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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철학이야기/중세 지중해 연안의 고민들

중세 지중해 연안의 고민 - 진짜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도의 원죄와 보편자 문제

 

1. 진짜 있는 것은 무엇인가?

1.1 오도의 원죄 이론

 

20091월이다. 길을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제법 큰 교통사고로 나는 평생 처음 입원이란 것을 했다. 태어날 때에도 병원이 아닌 보건소에서 태어난 나이기에 입원이란 것 자체가 평생처음이었다. 입원뿐 아니라, 몇 시간에 걸친 수술도 여러 차례 받게 된다.

 

병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생 가장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나 몇 십일을 천장만 보았다. 그 동안 한 권을 책을 읽었다. 경주에 대한 책이었다.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이란 책이다. 난 대학생 때부터 경주를 제법 자주 다녔다고 생각했다. 불국사도 여러 번 다녔고, 박물관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내가 본 경주는 책의 저자가 본 경주와 달랐다. 책의 저자는 경주 속에서 과거 신라의 역사를 보고 있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삼국유사>란 안경을 쓰고 살아있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의 신라를 보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온전히 경주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경주를 찾았다. 경주를 보다 더 온전히 보겠다는 맘을 가지고 갔다. 그런 맘으로 불국사를 보니 다보탑과 석가탑에서 희미하지만, 신라의 고승들과 그 고승들의 고민 속에서 마련된 불교 철학이 조금씩 보이는 듯 느껴졌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나에게 존재하게 되었다. ! 이런 것이구나! 눈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이 눈으로 보는 세계만큼 이나 더 강하게 나에게 존재로 다가올 수 있구나! 서유럽의 중세로 가보자. 서유럽은 힘들었다. 일상은 쉽지 않았다. 유럽 중세인들의 평균 수명은 30세에 불과했다. 많은 여인이 출산 중 사망하였다. 많은 이들이 힘든 농사일로 힘들어 했고, 폐결핵도 빈번했다. 수 백 년 간 의상이라곤 옷이라기보다는 그냥 천을 몸에 두르고 살았다. 이들에게 현실은 차라리 가짜이길 원했을지 모른다. 진짜는 이렇게 힘든 세상,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이 있으며, 그 기쁨의 소멸에서 오는 절망이 있는 이 현실보다는 영원한 기쁨, 영생의 공간,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진짜이길 원했을지 모른다. 그 바람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맘속에 간절한 세상을 진짜 존재하는 세상으로 믿게 하는 실재론(實在論)이란 존재론적 입장을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아마 인간의 눈이 점점 더 현실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면서, 인간은 그들이 믿던 그 현실을 부정하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바로 이것을 긍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맘에서 유명론(唯名論)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인간저 인간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한결이은결이가 눈에 보인다. ‘인간은 볼 수 없다. 눈에 인간이 보인다면, 그 인간이 다치면 인간이라고 불리는 모든 존재는 다쳐야 한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지성’(intellectus)의 대상이다. 감각(sensus)으로 지각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이 인간혹은 저 인간’, 즉 개별적 인간인 한결이’, ‘은결이’, ‘진희’, ‘유경등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없다고 하긴 힘들다. 광대토호태왕도 죽고, 근초고왕도 죽고, 진흥왕도 죽었다. 이방원도 죽고, 왕건도 죽고, 연개소문도 죽고, 대조영도 죽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수많은 인간이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2009년 태어난 한결이도 인간이고, 2012년에 태어난 은결이도 인간이다. 그러나 이 인간이 태어난 것이지 인간이 없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인간들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어떤 프로그램일 수 있다. 이 지구상의 수많은 PC가 있다. PC2012년 현재 Window 7으로 구동이 될 것이다. OS(Operating System)가 없다면 PC는 온전히 컴퓨터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많은 PC가 컴퓨터로 작동하는 것은 하드웨어라기보다는 그것을 구동하게 하는 OS 때문이다. 이 가운데 몇 대의 컴퓨터가 부서지고, 몇 대는 노후 되어 버려졌다고 해서, OS프로그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인간을 인간으로 구동하게 되는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보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소크트웨어인 인간이다. ‘인간이란 소프트웨어는 몇 명의 인간이 죽고 늙고 병들고 사라지고 혹은 태어나고 웃고 울고 즐기고 화를 내도 변화하지 않고 존재한다. 죽고 사라지는 것은 그저 하드웨어일 뿐이다.

 

실재론자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이 있지만,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이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모든 하드웨어의 요소들, 단백질과 지방 등을 가져와도, 그것을 두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구동하게 하는 OS인간이란 프로그램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ecclesia) 혹은 신자라는 프로그램을 하위에 두고 있다고 하자. 교회가 교회인 것은 교회라는 소프트웨어, OS 때문이다. ‘신자역시 다르지 않다. 라틴 교부들, 그리스 교부들 그리고 오리엔트 교부들이 초기에 궁리한 것은 바로 교회라는 OS. 도대체 무엇이 교회인지? 그리고 교회의 기본 언어가 되는 신앙’(fides)은 무엇인지? 구원은 또 무엇인지? 오리게네스(Origenes)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등 많은 교부들이 이를 고민했다.

