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칠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6-05-18 09:55:45
- 수정 2016-05-18 09:55:45
한국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범 김구의 한국철학에 대한 고민이 떠오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룸은 무릇 그 근본이 되는 철학을 가져야 한다. 서로 다른 여럿을 두고 더불어 하나의 존재, 즉 우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하는 그런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닌 영미 철학자들의 철학을 추종하며 우리 사상의 수도를 워싱턴이라 함도 잘못이고, 맑스와 레닌의 철학을 추종하며 우리 사상의 수도를 모스크바라고 함도 잘못이다. 우리 사상의 수도는 어디까지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 사상, 우리 철학은 이 땅의 고민에 대한 응답이어야하고, 그 철학의 주체는 우리여야 한다. 우리 정신의 수도가 외국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게 하는 이론의 체계, 그것이 김구가 생각한 한국철학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철학으로 여러 사람의 생각을 통일하여 그 철학으로만 움직여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도 사상도 통일성의 수단으로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한 인물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강제로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강제로 통일성을 만들어선 안 된다. 이것 역시 김구의 생각이다. 강요되지 않으면서 외부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그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한국철학이다. 참으로 어렵다.
결국 한국철학은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한국철학의 조건을 위해 우선 ‘우리’라는 앞선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 땅의 수많은 존재들을 어떻게 ‘우리’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강제로 하나의 단일한 사상을 교육시켜서도 안 되고, 강력한 독재자나 하나의 단일한 종교로 강제해서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이들에게 하나의 더불어 있음, 즉 ‘우리’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 답은 ‘아픔’에 대한 공유다.
홀로 존재하는 각각의 존재들에게 아픔은 자신의 존재를 직면하는 순간이다. 아픔 앞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홀로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홀로 아프고 홀로 웃는다. 모든 존재는 홀로 있다. 철저하게 홀로 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존재들의 아픔도 기쁨도 철저하게 홀로 있다. 철저하게 나의 아픔은 나의 존재를 직면시키며 나의 몫이란 것을 알려주듯이 남의 아픔도 남의 존재를 직면시켜주며 그저 남의 몫이다.
이렇게 홀로 있는 모든 존재들은 홀로 존재하고 홀로 아프며 홀로 기쁘다. 그래서 더불어 있으려 한다. ‘우리’가 되려 한다. 홀로 웃는 기쁨은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홀로 우는 아픔은 더욱 더 쓰디 쓴 아픔으로 다가온다. 나의 아픔을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는 남의 눈물 앞에서 나의 아픔은 무뎌진다. 나의 기쁨을 공유하며 함께 웃어주는 남의 웃음 앞에서 나의 기쁨은 더욱 더 증대된다. 이렇게 나의 존재와 다른 남의 존재에게서 홀로 있는 나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공감함을 마주할 때 더불어 있음, 즉 ‘우리’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홀로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아픔에 대하여 그저 너만의 아픔이라 내버려두는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하나의 아픔에 대하여 나와 너 모두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가 된다. 김구가 이야기한 한국철학은 바로 이러한 ‘우리’가 성립될 때 가능하다.
일본과 친일파에 의하여 일어난 조직적인 성폭력 앞에서 함께 분노하는 그 더불어 분노하는 주체가 바로 우리다. 그 폭력으로 울고 있는 여인들의 눈물 앞에서도 더불어 우는 주체가 바로 우리다. 절대 그 아픔을 이용하거나 무시하거나 고개 돌리지 않는다. 고개 돌린다는 그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분노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게 된다. 과연 김구에게 친일파는 우리의 한 부분일까? 비슷한 외모라고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 함께 울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우리! 즉! 함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때 참다운 우리가 될 수 있다.
5.18을 본다. 아픔이다! 너무 아파서 고개들어 마주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러나 직면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그 슬픈 아픔을 마주하고 그 시간 그 공간을 채운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기억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로 그저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받아드림이다.
