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탈리아에서의 아베로에스주의 그리고 오캄주의
[John Monfasani "Aristotelians, Platonists, and the Missing Ockhamists : Philosophical Liberty in Pre-Reformation Italy " Renaissance Quarterly 46 (1993) : 247-76을 읽고]
유대칠 오캄연구소장
이탈리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 논문은 바로 그 점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북유럽은 아베로에스의 철학에 대한 금지령에 의하여 사실상 14세기 중엽부터 그 논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이탈리아는 사정이 달랐다. 13세기 이미 볼로냐 대학 인문학부에선 아베로에스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16세기 후반까지 이어진다. 또 아베로에스주의와 별도로 폼포나치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이탈리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이탈리아가 북유럽에 비하여 종교의 힘이 약하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볼로냐 대학은 이미 점성술을 가르치던 Cecco d'Ascoli는 이단이란 이름으로 1327년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아바노의 피에트로는 파도바에서 이단으로 판결을 받기 전에 죽게 되고, 그 시체는 파헤쳐지고 불살라졌다. 1395년 Biagio Pelacani는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학설을 강의한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파면되었다. 1489년 파도바의 주교는 아베로에스주의의 지성단일성론을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아베로에스주의의 영혼 불멸성을 철학 논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 역시 종교의 힘을 여전히 강력했다.
하지만 북유럽과 이탈리아는 대학의 형태에서 차이가 있었다. 종교 개혁 이전 이탈리아 대학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이 가지고 있던 신학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학은 14세기 중반부터 생신 신학원(collegia theologorum)은 대학 내부에서 독립적인 학부로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북유럽에서와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세 이탈리아 대학은 법학부 및 인문학부 그리고 의학부라는 두 개의 축으로 있었다. 하지만 북유럽의 대학은 법학부, 신학부 그리고 의학부의 세 가지 학부로 대학을 구성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와 달랐다. 파도바 대학이 1490년에 그리고 볼로냐 대학이 1566년에 신학 수업을 실시하려 했을 떄, 이 역시도 인문학부와 의학부에 속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대학에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대학의 행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대학에서 신학의 위상을 높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도 신학 교육은 있었다. 그 역할을 대체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담당했다.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사제들은 신학 학위를 가지고있지 못했다. 대학 내부의 신학원(collegia theologorum) 역시 대체로 탁발수도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유럽과 같이 수도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구 사제들이 주유 성직자가 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대학은 인문학부에서 일어나는 논의에 신학자들이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북유럽과 다르다. 이탈리아 대학에서는 오캄의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북유럽의 대학에선 오캄의 신학이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신학부에서 학위를 가진 이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북유럽 중세철학사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길'(via moderna)과 '옛 길'(via antiqua) 사이의 논쟁이 없었다.
이탈리아 대학에선 아베로에스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보나의 피에트로는 아베로에스주의자로 비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의학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Cecco de'Ascoli 역시 아베로에스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탈리아에서 아베로에스가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1489년의 금지령 때문이다. 파도바의 스코투스주의자들이 이와 관련된다. 둔스 스코투스 자신은 영혼 불멸성을 철학적으로 다룸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학자들은 영혼 불멸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들은 아베로에스주의자를 논박하기 시작했다. 스코투스주의가 존재하는 대학에서 아베로에스주의는 곧 사라져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1485년 피치노는 <영혼 불멸성에 대한 플라톤 신학>을 발표한다. 제목에서 부터 아베로에스주의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테란 공의회를 열었던 레오 10세는 피치노를 지지하고 후원한 로렌조 디 메디치 가문의 아들이다. 또한 그는 야코포 다 디아체또(Jacopo da Diacetto)와 비테르보의 자일스(Giles of Viterbo)와 같은 플라톤주의자와 친했다. 이 가운데 자일스는 파도바의 아베로에스주의자를 비판하던 인물이다. 그리고 스코투스주의자인 게르지아 베니그누스(Georgius Benignus)와도 친했다.
이탈리아의 오캄주의자들이 없던 것도 이와 관련된다. 북유럽의 철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성은 입증할 수 없다고했다. 이탈리아는 그러한 오캄의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도니미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탁발수도회의 학자들은이를 입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하여 신학부가 없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저항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그리 강하지도 오래 가지도 못했다.
이리 보니, 이 논문은 중세 후기의 대학과 북유럽 그리고 이탈리아 대학의 특색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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