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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철학이야기/유학장의 머리엔...

인문학 노점상 유학장의 10월 15일 철학 일기

인문학을 욕성하자고 이야기를 한다. 간혹 인문학 교실이나 대안공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한 편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것이 필요할까? 당장 먹고 살기 힘든 대부분의 국민들이 있다. 당장 취업으로 인하여 힘든 청년들이 있다. 이런 청년들의 손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공자와 노자가 들려있지 않은 것은 정말 그들의 무지나 무관심 때문일까? 어쩌면 그들이 부자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는 살아야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즉 업자들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하다. 업자이기 때문이다. 업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되는가? 성형외과 의사는 성형수술을 하라고 할 것이다. 당연하다. 업자니까 그렇다. 개고기집 주인은 개고기를 먹으라고 할 것이고, 분식집 주인은 분식을 먹자도 할 것이다.. 다 이유는 같다. 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데 업자가 아닌 사람들의 입장이 중요하다. 결국 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야하니까 말이다. 어떤 이들은 비싼 식당에 비하여 값이 싸고 금방 먹을 수 있는 동네 분식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성형수술을 한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문학을 하는 철학교수나 역사교수 그리고 문학교수들나 관련 종사자들이 아닌 사람들, 즉 업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필요한가?

 

많은 이들이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좀 막연하다. 주변에 어떤 이는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앞부분을 읽고 그냥 재미없고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접어버렸다. 그의 손엔 성경책이 있다. 그의 눈에 성경은 거의 모든 인간사 물음의 답이 들어있다. 그러니 윤리학이나 실천철학 혹은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저런 것들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그냥 성경을 읽고 성경의 뜻에 따라 살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는 인문학이 아닌 성경이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이라기 보다는 어떤 명령이 필요하다. 모든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종교인들은 인문학이 필요없다. 그냥 성경이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신의 뜻을 찾는다. 니체를 읽어도 맑스를 읽어도 신의 뜻을 찾는다. 이들에게 인문학은 필요가 없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필요하고, 그 존재의 명령 속에서 모든 답을 구하려 한다. 물론 사람들마다 신의 명령은 다르게 들린다. 어떤 독재자는 자신의 악행 속에서도 신의 뜻을 구할 것이고, 어떤 타락한 목회자도 자신의 역겨운 행위 속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할 것이고, 없으며 자기 최면 속에서 조작을 해 버리기도 할 것이다. 이들에게 인문학, 즉 인간의 힘으로 고민하여 인간의 답을 구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신의 명령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는 신의 명령이 필요하다. 진짜 신의 명령을 구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이기심으로 신의 뜻이라고 해석해버리는 사기술로 사람을 속인다. 하여간 이들에게 인문학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철학은 그저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 잠시 듣는 과목일 뿐일지 모른다.

 

돈에 미친 이들도 인문학은 필요 없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책들이 있지만, 그 논리는 맘에 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그리고 공자도 자신의 교육이 취업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회를 개혁하는 논리를 만들고 이를 실천하려는 뜻을 가졌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문학을 만드는 과정이나 그 결실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은 돈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플라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철학을 하지 않았다. 공자도 그렇다. 철학, 인문학은 돈을 벌기 위하여, 즉 업자가 되기 위하여 하는 학문이 아니다. 요즘으 논술에 나온다니까 고교생들이 고전을 읽는다. 논술에 나오지 않으면 고전을 읽지 않는다. 필요 없으니 말이다. 논술에 나오기 때문에 읽는 고전은 참다운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는 인문학 고전 강독도 그렇다. 면접을 준비하는 것이 인문학은 아니다. 이들은 인문학의 결실을 공부하지만 이것이 인문학은 아니다.

 

신에 의지한 사람도 돈에 의지하는 사람도 인문학에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목사나 신부 그리고 스님도 인문학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취업이나 진학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인간 자신을 들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하면 신을 배신하는 부적절한 행위인가? 웃기다. 인간과 피조물도 신이 창조한 신성한 것이며, 신이 그 좋음을 인정한 위대한 존재들이다. 신의 모상인 인간이 신의 모상으로 자신의 모습으로 스스로 깨우친다면, 그 가운데 자신의 신성함을 느끼고 알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무엇인가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어떤 것을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인문학 요즘은 인문학을 말하기 힘든 시대다.

 

자본주의 시대, 사람들은 돈으로 가치를 평가한다. 신본주의 시대 신으로 세상을 평가하였듯이 말이다. 인문주의 시대,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자본을 보고 껏을 사용하며 , 인간 스스로의 존재 가운데 신을 볼 때, 인문학은 자생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업자들이 제발 물건 사라고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도 말이다.

 

우선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가 높여져야 한다. 가치가 높아지면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가운데 인문학을 시작할것이다. 가치가 없고 무시된다면, 사람들은 그 아픔 속에서 생존에 메달리게 되고 결국 인문학을 보기 힘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업자. 인문학자... 그 외부에서 인문학이 어떤 필요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냥 순서 없이 사유대로 따라가며 적어 본다...

 

BY YU AMBROS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