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카우의 베네딕트 헷세(1389-1456)
그는 15세기 초반 크라카우의 뷔리당주의 학파에 매우 의미 있는 철학자였다. 심리철학에서 그가 적은 ꡔ영혼론의 질문들ꡕ(Quaestiones in Aristotelis libros de anima)은 당시 크라카우의 심리학에서 영향력 있는 고전이 되었고, 그 당시 많은 문헌에서 ‘베네딕토 헷세의 정신에서’(ad mentem benedicti hesse)라는 말이 발견되어진다. 그리고 1421년 자연학에 있어서도 그는 ꡔ자연학에 관한 질문들ꡕ(Quaestiones super octo libros physicorum aristotelis)을 적었다. 이곳에선 수학에 관한 이론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는 논리학과 자연철학에서 뚜렷하게 뷔리당의 영향을 받았다. 1420년 “구논리학”에 관한 주해를 저술하였으며, 이는 당시 크라카우 출신의 논리학 저서 가운데 가장 위대한 논리학적 저작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학문론과 방법론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그의 방법론적 입장은 그의 모든 철학적 저작에서 드러난다. 그는 논리학에선 논리학의 대상을 기호로서 기호를 위한 기호라고 하며, 사고된 존재자의 기호라고 하였다. 또 이 기호는 자의 적으로 이해에 의하여 산출되지 못하며, 영혼 외부의 사물 가운데 그 실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대상에 관한 연구는 매우 흥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천체론ꡕ 주해에서 양적 존재자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으며, 천체물질에 관한 논의를 다루었다. 또한 자연학에선 뷔리당의 영향 가운데 임페투스(Impetus)를 주장하였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헷세의 논의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15세기 크라카우의 자연학적 성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역사적 사례의 하나를 들어보자. 근대 자연학의 선구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세기 말 1491-1495년 사이 크라카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마이어(A.Maier)와 무디(E.Moody) 같은 이들에 의하여 근대 자연학이 중세 후기 14세기 뷔리당과 같은 이들에 의하여 영향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면 16세기의 갈릴레이와 같은 이들에 14세기 뷔리당의 논의가 넘어가기 위해선 15세기의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즉 이 15세기는 중세의 지적 자산을 16세기에 넘겨진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15세기의 가교 가운데 우리가 논하는 있는 크라카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헷세가 있다. 헷세는 이미 앞서 말한바와 같이 뷔리당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수용한 뷔리당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론도리우스(Londorius)의 중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실상 헷세는 그의 문헌의 15%를 론도리우스의 것에서 빌려왔다. 또한 그 가운데 개념들을 정의하였다. 그렇다고 헷세가 그의 것이나 뷔리당에게만 매여있던 것은 아니며, 당시 크라카우의 자연철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논의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헷세는 누구보다 뷔리당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뷔리당과 같이 임페투스를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자유낙하의 경우 낙하하는 물체는 임페투스에 의하여 가속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의 자연적 위치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세는 임페투스를 주장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장소에 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에게 장소는 부동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었다. 장소는 ‘관찰’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실체이며, 주변의 의미에서 우유이다. 그에게 물체와 합성된 운동은 장소의 본성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뷔리당과 같이 장소는 동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소에 관한 사유는 세계의 중심에 관한 근대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계의 중심에 관한 사유와 임페투스라는 것에 관한 사유는 16세기 자연학으로 넘어간다.
자연학의 영역에 포함되는 문제로 심리철학은 크라카우에서 역시나 뷔리당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 뷔리첸의 파울과 같은 이들은 15세기 초에 이미 『영혼론의 주해』를 작성했으며, 이는 한편으로 토마스, 알베르투스, 로마의 에지디우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뷔리당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심리철학의 문제에서 모든 것이 뷔리당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헷세는 ꡔ영혼론 주해ꡕ를 남겼다. 그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합성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형상, 즉 실체적 형상은 영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형상은 질료와 함께 그자체로 묶이며, 이로 인하여 실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섯 가지 형상을 열거한다. 이는 요소의 형상(forma elementi), 복합의 형상(forma commixti), 식물혼(anima vegetativa), 감각혼(anima sensitiva), 이성혼(anima rationis)이다. 그 가운데 처음의 4가지 형상은 질료의 등급에 의하여 제어되는 형상이며, 오직 이성혼만이 질료의 압박에서 덧어나 넘어서 있다. 그리고 이는 순수하게 비-질료적이다. 여기에서 만일 중세철학사의 중요한 문제를 알고 있는 이라면, 지성단일성과 관련된 이중진리설의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에 관해서 헷세는 나름의 해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차후에 다루어보자.
당시 심리, 즉 인간 정신에 관한 것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도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지와 관련된 심리결정론에 관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헷세는 주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주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 의지는 자유의 근거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시 심리, 즉 인간 정신에 관한 것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도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지와 관련된 심리결정론에 관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헷세는 주지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주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 의지는 자유의 근거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쉬운 것이 아니다.
지성 혹은 인간 영혼과 관련되어 인식의 문제에서도 영육의 관계에 관한 것을 알 수 있다. 헷세에 의하면 영혼은 인식에 있어서 오직 영혼 자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인간 전체로 가능한 것이다. 즉 영혼과 육체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영혼은 육체의 조력 없이 스스로 인식을 이루지는 못한다. 즉 육체는 인식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이 보편개념을 형성할 때 인식은 감각기억과 사고능력에 의존한다. 외부감각과 사고능력은 감각기관과 뇌(腦)의 조력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인간영혼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사고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인식형상을 수용할 때는 수동적이지만, 인식을 형성할 때는 능동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 즉 인식과정은 인간 영혼과 육체의 조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죽음 이후 인간은 육체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한다고 인식한다고 한다.
이러한 헷세의 자연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필자는 다음의 것을 주목하려 한다. 우선 헷세가 뷔리당의 영향을 받으며,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의에 근간을 두면서 이를 넘어서려 했다. 예를 들어 수학에 관한 논의에서 그리고 자연학에서 임페투스와 장소에 관한 논의에서 그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넘어갔다. 특히나 근대 역학의 길로 넘어갔다. 하지만 헷세는 한편 고민하는 철학자이며, 학자였다. 예를 들어 그는 시간의 문제에서도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근대적 사유를 준비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그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새로운 길(via moderna)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길은 뷔리당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대칠 적음/토마스철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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