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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보기/중세철학자열전

플레톤 (약 1355–1452/1454, 그리스어 : Πλήθων)

플레톤 (13551452/1454, 그리스어 : Γεώργιος Πλήθων Γεμιστός)

 

유 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게오르기우스 게미스투스, 후에 플레톤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신플라톤주의 그리스 철학자다. 그는 서유럽에 일어난 그리스 교육의 부흥에 있어 매우 주도적이며 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1438년에서 1439년 동서 교회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플로렌스 공의회 동안 서유럽에 플라톤의 사상을 다시 소개한 인물이다. 여기에서 플레톤은 새로운 플라톤주의 아카데미아’(Accademia Platonica)를 세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를 만나게 되고, 영향을 주게 된다. 이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를 수장으로 임명하고 아카데미아의 문을 연다. 그 이후 피치노의 지도 아래에 이 아카데미아는 플라톤(Platon)의 그리스어 저작과 플로티노스(Plotinos)엔네아데스(Enneades) 그리고 그 이외 다양한 신플라톤주의 그리스어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하게 된다.

플레톤은 135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냈다. 어린 시절 그는 1365년에서 1457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nopolis)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곳은 새로운 교육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그는 플라톤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과 유사한 이름인 플레톤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플라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다. 1407년 플레톤은 아드리아노플로스를 떠나. 치프루스(Cyprus)와 팔레스타인(Palestine) 등을 걸쳐 최종적으로 미스트라(Mistra)에 도달하여 정착하게 된다. 미스트라에서 그는 철학과 천문학 그리고 역사와 기하학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많은고전 학자들의 저작의 개용을 편집하게 된다. 그 시대 그의 제자는 바실리오스 베사리온(Basilios Bessarion)와 게오르게 스콜라리우스(George Scholarius) 등이 있다.

그는 차이에 관하여(De Differentiis)라는 저술을 남긴다. 이 저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한 신에 개념을 비교하며 연구하고 있다. 그의 제자였던 스콜라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옹호하며, 비잔틴 황제 마울레 2세 팔라이오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에게 플라톤의 플라톤지지 입장은 결국에 이교적인 것이 된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플레톤은 마울레 등에게 황제가 국가, 법률, 경제 개혁 등의 문제와 관한 문제들이 플라톤의 국가(Republia)에 따라서 어떻게 정리되는가의 방식에 대한 글을 적었다. 또한 그는 조로아스터교와 플라톤의 이론을 정리하였으며, 그 자신의 절충적 다신론적 믿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저작들이 이교도라는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서유럽은 가톨릭교회와 무슬림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상당한 양의 그리스 철학의 자료와 해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자료들은 서유럽의 학자들은 전에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이들에게 비잔틴 제국 학자들의 유입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록 가톨릭교회의 사제는 아니지만, 플레톤은 이러한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플로랜스 인문학자 일부의 초대에 의해 그는 한시적으로 학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을 강의하게 된다. 플라톤 철학의 일부 저작은 그 당시 서유럽에서도 연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유럽에 플라톤 연구의 봄을 일으킨 인물은 플레톤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플로텐스 지방에 앞서 등장한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세우게 된다. 거기에서 플레톤의 이탈리아인 제자들은 꾸준히 가르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플레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아주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게 된다. 플로랜스 인문주의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바로 플레톤이 영감을 준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의 첫 선생이 된다. 피치노는 플레톤에게 큰 존경을 표하였으며, 그를 두 번 째 플라톤이라 불렀다. 베살리온 추기경은 플라톤의 영혼이 플레톤의 몸을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많은 면에서 플레톤은 철학적으로 피치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플로랜스에 있는 동안 플레톤은 그의 강의를 요약 정리한다. 여기에서 등장하게 된 저작이 바로 차이에 관하여(De Differentiis)이다. 이 저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한 신에 개념을 비교하며 연구하고 있다. 그의 제자였던 스콜라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옹호하며, 비잔틴 황제 마울레 2세 팔라이오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에게 플레톤의 플라톤 지지 입장은 결국에 이교적인 것이 된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플레톤은 마울레 등에게 황제가 국가, 법률, 경제 개혁 등의 문제와 관한 문제들이 플라톤의 국가(Republia)에 따라서 어떻게 정리되는가의 방식에 대한 글을 적었다. 또한 그는 조로아스터교와 플라톤의 이론을 정리하였으며, 그 자신의 절충적 다신론적 믿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저작들이 이교도라는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이 논쟁, 즉 플레톤과 한때 제자였던 스콜라리우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은 이후 르네상스 철학자들에 의하여 지속된다.

플레톤은 펠로폰네스(Peloponnese)로 돌아와서 학교를 세운다. 거기에서 그는 일신론에 맞서는 대안으로 다신론을 가르쳤다. 플레톤은 1452년 혹은 1454년 미스트라에서 사망하게 된다. 몬파사니(J. Monfasani)에 의하면 1466년 그의 사후 그의 이탈리아 제자 가운데 일부가 그의 유골을 훔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템피오 마라케스티아노(Tempio Malatestiano)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스승이란 말과 함께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차이에 관하여를 좀 더 알아보자. 이 저서에서 플레톤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신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비교 분석한다. 플레톤은 플라톤이 모든 종류의 가지적이며 분리된 실체 그리고 우주 전체의 창조주이며, 그러한 권능을 가진 존재로 확신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신을 오직 우주의 능동적 힘에 제한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플라톤의 신은 모든 실존의 목적인이라고 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운동과 변화의 목적인일 뿐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생각에 대한 반론에 대하여 응답하며, 플레톤은 플라톤의 신이 그리스도교의 신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보다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