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캄연구소 유소장의 중세철학사들
첫 시간 – 과거에 대한 접근
<자유로운 인용은 가능하지만 출처를 분명히 해주세요. 이 강의는 De Libera의 중세철학사를 기본 교재로 이루어지는 오캄연구소의 2015년 중세철학사 강의의 강의 정리 노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린 서기 2015년이라고 한다. 서기란 그리스도교력에 따른 시대의 구분법이다. 유럽의 것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따른다. 왜 이것을 사용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그것이 당연하다. 이미 우린 충분히 서구화되어 있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서유럽화되어있다. 도서관에서 가서 ‘중세철학사’라는 이름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은 아시아의 중세철학이나 아랍지방의 중세철학이 아니다. 서유럽의 중세철학이다. 오히려 아시아나 아랍의 중세철학을 위해서는 따로 그 지역을 나타내는 관형어가 더해진 것으로 검색을 해야 한다. 이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당연한 것일까?
과거 중국은 그들 왕을 기준으로 연호를 삼았다. 그리고 우리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절요> 등을 보면 삼국와 고려의 왕을 기준으로 무슨 왕 몇 년이란 식의 방식으로 시대를 기억하고 나누고 접근한다. 역사란 어떨 수 없이 시대의 구분과 확정을 요구한다. 그냥 아주 먼 옛날이라고 할 순 없으니 말이다. 서유럽이 그리스도교력을 사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예수의 탄생에 두는 것은 그들이 가지는 공통된 종교적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아랍 지방에도 이와 유사하게 그들의 이슬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했다고 하지만, 실상 그 시대를 살아간 이순신은 그러한 시대 구분을 모른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접한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력을 안다고 해도 이순신은 왜 예수의 탄생을 조선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아야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역사 구분의 기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서유럽의 것이 되어 버렸다. 서유럽 사람의 눈으로 시간을 돌아온다. 그리스도교를 기준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그를 믿는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돌아본다. 그렇게 시간을 돌아보는 눈이 획일화된다.
지중해 연안엔 여러 철학들이 있었다. 동시대에 존재하였지만, 하나의 정신적 시간을 살지 않은 서로 다른 여러 동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서유럽에서 한 철학자가 철학을 일구고 있는 그 시간에 비잔틴에선 또 다른 철학자가 서유럽의 철학자와 다른 고민을 같은 물리적 시간에 동시에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다. 이 둘은 서로 모른다. 또 아랍지방에 그리고 유대지방에도 각각 또 다른 철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철학들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모른다. 서로 모르고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철학을 만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 서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주함의 이전에 서로 완전히 격리된 자신만의 고민에 빠진 다수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동시지만,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븐 시나(Ibn Sina)는 아랍어로 بُو عَلِي الحُسَينْ بِنْ عَبْدْ الله بِنْ الحَسَّنْ بِنْ عَلِي بِنْ سِينَا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알핫산 이븐 알리 이븐 시나)이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인이다. 그렇기에 페르시아어로 보면 أبُو عَلِی الحُسَینْ إبْنْ عَبْدْالله إبْنْ سِینَا (아부 알리 알 호세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이고, 그에게 asg은 영향을 준 고전 그리스어로 그의 이름은 Αβικέννας (아비케나스)이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철학을 일군 서유럽의 라틴어로 Avicenna (아비센나)이다. 다양하다. 그는 이슬람력으로 370년에 태어나 427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력으로 그는 980년에 태어나 1037년에 죽었다. 쉽게 생각하면 그리스도교력이나 이슬람력으로 980년에서 1037년을 산 것이나 이슬람력으로 370년에서 427년을 산 것은 동시다. 물리적으로 동시이지만 이 시간은 동시가 아니다. 다르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이븐 시나 자신은 스스로를 아비세나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케나스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븐 시나라고 불렀다. 이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글러나 유럽인들에게 그는 아비센나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궁리하며 읽고 연구한 그 아비센나는 스스로를 아니센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이름도 몰랐다.
흔히 우리는 중세철학사에서 이븐 시나가 아닌 아비센나를 접한다. 이븐 시나 자신의 시간에서 그 자신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유럽 사람들에게 보인 이븐 시나, 즉 아비센나를 보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력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븐 시나를 아비센나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하다. 시간을 이해함에도 우린 서유럽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이슬람의 시간을 살아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유럽과 다른 종교와 다른 가치관 그리고 다른 언어를 읽으며 철학을 일군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공부했다지만, 그것도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것을 읽으며 공부한 철학자다. 페르시아어로 철학을 한 철학자다. 그는 그만의 시간에서 그만의 철학을 일구었다, 그런데 그를 그리스도교력에 편입시킨다. 강제로 말이다. 그에게 이름도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닌 라틴어화한 이름을 붙인다. 이비센나라고 말이다.
지중해 연안엔 다양한 철학들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작들도 라틴어로도 다양하게 번역이 되고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고 히브리어와 아람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그 지방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다비드(Դաւիթ Անյաղթ Davit' Anhağt)는 아람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풀이하고 공부하였다. 그의 시간 가운데 그의 철학을 만들어냈다. 아베로에스(Averroes)라고 흔히 불리는 아랍어로 : أبو الوليد محمد ابن احمد ابن رشد(아불 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루시드)는 아랍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풀이하고 공부했다. 흔히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라고 부르는 משה בן מימון (모세 벤 마이몬) 그리고 아랍어로 أبو عمران موسى بن ميمون بن عبد الله القرطبي الإسرائيلي (아부 임란 무사 빈 말문 마이문 이븐 압달라 알 꿀투비 알 이스라일리)는 히브리어로 그리고 앞으로 소개한 이븐 시나는 페르시아어로 철학을 일구었다.
이들은 물리적 시간은 동일하지만, 이들의 정신적 시간은 동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서구의 시간과 서구의 시야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가의 임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적 복원을 스스로 거부하는 꼴이다. 역사의 기본은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을 살아갔지만 정신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 이들을 어떤 편견이나 무시 없이 최대한 온전히 접근하여 복원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력의 눈으로 모든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 이들을 통일하는 것이 잔혹한 짓이다. 역사학적 살인이다. 이븐 시나는 이븐 시나의 시간 속에서 온전히 복원될 수 있다. 아비첸나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서유럽 철학자들의 이븐 시나 이해를 연구하고 그들의 철학을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비세나로의 접근이 이븐 시나를 복원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역사학은 하나의 관점에서 통일하고 그 통일함으로 인하여 수많은 서로 다른 시간을 무시하지 않고 그 시간을 살아간 수많은 지혜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학이 과거 서로 다른 시간을 무시하는 것은 분명 일종의 역사학적 살인이다.
본 중세철학에 대한 강의는 최대한 역사학적 살인 없이 진행될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 서로 다른 시간 속 철학자들을 최대한 공정하게 바라보고자 할 것이다. 물론 나도 주관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것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주관을 살아가는 나의 시간 속에서 최대한 열심히 그리고 공정하게 그들의 시간에 다가가야 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오캄연구소 월요일 중세철학 강의 정리 2015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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