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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철학이야기/중세 지중해 연안의 고민들

신의 절대적 권능과 질서잡힌 권능의 문제, 합리적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과 신앙의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의 충돌!

신의 절대적 권능과 질서잡힌 권능의 문제, 합리적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과 신앙의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의 충돌!

 

[Francis Oakley, Omnipotence, Covenant and Order : An Excursion in the History of Ideas from Abelard to Leibniz (Ithaca : Cornell University Press, 1984), 41-65 읽고]

 

유대칠 오캄연구소장 정리

 

후기 중세 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이 있다. 바로 '절대적 권능' '질서잡힌 권능'이다.  프랜시스 오클리(Francis Oakley) 이를 논문에서 다루고 있다. 히에로니무스는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을 달리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처녀막이 파괴된 이후에도 그것을 다시 부활시킬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067 몬테사지노 수도원에서 열린 논쟁에선 이러한 주장은 도전을 받게 된다. 다미아니(Damiani)는 히에로니무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전능함과 그의 절대적 자유가 부정당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면 그가 한번 것은 절대 없던 일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50 아벨라두스는 문제의 딜레마를 포착한다. 만일 하느님이 전능하다면, 하느님은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존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가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신은 최선이 아닌 세상을 만든 셈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이 세상은 존재하는 최고의 상태라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단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전능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이들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이에 성 빅또르의 위고(Hugo of St. Victor)와 롬바르두스는 하느님은 지금 존재하는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권능이 그의 의지와 어떤 관계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전능하다. 이것은 앞서 의지한 것과 다르게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있으며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벨라르두스가 이야기했듯이 이는 서로 모순 관계를 가진다.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다르게 되기를 의지한다는 것은 앞선 의지가 잘못일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제안된 것이 하느님의 권력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초기에 제안한 것은 알베르투스 마뉴스로 보인다. 그는 1260년 경에 하느님의 권능을 절대적 권능(absoluta potentia)'질서잡힌 권능'(ordinata potentia)로 구분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벨라르두스와 같이 하느님의 전능성을 희생하는 것과 하느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 것 사이에 간등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권능 그 자체를 보면 절대적이다. 절대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적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로운 의지에서 나오는 명령을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명령된 혹은 질서잡는 권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능은 신의 선성과 섭리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논의의 강조점은 '질서잡힌 권능'이다. 인간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이 우주는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질서잡힌 세상이다.

 

절대적 권능과 질서잡힌 권능은 오랜 시간 다루어진다. 하지만 그 활용의 방식은 변화했다. 절서잡힌 권능은 지금 작동되며, 어떤 경우 우주는 신의 그러한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의 학문이 가능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질서잡힌 권능은 기적의 원인이 아니다.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권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유입되면서 우주를 정해진 규칙에 의하여 이해하기 시작했다. 합리적으로 우주를 이해하려는 것,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는 신의 절대적 자유와 대립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게 된 것이 절대적 권능과 질서잡힌 권능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이야기하는 우주론은 질서잡힌 권능으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우주는 신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신은 처녀의 임신을 가능하게 하고, 바다를 가르게 한다. 죽음 이를 부활시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