 

이제 교부 신학자 오도(Odo Tornacensis, 1113년 사망)의 글을 읽을 것이다. 그는 고민한다. 무엇이 진짜 있는가? 그 가운데 그는 원죄에 대한 신학적 고민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길을 마련하고자 한다. 미리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몇몇 이들은 과거를 패배자의 역사라도 되는 듯이 지금 자신의 신학이나 철학이 승리자이고, 과거에 대하여 기존에 있는 신학사나 철학사를 몇 줄 읽고 그것으로 평가하려 한다. 중세는 이런 식의 입장이고, 종교 개혁자 누구의 해석이 바르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지 말자. 오도도 오리게네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들의 삶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보다 더 강렬하고 처절한 고민이었을지 모른다. 환경이 다르니 생각도 다를 것이다. 그 다름 앞에 승패를 이야기하지 말고, 그들의 고민 속으로 최대한 내재적 접근을 해 보자.

 

오도의 <원죄에 관하여> 발췌

 

2

 

류와 종과 개별자에 관하여.

/1078D/이 의문에 반대하여 그 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1079A/ 그것은 류와 종이 관련되어지는 것과 다르게 개별자가 종과 관련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종은 류보다 더 실체적으로(substantialiter) 관련되며, 류는 종의 실체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종은 류 뿐 아니라, 거기에 실체적으로 차이(종차 種差)를 가지기 때문이다. , 종이 류 보다 더 실체적이다. 그런 이유에서 인간동물보다 더 실체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종차인> ‘이성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것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개별자들은 종 이상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으며, 실체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지만, 인간과 페트루스는 다르다. 하나의 종 아래 여러 개별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우유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종만이 류 가운데 존재할 수 없을 때도 개별자는 종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마치 페트루스를 제외한 모든 개별자 인간이 살해되어도, 오직 인간 종은 개별자 페트루스를 가지듯이 말이다. /1079B/ 페트루스는 우유적 집합에 의한 개별자이다. 예를 들어, 인간 종은 종이다. 왜냐하면 종은 다수 개별자 가운데 공통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불사조와 같이, 비록 하나를 가지는 것이 개별자일지도, 여럿 가운데 공통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종이다. 그렇기에 ‘<> 불사조이 불사조는 다르다. 불사조는 종적 본성(specialis natura)이다. 이는 공통된 것이다. 이 불사조는 참으로 개별자인 한에서 본성이다. 이는 특수자(singlaris)와 다르게 존재할 수 없다. ‘<> 불사조는 류와 차이로 특정되어지며, ‘이 불사조는 우유들의 속성으로 고려되어진다. 개별자는 오직 하나인 것에 대하여 말 될 수 있다. 비록 종은 오직 하나에 대하여 서술되어질 뿐이라도 말이다. 참으로 개별자는 오직 특수자이다./1079C/

류와 종차로 부터 이성은 종을 포착하고, 우유의 속성으로 부터 감각은 개별자를 지각하며, 보편자를 위하여 이성의 더 내적인 이성이 유효하고, 특수자를 위하여 참으로 외적인 감각적 인식이 유효하다. 우리는 개별자를 물질적으로 감각하고, 보편자는 이성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단지 종에 대하여 개별자로 말 될 때, 우유가 개별자에 대하여 말 된 것으로 유효하듯이 그리고 종에 대하여 말 되는 것이 유효하다. 비록 근본적으로 그리고 앞선 곳에서 개별자 가운데 우유가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개별자(individua)에 관하여.

/1080A/또한 개별자는 우유의 속성들로 함축된 것이다.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왜냐하면 개별자에 대하여 더 상위 것이 말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개별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종이 여럿 가운데 내재하지 않으나 오직 개별자만을 가진다면, 그 자체는 개별자에 대하여 말 된다. 참으로 개별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새에 대하여 불사조가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세상이 또한 이 별에 대하여 태양이 서술되어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서 개별자는 보편자에 의하여 서술되며, 전체에 의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가운데 개별자가 있기 때문이며, 이는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는 그것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자체가 자신의 작음으로 나뉘어질 수는 없다. 마치 수적으로 하나와 선 가운데 점과 물체 가운데 원자와 같이 말이다. 그렇게 이는 보편자 가운데 가장 하위의 것이고, 전체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다./1080B/ 바로 이것이 개별자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작음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전체를 구성하지만 구성되어지지는 않는 개별자가 더 하위의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편자의 개별자는 나누어지지만, 나누어져지지는 않는다. 전체의 우선된 개별자는 전체의 구성 가운데 있다. 궁극적인 보편자의 개별자는 보편자의 구분 가운데 있다. 보편자의 개별자는 보편자 그 자체, 전체 그리고 완전한 것을 그 자체 가운데 가지며, 전체의 개별자는 전체에 대하여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 자체 가운데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다.

