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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보기/중세철학자열전

15세기 크라카우 대학의 철학자들과 학파

 

15세기 크라카우의 철학자들

-중세 철학의 마지막 전람회장


15세기 전 후기 스콜라 철학에서 프라그(Prag) 대학은 광대한 철학적 논의가 집결하던 곳이다. 그곳은 당시 학문계의 선두에 선 파리와 옥스퍼드의 가르침과 함께 그 자신의 것을 가르치고 논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유산을 크라카우로 넘어간다. 그렇게 넘어간 지적 유산의 대표적 상품이 바로 ‘뷔리당주의’(Buridanismus)이다. 이러한 유입은 1415년을 기점으로 수동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수동적 유입은 크라카우에서 철학적이고 학문적 운동을 일어나게 하였다. 논리학에서 뷔리당의 “구논리학” 주해들과 ꡔ소크라테스적 논박ꡕ 그리고 ꡔ분석론 전서ꡕ의 주해 이어서 페브루스 히스파누스의 ꡔ논리학 개요ꡕ(Summulae logicale)에 관한 뷔리당의 주해가 알려졌다. 논리학 뿐 아니라, 자연철학에서도 뷔리당의 영향은 컸다. 심리학에서도 뷔리당은 린도레스의 로렌츠(Lorenz von Lindores)와 함께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기상학의 연구에서도 니콜라스 오렘(Nikolas Oresme)과 작센의 알베르투스 그리고 아이리의 페트루스가 사용되었고, 윤리학의 연구에서는 인겐의 마르실리우스와 함께 뷔리당이 논의되었다. 예를 들어, 가슬로우의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von Gaslou,1362-1407)는 뷔리당과 작센의 알베르투스를 자신의 윤리학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또한 크라카우 대학의 첫 윤리학 교수들, 글라가우의 니콜라우스(Nikolaus von Glagau), 루카스(Lukas von Kosmin Wielki), 니콜라우스 바드비센(Nikolaus Badwissen von Aowy Sacz)와 같은 이들은 뷔리당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수동적 유입 이후 곧 크라카우 자신의 고유한 성과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 베지스(Andreas Wezys,1377-1430)는 자연철학에서 자연학의 대상은 움직이는 존재자(ens mobilis)라고 하면서 저서를 남겼고, 자연철학의 교재를 저술했다. 코코르진의 안드레아스(Andreas von Kokorzyn,1379-1435)는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해를 남겼다. 논리학의 영역에서 당시 크라카우에선 코츠로우의 니콜라스(Nikolas von Kozlow,1378-1444)가 의미 있는 저서를 남겼다. 그렇다고 크라카우에는 뷔리당의 추종자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1477년 이후 글로가우의 요하네스(Johannes von Glogau)와 고스티닌의 야곱(Jakob von Gostynin)과 같은 알베르투스주의자가 있었다. 그 외에도 비스트르치코프의 미카엘(Michael von Biestrzykow)와 같은 스코투스주의자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뷔리당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크라카우의 헷세(Hesse von Krakau, 1389-1456)이다. 그러면 15세기 크라카우에서 일어난 철학을 더욱 더 자세히 정리하고, 이어서 크라카우의 헷세의 위상을 살피기로 한다. 

후기 중세 철학의 온갖 논의가 서로 만나서 논의되고 있던 크라카우에선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개념론(terminismus)과 실재론이다. 이는 철학의 많은 부분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첫째 논리학이다. 첫 논리학적 성과는 1402년 이후 등장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처음으로 두드러진 성과는 헷세에 의하여 일어난 것으로 1415년 이후 이루어졌다. 이는 뷔리당학파의 개념론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리학의 대상은 의미론적으로 파악되어진다. 헷세는 논리학의 대상은 심적 존재자의 기호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논리학의 가르침은 학문적 사고의 수단과 관련된다고 한다. 그리고 15세기의 막바지가 되면, 개념론이 아닌 실재론의 도입 가운데 논리학의 의미 있는 논의가 글로가우의 요한네스와 미카엘(Michael von Brestrzykow) 그리고 미카엘 팔코이어(Michael Falkeuer von Breslau)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수사학이다. 당시 수사학은 두 가지 흐름을 가진다. 하나는 문학적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이다. 전자의 경우는 말함의 기술과 관련되어 발전되었고, 후자는 윤리학과 경제학 그리고 정치학적 논의와 관련되어 다루어졌다.

