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철학학교 유학장의 인문 고전 읽기
중세 지중해 연안의 고민들
고전! 나는 이래서 읽는다!
윌리엄 오캄 등의 글을 읽는
것인가?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던 시대는 인터넷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대였고, 지금 처럼 길을 걸으며 연인이 키스를 하고 서로의 엉덩이에 손을 올리며 애정을 확인하는 시대도 아니다. 길거리에서 쉽게 성생활 도구를 살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주식이나 자본주의나 후기자본주의 등의 고민이 있지도 않은 시대였다. 공자와 노자의 시대도 다르지 않다. 대의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않은 시대이며, 남여의 법적 평등이 상식이 되어 버린 시대도 아니었다. 이들 인물들이 살던 시대는 이와 같이 우리의 시대와 너무나 다르다. 도덕에 대한 입장도 다르며, 자본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동성애와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라. 언젠가 개신교 신도와 목회자와 이를 두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들을 정신병자 혹은 성서에 어긋나는 존재라며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지금 한국도 이러한데 만일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수백년 전 인물에게 혹은 공자와 같은 천 년도 더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답은 너무나 당연할 듯 하다. 그런데 지금 일부 국가는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고 있으며, 많은 진보 사상가들이 이를 인정하며, 긍정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데 왜 고전을 읽는가? 그냥 과거의 생각이라면 고생물학자들이 공룡화석을 보듯이 그렇게 고전을 보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 이유에서 고전을 읽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읽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왜 고전을 읽는가? 이제 서서히 말을 해 볼까. 이 정도의 전회면 이제 진짜 재미를 보아야하고 진짜 새로운 무엇인가를 잉태해야할 때일 듯 싶다.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겠다.
고전을 읽는 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고전은 일종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어떤 물음이 주어져있다. 이 물을 두고 고민을 하기 위해 그 공간에 들어가면 한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바로 그 고전의 저자이다. 그 저자와 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고전이란 공간 속에서 읽기라는 행위를 통하여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때론 모르는 것을 배우기도 하고, 때론 나의 생각이 다르게 되기도 하고, 때론 저자와 나의 생각이 서로 융합하여 서로 엉키로 성키더니 전에 없던 무엇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굳이 비유한다면, 저자와 나의 즐겁고 유쾌한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지적 섹스를 통하여 전에 없던 우리만의 새로운 관점을 잉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전 읽기는 섹스와 같이 쾌락을 수반하며 동시에 새로움의 시작이 되는 그러한 지적 노동이다.
조선의 한 선비가 중국인이며 수 백 년 전에 이미 죽은 주희의 글을 읽는다. 그냥 주희의 글을 읽고 암기하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조선 성리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선비는 치열하게 읽는다. 주희에게 밀리기도 하고 밀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그러나 쾌락 가득한 작업을 통하여 그 선비는 자신의 사상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많은
사상들이 거대한 흐름을 구성하고 이것이 조선 성리학을 이룬다.
중세 무슬림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
톤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 종교적 차이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 그 철학자는 철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읽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중세 무슬림 철학을 이루고 이것은 다시 서유럽에 전달되어 서유럽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서유럽의 한 스콜라티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무슬림 철학자인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의 글을 읽는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다. 암기용이나 칭송을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철저하게 읽는다. 밀고 밀리면서 읽는다. 그 힘겨운 과정을 걸쳐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다. 이것이 후기 중세 스콜라 철학을 이룬다.
고전 읽기는 수동적 읽기가 아니다. 고전 읽기는 휴대폰 사용 설명서를 읽듯이 그렇게 수동적으로 무엇인가 배우고 암기하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니다. 고전 읽기는 새로움을 낳기 위함이다. 그 새로움은 자신만의 사상 혹은 세계관 혹은 철학이다.
자기만의 세상을 살고 싶다면!
지금 고전을 읽고 그 고전 이란 기방에서 열심히 쾌락 가득한 그러나 힘든 섹스를 즐기기 바란다. 그러면 어느 사이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이것이 내가 고전을 읽는 이유다.
유지승 씀 (Thomas Philosophia Schola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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