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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생존기

(유대칠) 결국 사랑이다. - 함석헌, 사랑의 철학

(유대칠) 결국 사랑이다.- 함석헌, 사랑의 철학
  • 유대칠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6-07-13 10:11:37
  • 수정 2016-07-13 10:13:00


체 게바라는 종이책으로 알던 세상을 온 몸으로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의사라는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하던 청년은 그렇게 험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종이책이 담지 못한 진짜 세상을 읽게 된다. 상식화된 고통으로 울고 있는 민중의 눈물로 이루어진 진짜를 읽게 된다. 그리고 변했다. 이제 가난한 이의 편에서 현실의 거대한 모순과 싸우는 또 다른 치유자의 삶을 시작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타협 없이 싸우는 청년의 모습으로 죽었다. 그러나 사라져 버리지 않고 녹아들었다.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그 고통의 원인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도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미래보다 사랑을 택했다. 자신이 본 그 아픔과 눈물을 뒤로 하고 평탄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남의 아픔을 그냥 남의 몫으로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더불어 울어야 했고, 더불어 싸워야 했다. 그것이 체 게바라가 생각한 자신의 참 모습이고 참 있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있었다. 깊은 종교심을 가진 이의 삶처럼 타자의 눈물을 위해 자신을 포기했다. 



지금 체 게바라의 삶은 가능할까? 이것이 의미있는 삶이기는 할까? 행복도 고통도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체 게바라의 천신은 있을 수 있을까? 차라리 의사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삶이라 하지 않을까? 왜 체 게바라는 그러지 않았을까? 간단하다. 부끄러워서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에 고개 돌리고 오직 자기 이익만 위해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을 것이다. 체 게바라에게 부끄러운 것이 지금 우리에겐 부끄럽지 않은 익숙한 일상이다. 오히려 그가 소설에나 나올 몽상가로 보인다. 현실에 없는 추상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살아 숨쉬던 사람이다. 단지 참된 사랑을 모르는 지금의 우리에게 그의 구체적 삶이 추상으로 보일 뿐이다.


순수한 사랑은 서로 다른 여럿을 ‘우리’로 만든다. 순수한 사랑이란 실체적 본질을 향한다. 우연히 잠시 혹은 어찌하다 머물고 있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권력 등을 보지 않는다. 오직 실체적 본질만을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참 있음’, 바로 그 ‘실체’를 향한다. 그렇게 될 때, 사랑하는 ‘그’의 눈물과 아픔을 그냥 남의 것으로만 놓아둘 수 없다. 그가 아프고 힘들까 두려워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두려움은 사랑을 더욱 더 아름답고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이란 이렇다. 이 두려움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위한 자유마저도 포기하고 그의 아픔을 위해 ‘더불어 있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 사랑은 자유마저도 더 신성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이런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다른 여럿을 ‘하나’로 만든다. ‘우리’가 되게 한다. 이기심 가득한 세상에선 설명 할 수 없는 신비의 하나됨,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힘으로 있게 된다. 함석헌이 생각난다.


“사랑은 구체적인 생명활동이요,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종교도 구체적인 것이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추상적일 필요는 없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함석헌에게 사랑은 추상이 아니다. 복잡한 이론이나 허구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살아있음이다. 살아있음이란 가장 분명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진리다. 부정 할 수 없는 내 삶의 근거다. 바로 그 근거가 사랑이다.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의 구체적 활동이다.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렇기에 종교 역시 추상이 아니다. 죽음 후 부활과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종교 아니다. 지옥행으로 협박하며 유지되는 것이 종교 아니다. 종교는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구체적 사랑이다. 종교의 존재 이유가 추상이 되는 순간, 종교는 죽음을 찬양하는 종교, 현실의 아픔에 고개 돌리는 종교, 이기적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사랑도 종교는 바로 지금 여기에 구체적 현실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눈물 앞에서 미루지 않는다. 사랑은 미루지 않는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의 행위다. 지금 ‘더불어 있음’이다. 그렇듯이 구체이지만 보편성을 가진 것이 사랑이고 종교다. 구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이념과 인종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더불어 있게 되는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 사랑이고 종교다. 모두를 외롭게 두지 않고, 홀로 울지 않게 하는 것, 더불어 같이 우리가 되는 것이 사랑이고, 종교다. 