5.18의 아픔이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과거 그 시간, 나와 다른 공간의 아픔으로만 내버려둔다면, 5.18은 우리의 존재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없다. 서로 다른 여럿이 5.18이란 아픔으로 하나로 묶여 하나의 존재가 되게 해야 한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함으로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끈이 되게 해야 한다. 그때 그 날의 아픔은 지금의 생명력이 된다. 그렇게 5.18의 아픔은 과거의 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우리 존재의 고귀한 근원이 된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우리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5.18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고개 돌리며 외면한다. 심지어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며 그 아픔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그 아픔을 공유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몇몇은 저기 저 잔혹한 악의 편에서 거짓을 토해낸다. 슬프다. 그들은 과연 우리인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아픔에 대한 공감, 그 존재의 끈으로 하나된 존재인가? 어쩌면 우리가 아니다. 함께 아파하지 않고, 함께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이들은 우리가 아니다. 그저 남의 아픔이고 그들만의 아픔이라며 외면하는 이들은 우리가 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아픔의 역사다. 그 아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우리를 더욱 더 단단한 우리로 존재하게 하였다. 쪼개져 홀로 아프고 홀로 고통스러운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아픔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직면해야 한다. 너의 아픔을! 그의 아픔을! 그들의 아픔을! 그저 남의 아픔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공감하고 공유해야 한다. 더욱 더 우리는 하나의 공유 공동체, 공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서로 남으로 존재하지 않게 하는 존재의 끈은 더욱 더 단단히 묶여져야 한다.
민중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고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의 거룩함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과연 우리라는 말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그 숭고한 아픔의 공유자들의 거룩한 일어남은 친일파들이 이 땅에 만든 그 어떤 자본의 구조물보다 위대하다. 김구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보라. 제 한 몸의 행복을 위해 이웃을 팔고 착취하며 이룬 그 어떤 성과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다. 수많은 민초들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은 거룩한 우리됨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총칼로 권력을 얻어 총칼로 유지한 이들의 사악한 역사, 그 역사가 이룬 경제 발전은 우리 민초들의 고통이란 거름으로 이룬 우리네 역사이지, 총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운 그들의 덕으로 이룬 역사가 아니다. 총칼의 두려움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할 우리네 권력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민주화 운동, 그 운동의 역사, 고문에도 고개 숙이지 않고 당당히 일어선 역사가 총칼로 만든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우리의 역사다.
5.18은 아직도 외롭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저 과거라고 그저 남의 아픔이라며, 이런 저런 온갖 거짓으로 조롱하고 있다. 어쩌면 강자 앞에서 오랜 시간 분노를 숨기며 살아온 힘든 삶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려서일지 모른다. 강자를 향하여 소리치고 분노하고 싶었지만, 5.18과 같은 큰 공포의 경험 속에서 깊은 겁을 먹어 버린 것일까. 분노를 숨기고 오히려 약자를 향하여 분노를 토해낸다.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그들도 어찌보면 참으로 슬픈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5.18 앞에 함께 울어야 한다. 5.18 앞에 함께 분노해야 한다. 참된 사죄 없는 용서는 또 다른 악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기억하고 울고 분노해야 한다. 5.18 앞에서 우리는 함께 울어야 한다. 우리 울음이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어쩌면 그 함께 함! 그 더불어 있음이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하는 우리 존재의 끈이 될지 모르겠다.
5.18, 그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다. 그의 아픔도 아니다. 그날의 아픔도 아니다. 우리의 아픔이고, 지금 이 공간에 살아 있는 우리네 존재의 눈물이다. 함께 아파하는 아픔의 공동체로 우리를 묶어 주는 존재의 끈이 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일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해줄 한국철학, 우리의 철학은 바로 이 아픔을 직시하는 순간 가능하겠다. 이 땅의 아픔! 미국인의 아픔도 중국인이나 유럽인의 아픔도 아닌 우리의 아픔으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그런 철학이 바로 한국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구는 한국철학이 완전한 독립의 조건이라 했다. 아직도 우린 슬프다. 우린 아직도 온전히 우리가 아니고,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할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공유하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함께 울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철학의 첫 번째 조건일 듯 하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2603'유학장의 생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칠) 결국 사랑이다. - 함석헌, 사랑의 철학 (0) | 2016.07.15 |
---|---|
우리를 소 말 개 돼지라는 이들에게... (0) | 2016.07.09 |
지옥에서의 생존기 - 꿈은 비현실적이어야 한다. 유대칠 (가톨릭프레스) (0) | 2016.05.02 |
유학장의 생존 일기 - 개똥 철학 개론 2 (0) | 2015.03.20 |
유학장의 생존 일기 - 개똥 철학 개론 1 (0) | 2015.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