셋째 문법학이다. 크라카우 대학에선 오랜 시간 문법학이 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못 했다. 그리고 1460년 이후 처음으로 흥미 있는 논의가 등장했다. 개념론에 근거하여 ‘의미의 양상’(modus significandi)에 관한 논의와 함께 문법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은 의미의 양상을 존재의 양상(modus essendi) 없이 심적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존재의 양상에 기초하는 사변문법도 15세기 이후 등장한다. 그리고 스코투스적인 극단적 실재론의 근거에서 의미의 양상에 관한 논의가 크라카우에 16세기 초 요한네스 스톱니카(Johannes von Stobnica_에 의하여 저술되어진다.

넷째는 인식론이다. 15세기 인식의 자발적 학문은 없었다. 당시 인식의 문제는 진리의 확인의 올바른 수단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크라카우의 개념론자’들은 주체적 확신에 의하여 이를 근거한다. 이러한 이들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시에나의 페터(Peter von Sienno), 뷔르첸의 파울(Paul von Wurzen), 스룹차의 요한네스(Johannes von Slupcza), 라치보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von Raciborsko)와 같은 이들이다. 반면 실재론자들은 객체적 확실성에 근거한다. 이와 같은 이로는 요한네스 오리엔트(Johannes Orient), 글로가우의 요한네스, 요한네스 좀머펠트(Johannes Sommerfeld), 지그문트(Sigismund von Przewodow)과 같은 이들이다. 이 둘의 의견 차이는 전체 철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인식론에서 이 의견의 차이는 진리의 신뢰도에 관한 것에서 일어난다. 개념론자들은 진리의 주체적 개념화에 의해 논의를 전개하며, 근본적으로 진리의 기준은 본성적인 인간의 사고행위 혹은 이해의 판단에 있다고 본다. 이는 옥캄의 후기 사상에서 사고-이론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권위에 대한 도전을 낳았다. 반면 크라카우의 실재론자들은 객체적 진리를 옹호한다. 그러면서 주체 외부, 즉 영혼의 외부에 실재하는 존재자와의 일치에 의한 인식이란 요소를 고수한다. 하지만 뷔리당의 세례를 받은 크라카우의 개념론자들은 자신들의 비판주의적 견해를 고수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이어진 절대적 인식의 개념을 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개연적 인식을 인식론에 중심에 놓게 한다. 그리고 이는 개연주의의 인식론 가운데 펴지게 되며, 이로 인하여 개연적인 것이 인식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다섯째는 존재철학이다. 여기에서 크라카우에 흐르는 두 흐름이 다시 명확하게 구별된다. 하나는 개념론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론자들이다. 개념론은 1418-1460년 사이 일어난 뷔리당의 영향에서 일어난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주해의 주인공들인 시에나의 페터, 뷔르첸의 파울, 스룹차의 요한네스, 라치보르스코의 요한네스에 의하여 중흥된다. 이들에게 존재철학의 대상은 존재자(ens)라는 개념이다. 이와 함께 인간은 개별존재자를 인식한다고 논의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시에나의 페터의 관점에서 범주는 단지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형이상학은 그 내용을 논의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존재와 본질의 구별에 있어서도 그는 이는 단지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질료적 존재자는 형상과 질료의 합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합성된 존재자는 형상보다 더 완전하다. 그리고 단지 신만이 유일하게 단순한 존재라고 한다. 그는 개념론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範疇)를 실재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범주 가운데 하나인 관계는 그 근거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개념론자들의 논의 이외에도 1426년 크라카우의 실재론자인 요한네스 오린엔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주해하였다. 그는 보니니에 근거하여 철학을 존재론을 전개하며, 범주를 실재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실재론을 펼쳤다. 그리고 글로가우의 요한네스는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주의의 알베르투스주의에 근거하여 모든 범주는 실재성을 가지며, 그렇기에 관계도 그 근거와 구분된다고 보았다. 즉 관계를 실재성을 가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형상을 합성된 존재보다 더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알베르투스주의에 근거한 실재론을 전개한 인물은 고스티닌의 야곱이 있다. 그 외에도 비스트르치코프의 미카엘과 그의 제자 스콥니카의 요한네스는 스코투스주의에 기반하여 존재론을 구사하였다. 그들은 스코투스의 제자이며, 초기 스코투스주의자인 안토니우스 안드레안스에 도움으로 존재론을 구사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존자자 가운데 다수의 실체적 형상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본질적 질서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여섯째는 자연철학이다. 헷세와 안드레아스 베지스 그리고 그의 학파는 15세기 변화와 운동이란 관점에서 존재자를 다룬다. 그 외에도 천체의 질료성과 합성체에 관한 논의도 시에나의 페터와 스룹차의 요한네스 그리고 케티의 요한네스(Johannes von Kety)와 헷세에 의하여 논의되었다. 또한 1420년에는 땅의 운동에 관한 문제가 크라카우 대학에서 토론되어졌다. 당시 크라카우 대학의 자연철학에선 알베르투스주의, 에지디우스주의, 베르소르주의, 스코투스주의의 영향이 논의되고 있었다. 물론 뷔리당의 영향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헷세는 그의 영향에서 자연학에서 임페투스(Impetus)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일곱째는 인간학이다. 인간학에서 초기에는 뷔리당의 영향을 그리고 후기에는 린도레스의 로렌츠의 영향 가운데 있었다. 1417년 뷔르첸의 파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ꡔ영혼론ꡕ에 관한 크라카우 지방의 첫 주해를 작성했다. 1430년 이전에는 린도레스의 로렌츠의 해법에 따른 헷세에 의한 주해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토마스와 알베르투스 그리고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권위에 신학의 문제에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심리철학 혹은 심리학은 이러한 범위를 넘어 더욱 더 다양했다. 카스치안의 안드레아스(Andreas von Kascian)은 15세기 중반 크라카우에 아베로에스의 심리철학을 도입한다. 그 외에도 미카엘(Micheal von Brestrzykow)에 의하여 1490년 스코투스적 견해가 심리철학에 유입되었다. 또한 1468년엔 마티아스(Matthias von Szydlow)와 같은 이에 의하여 토마스의 사유에 충실한 가운데 심리철학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 몇몇 크라카우의 철학자들