▲ (사진출처=함석헌기념사업회)


“개인은 저만이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개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개인의 뒤에는 언제나 전체가 서 있다. 양심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요. 나기 전에 벌써 그 테두리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은 생리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족적인 사회적 존재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사랑 없이 ‘홀로 있기’ 원하는 이는 없다. ‘홀로 있음’은 지옥이다. 나의 웃음이 홀로 있고, 나의 눈물이 홀로 있는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이란 지금 이 순간 그 ‘홀로 있음’이다. 


“사람은 고립을 두려워한다. 비록 상상으로라도 허무의 캄캄한 소(沼)를 보여주고 너는 그 절벽에 홀로 서는 존재라 할 때는 저는 부르르 몸을 떨고 거꾸로 떨어지려 한다. 사람은 홀로가 아니다. 외톨이가 아니다. 나는 나다 하면서도 또 자기를 의미 있는 전체 속에서 발견을 하고야 안심입명을 하지, 그렇지 않고는 못 산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사람은 고립을 두려워한다. 이 말은 진리다. 봉쇄수도원 역시 신과 하나됨을 위한 공간이지 홀로 있기 위한 곳이 아니다.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우리 가운데 일원이며, 사회적으로도 우리 가운데 하나다. 홀로 있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설사 산다 해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이 그렇다. 개인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개인의 몫도 우리라는 사회적 틀, ‘더불어 있음’의 틀 속에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심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속에 만든 우리 존재에 내재(內在)한 것이다. 


개인은 우리라는 더불어 있음을 벗어날 수 없다. 정신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으로 존재한다. 그 사랑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우리’란 존재도 더욱 더 단단해진다. 한 사람을 연봉이란 숫자로 이해한다면, 실체는 지워지고 숫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한 사람을 사회적 지위로 이해한다면, 실체는 지워지고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랑의 주체는 숫자와 권력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고 전하는 주체는 ‘실체’다. 나의 ‘참 있음’이다. 나의 ‘돈’과 나의 ‘외모’와 나의 ‘학벌’이 아니다. ‘나’란 실체가 행복의 유일한 주체다. 숫자가 행복할 수 없으며 권력이 행복할 수 없다. 온전한 사랑은 실체와 실체의 만남에서 가능하다. 실체가 제외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잠시 머무는 우연한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일 뿐이다. 이러한 사랑은 온전한 우리를 만들지 못한다. 진정한 사랑은 실체와 실체의 마주함이며, 이러한 사랑만이 참다운 우리를 만든다. 


그런데 슬프다. 이런 사랑이 귀하다. 흔하지 않다. 일상이 아니다. 누군가의 연봉과 그의 권력과 그의 출신 학교 등이 그의 실체를 대신한다.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 우연히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대신 놓인다. 한 인간이 사라지고 그의 옷과 악세사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세월호의 아픔 앞에서 보상금을 이야기하는 이의 잔인함이 일상이 되어 버린 공간에서 ‘우리’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일까? 


남의 눈물은 그저 남의 눈물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우리’도 없다. ‘우리’가 없는 곳엔 수많은 ‘홀로 있음’만이 있을 뿐이다. 지옥이다. 홀로 울고 홀로 웃는 지옥이다. 


예수의 사랑은 실체를 향한 구체적 삶이었다. 추상이 아닌 구체적인 살아있음으로 사랑했다. 그 존재 그 생명이 곧 사랑이었다. 예수에게 인간은 ‘남’이 아닌 ‘우리’다. 그런데 인간은 신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워줄 존재, 돈을 주면 구원을 팔 구원판매상 정도로 본다. 그의 실체가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린다. 신앙은 신과 인간이 ‘우리’란 이름으로 ‘더불어 있음’이다. 누군가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면, 사랑하지 않고 사용하려는 순간, 우리는 부서지고 서로가 남이 된다. 이런 ‘남 되기’가 신앙이라 믿는다면, 그런 신앙이 깊어질수록 신과 인간은 더욱 더 멀어진다. 오히려 거리를 두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부서졌고, 그렇게 부서진 수많은 홀로들이 위롭게 힘들어하고 있다. 지옥이 남아있을 뿐이다. 구체적 사랑을 이야기한 함석헌, 사랑이 살아있는 구체적 살아있음이라는 함석헌, 홀로 있음으로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함석헌, 함석헌의 이야기가 마음 깊이 아프게 들린다.


우리에게 사랑이 가능할까? 힘들어도 결국은 사랑이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어쩌면 지금 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미움과 외로움의 유일한 답은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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