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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옥캄

월리엄 옥캄의 "명제론 주해" 서론 번역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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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옥캄의 『명제론 주해』 서론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이 번역은 토마스 철학 학교 옥캄과 중세 후기 철학 원서 강독을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번역에 사용된 라틴어 본은 Ockham, Expositio in librum perihermenias aristotelis (OP.2)이다.


§ 3 〔영혼의 받아드림 혹은 개념은 무엇인가.〕

 둘째, 우리는 받아드림(passio)이 무엇인지를 살펴야한다.1) 받아드림은 여기에서 『범주론』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짐이 말 되어져야만 한다. 또한 어떻게 해석되어지는지는 그곳에서 이야기되어졌다.2) 그러나 지금 논의되는 것 가운데 ‘영혼의 받아드림’은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어떤 것으로 해석되어지며, 이것은 발화적인 것 혹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 의하면 영혼의 받아드림이라 불리고, 어떤 다른 이에 의하면 개념이라고 불린다. 이 받아드림은 어떤 것인가, 즉 영혼 외부의 어떤 실재인가 혹은 영혼 가운데 실재적인 어떤 것인가 혹은 영혼 가운데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만들어진 존재인가. 이러한 것은 논리학자가 고려 할 몫이 아니라, 형이상학자가 고려할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차이에 관하여 주장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견해를 서술할 것을 원한다.


§ 4 〔영혼의 성질인 받아드림은 사고의 작용으로부터 분리되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의 견해는, 즉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영혼의 받아드림은 여기에서 영혼의 성질이며, 이는 사고의 작용으로부터 실재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고, 대상과 같이 사고의 작용이 종결되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성질은 사고의 작용이 존재할 때만이 존재를 가진다. 그리고 이 성질은 외부 실재의 참된 유사성이며, 이로 인하여 외부 실재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그 자체를 지칭한다.3) 예를 들어, 발화명사는 규약에 의한 실재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어려움을 가진다. 하나, 철학자는 오직 영혼 가운데 능력과 습성과 받아드림과 혹은 작용이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윤리학』 2권에서와 같이 말이다.4) 그러므로 이 견해에 의하여 명백하듯이 그러한 성질은 습성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 작용도 아닐 때, 그것은 정신의 참된 성질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유사하게, 이 성질은 지성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의 받아드림은 발화에 일치하기 위하여 가정되어진다. 즉 발화는 발음되어질 때 그리고 그 개념이 의미되어질 때,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동물’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가 이 발화를 듣고 알 때, 그는 어떤 그러한 성질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공통된 것 가운데 동물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질은 공통된 것 가운데 동물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가정되어진다면, 이 성질은 동물과 구분된다. 하나의 영적5) 우유가 영혼 가운데 있을 때, 마치 흼 혹은 색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색은 물체 가운데 물체적 우유이고, 정신적 우유는 물체적 우유보다 동물에 더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 5〔불합리한 견해: 받아드림은 실재의 종이다.〕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영혼의 받아드림이 주부와 술부인 어떤 것이라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이로부터 영혼 가운데 명제는 발화의 명제에 상응하는 정신의 명제가 구성되어질 수 있다.6) 이 받아드림은 자연적으로 실재를 표상하는 실재의 종이며, 자연적으로 명제 가운데 실재를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나에게 앞선 것 보다 더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필요 이상의 것임으로 그러한 종은 가정되어지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곳에서 분명해졌듯이 말이다.7) 그리고 앞선 견해에 반대되어 말해졌듯이 철학자에 의하면 영혼 가운데는 습성 혹은 작용이 아니면, 영혼으로부터 실재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그리고 영혼이 어떤 것을 사고하지 않을 때도 그러한 받아드림은 영혼 가운데 남아있다. 그리고 어떤 것을 현실적으로 사고할 때 영혼 가운데 명제들이 있게 된다.

 

 

- 번역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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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ckham, Scriptum in I sent., d.2, q.8; G.Gal, "Qualteri de Chatton et Quillemi de Ockham controversia de natura conceptus universalis" Franciscan Studies 27 (1967), 191-212.


2) Ockham, Expositio in librum preadicamentorum aristotelis, 14, §7.


3) Duns Scotus, Ordinatio 1, d.27, qq.1-3, n.48 (ed. Vaticana 6, p.84). "사고 가운데는 오직 현실적 사고작용 혹은 이 사고작용을 종결하는 대상 혹은 다른 이에 의하여 기억 가운데 상(species)으로부터 사고 가운데 생성되는, 그리고 사고의 작용을 앞서는 상, 혹은 다른 이에 의하면 사고의 작용을 통하여 형성되는 어떤 것 혹은 다섯째 다른 이에 의하여 받아드림과 같은 사고작용 그 자체는 즉 그 능동과 같이 그 자체에 의하여 야기되어지며, 이 다섯 가지 견해에 의하여 심적 언어에 관한 다섯 견해가 있을 수 있다."


4) Aristoteles, Nichomachean Ethics 2,4 (1105b 19-21). 모에르베케의 번역에 따른 라틴어 역에 준하여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영혼 가운데는 일어난 것은 세 가지로 있다. 즉 받아드림(passiones)과 능력(potentiae)과 습성(habitus)이며, 이 가운데 어떤 것은 물론 덕(virtus)이다.”


5) 여기에서 ‘영적’이라고 우선 번역한 것은 spirituale에 대한 역어이다. 단지 anima를 영혼으로 그리고 mens를 정신으로 변역하며 구분하기 위한 역어이다.


6) Cf. Roger Marston, Quaestiones disputatae de emanatione aeterna, q.6 (Bibliotheca franciscana scholastica medii aedii, vol.7; Quaracchi,1932), p.118. "그러므로 감각적 대상이 눈 가운데 그 상이 생성되며, 그것을 통하여 이 상이 봄을 위한 나의 근거이듯이, 또한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의 상으로부터 나는 어떤 외부의 것을 본다. 만일 내가 현실적으로 그 대상을 다시 청하면 기억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어떤 상이 사고의 정점에서 생성되어진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현실적으로 안다..."


7) Ockham, In II sent., qq.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