전통을 이야기하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한 고민, 그 고민을 두고 많은 철학자들과 대화하며 나름 작디작은 머리에 지혜를 쌓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그 흔적이다.

 

이 글은 나의 삶을 위한 글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아픈 순간 어떤 철학자를 만나서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고난과 어려움이 수업이었다. 이 글은 내 공부의 흔적이며, 내 아픔의 기록이고, 내 싸움의 흔적이며, 내 패배의 고백이며, 내 미소의 여운이다. 앞으로 이 글 이해하고 읽기 바란다. 나는 너무나 작은 사람이다.

 

이 작은 머리에서 나는 서양도 동양도 아닌 모든 이들을 불러서 제발 날 좀 잘 생존하게 해 달라고, 그 비법을 조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