1. 자스로 안의 바르톨로메우스(1362-1407)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von Jaslo an)는 뷔리당와 작센의 알베르투스의 영향 가운데 윤리학을 작업하였다. 그리고 매우 두드러진 윤리학 교수로 있었다.

2. 안드레아스 베지크(1377-1430)

안드레아스 베지크(Andreas Wezyk)는 자연학적 성과를 내어놓은 크라카우 대학의 철학자이다. 그는 자연학의 대상을 움직이는 존재자(ens mobile)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진공은 자연적으론 불가능하며, 오직 신의 권능에 의하여 가능 할 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존재론에선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실체와 우유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았다.

3. 코즈로우의 니콜라우스(1378-1444)

니콜라우스(Nikolaus von Kozlow)는 크라카우 대학의 논리학자이다. 그는 논리학 저서들을 주해하였다.

4. 코코르진의 안드레아스(1379-1435)

코코르진의 안드레아스(Andreas von Kokorzy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주해한 인물이다. 그는 신의 개념을 실체의 범주와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5. 뷔르첸의 파울(1380-1430)

파울(Paul von Wurze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을 주해하였다. 그는 윤리학적 논의에서 인간과 행복을 다룬다. 그러면서 인간 행복의 본질은 자유와 관련된다고 진술한다. 그러면서 인간 생활의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최상의 것이 국가 사회 가운데의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윤리학은 국가 사회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6. 시에나의 페터(1392-1460)

페터(Peter von Sienno)는 『형이상학』을 주해한 크라카우 대학의 철학자이다. 그는 논리적 측면에서 형이상학은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하나임의 측면에서 10개의 범주와 관련된 명사를 다룬다고 본다. 즉 범주는 단지 기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관계는 그 자체로 근거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제일 질료는 어떤 물체적 형상을 가진다고 보며, 질료적 존재자에 있어서 본질과 존재는 단지 심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일 뿐,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당시 많은 크라카우 대학의 뷔리당주의적 흐름에 의하여 뷔리당의 영향을 받으며 형이상학을 작업하였다. 그러니 그는 실재론이 아니라, 개념론에 근거하여 존재론의 대상은 존재자이며, 이는 구체적 개별자로 이해하였다.

 

 

유대칠 적음/토마스철학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