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의 (Titus Flavius Clemens Alexandrini) (150-215?)
그리스도교 신학자이며, 그리스 사상계를 상대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체계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2번째 교장이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가장 오랜 저서로는 <프로트렙티코스>(Protreptikos)와 <교사>(Paidagogos) 그리고 <스트로테이스>(Stromateis)가 있으며, 그 이외에도 여러 성서 주해와 영지주의자와의 논쟁 등의 저서들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아테네의 이교도였다. 그 이외 그의 유년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단지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을 떠돌며 인문학적 소양을 키웠으며, 마지막으로 스토아 철학자이며 동시에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법 학교의 교장인 판타이누스(Pantaenus)를 만나 그에게 배우고 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그리고 180년 이후 스승의 뒤를 이어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된다. 교장이 된 이후 20여 년간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윤리와 신학 그리고 성서 주해와 영지주의에 대한 논쟁 등에 대하여 연구하고 저작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과 모세의 전승에 의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조화시키려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조가 당시 그리스의 교육받은 이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에 만들고자 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이해되어지는 것, 그리스인들이 알아듣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 철학이 가지는 기본적인 입장이며, 이러한 자신의 목적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문화에 안착되게 하고자 했다. 학문과 철학이 진정 진리를 향하는 것이라면, 그 진리란 하나이며, 여러 지류가 있어도 결국은 하나에로 흘려든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또한 진정한 철학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입장은 클레멘스 이후 교리문법학교의 교장이 된 오리게네스에게 영향을 주게 되며, 멀게는 서구의 삼학(三學, trivum) 사과(四科, quabrivium)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클레멘스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그노시스’(Gnosis, 지식)란 개념도 가져다 쓴다. 교육을 받지 못한 당시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은 정통파 율법주의자의 영향 속에 있게 된다. 클레멘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교육 받지 못한 이들과 당시 그리스 사상을 잘 교육받은 그리스도교인들 모두에게 유익한 용어의 재해석을 시도하며, 이러한 시도에 의하여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와 신앙만을 유독 강조하는 정통 율법주의를 중재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참된 ‘그노시스’는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며 조화였다. 이성만도 신앙만도 아니었다. 신앙만을 강조한 율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신앙이 구원의 근거라고 한다. 하지만 참된 신앙이란 그노시스, 즉 영적이며 신적인 지식에 기반 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로고스’(logos)와 ‘노모스’(nomos)를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로고스는 ‘하늘의 나라’이며, 노모스는 ‘땅의 나라’와 관련된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와 같이 하늘의 나라를 제도 교회와 일치하여 보진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은 로고스에 따라서 하늘의 나라 시민답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고, 그런 한편 노모스에 따라서 땅의 나라의 시민답게도 살아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둘이 마찰을 일으킬 때, 더 높은 율법인 로고스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로운 전쟁의 선구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시대적 고민과도 클레멘스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2세기 말, 클레멘스가 살아가던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부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성서에 등장하는 부자에 대한 비유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사회의 경제적 상황에 클레멘스는 신학적 입장을 내어놓는다. 부자에 대한 구원론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부자의 구원에 관하여>에서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그 참뜻을 알아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어놓는다. 즉 부자들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를 도와라고 할 때, 부자들에게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재산에 종속되거나 과다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경제로 해석한다.
그는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박해기에 교리 학교를 사임한다. 그 뒤를 초기 교회의 대학자인 오리게네스가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였던 예루살렘 주교인 알렉산더(Alexander)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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