 

인간이 있고, ‘이 인간이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인간이 있고 유지승’, ‘안현주’, ‘유한결’, ‘유은결과 같은 개별적 인간들이 있다. 그러면 인간이 더 진짜인가? 아니면 유지승’, ‘안현주다 진짜인가? 오도는 어느 것이 더 실체적인지를 묻는다. ‘실체적이란 말은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고 더 참된 존재의 모습을 가지는지를 묻는 물음이다. 오도는 개별자들이 아닌 인간이 더 실체적이라고 한다. , ‘이 참으로 더 본질적이고 더 진짜인 것, 즉 더 실체적이라고 한다.

 

페트루스’, ‘요하네스와 같은 개별적 인간들은 태어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이를 두고 오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을 가져다 적용한다. , ‘은 실체적이고, 개별자는 우유적 속성이 함축된 것이다. ‘유지승의 머리 모양과 서 있는 장소 그리고 움직임과 옷차림 그리고 취미는 다르게 될 수 있다. 과거엔 염색을 했지만, 지금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 과거엔 대부분이 체크 남방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거엔 대구 수성구에 살았지만, 지금은 대구 달성군에 산다. 그러나 유지승유지승이다. ‘유지승장동건이나 김민종이 되진 않았다. 변화하지 않는다. ‘유지승을 둘러싼 옷차림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우유들이다. ‘유지승유지승의 우유의 관계를 인간개별 인간들에 적용한다. 오도에 따르면, 종이 류가 가지지 않는 종차를 가지기에 더 실체적이고, 종은 개별자보다 더 실체적이다. 인간동물보다 더 실체적이고, ‘페트루스보다 더 실체적이다. 이러한 보편자인 종인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감각 기관으로 보편자 인간을 인식할 수 없다.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는 것은 감각 대상인 개별자뿐이다. 개별자는 감각의 대상이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적으로 진짜 존재인 인간이 아니다.

 

오도의 주장은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상당히 과격하다. 한 인간이 태어난 것은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실체의 새로운 성질, 즉 우유적인 것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하나이다. 각각의 인간은 이 종이며 보편자인 하나의 인간이 가지는 여러 성질 혹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유지승스피노자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았지만, 그것은 인간이란 하나의 실체가 가지는 여러 성질일 뿐이다. 실체인 인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실체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개별적 인간들은 오히려 눈에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덜 실체적이다. 아니 오도의 표현에 따르면 우유적이다.

 

그렇다면, 선악과(善惡果)를 먹으며 의 명령을 거스른 아담하와의 실체는 지금 21세기 유지승과 실체의 측면에선 다르지 않다는 논리가 된다. 오도는 원죄, 아담하와에 의하여 이루어진 원죄를 개별자인 아담하와를 향한 시선에서 보지 않고, ‘인간 실체혹은 인간 본질의 관점에서 본다. 죄를 지은 존재는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이 죄를 가지기에 인간의 여러 우유적 모습 혹은 성질들은 당연히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한 인간은 우유적이며, 그 인간의 본질 혹은 실체인 보편자 인간은 그 개별자보다 더 실체적이고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그 실체이며 본질이 감염이 되었다면, 당연히 그 본질과 실체에 의존한 우유들도 죄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착하고 누군가는 사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한 실체의 우유들에 대한 평가이다. 즉 개별적 인간, 개인들에 대한 평가는 본질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 본질 혹은 실체의 우유들, 즉 우연적 모습들에 대한 평가다. 본질 혹은 실체는 죄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본질과 실체가 여럿이 아닌 하나이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된다. 오도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들의 본질 혹은 실체가 하나가 아니라면, 하나의 인간 본질 혹은 실체 외부에 인간의 본질 혹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순이다.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외부에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의 본질과 실체를 가진다. 그리고 오도는 바로 그 실체가 종, 즉 보편자이며, 이것이 원죄의 주체로 보고 있다.

 

보편자 논쟁은 어떤 이는 탁상공론(卓上空論)라고 한다. 신앙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너무 합리적이기만 하다고 한다. 첫째 절대 탁상공론이 아니다. 당시는 구원의 문제는 신학자들에겐 너무나 중요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죄와 같은 문제도 너무나 중요했고,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인 이성으로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앙적인 행위이며, 동시에 이성적 행위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원죄의 문제는 어쩌면 그들 스스로 합리화하기 힘든 것이었고, 오도와 같은 철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민에 대하여 당시 인문학적 지식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한 합리화의 역사는 철학사가 되고 신학사가 된다. 물론 오도의 주장에 대한 다양한 반론이 등장한다. 그와 다른 입장들도 등장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반론은 원죄에 대한 더 많은 입장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 많은 입장들은 중세의 철학을 단수가 아닌 복수의 형태, 철학들혹은 신학들이 되게 한다. 물론 이들에게 신앙은 하나였지만, 그 하나의 신앙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들이 공존하며 서로와 논쟁하고 서로와 화해하며 그렇게 중세를 채워갔다.

 

<이 글은 유대칠(유지승)이 저작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문적 용도의 자유로운 인용 이외 출처을 분명히 나타내지 않은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