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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옥캄

존재자 개념의 일의성에 관하여

존재자 개념의 일의성에 관하여


유 대칠 옮김

(토마스 철학 학교)


 이 번역은 De univocatione conceptus entis의 한글 번역이다. 이 저작은 당시 화두로 떠돌던 문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단편들 가운데 한 편으로 그 집필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명제에 관한 이해와 이에 근거가 되는 ens 개념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다. 이 번역에 사용된 판본은 Opera Theologica 8, 233-237이다. 이곳의 번역은 초벌 번역으로 아직 타인들이 사용하기는 다소 불완전하지만, 곧 업데이트 버전을 올릴 계획이다.



 『명제론』 1에서와 같이1) 사고 행위(actus intelligendi)가 개념이라고 가정하는 이론에 의하면 존재자(ens)가 본질적으로(in quid) 그리고 논의의 우선적인 방식에서 그 자체로 그리고 일의적으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영혼 외부의 존재자들에 대한 것과 같이 말이다. 동일한 논증에 의하여 하나(unum)와 어떤 것(aliud)이 논증되어진다. 오캄의 철학 가운데 존재의 일의성을 추구해보자.2) 이성적 존재자(entia rationis)들에 관해서도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 견해에 의하면 이성적 존재는 순수하게 영혼 가운데 주체적인 존재(esse subiectum)를 가지며,3) 어떤 대상적 존재도 가지지 않는다고 알아듣기 때문이다. 오직 영혼 가운데 존재를 가지기에 이성적 존재가로 불린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 존재자는 비록 어떤 것에 대하여 인칭적으로 지칭되어질 때, 본질적으로 그리고 일의적으로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지 못함에도, 단순하게 그리고 질료적으로 지칭되어질 때, 그 대상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서술되어진다는 것은 받아드려진다. 예를 들어, “인간은 존재자이다”(homo est ens)라는 이 명제는 개념 가운데 본질적으로 그리고 일의적인 술어이며, [그러나 “참된 것은 존재자이다”(verum est ens)라거나 “선한 것은 존재자이다”(bonum est ens)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성적인 것은 존재자이다”도 그러하다. 마치 그 주어가 일칭적으로 지칭하듯이 말이다. 참된 것, 선한 것, 이성적인 것은 내포 개념이며, 주격 가운데 어떤 것을 의미하며, 사격 가운데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칭적으로 지칭되어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주격 가운데 자기 자신의 모든 것 의미 대상을 의미하며, 사격 가운데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어떤 절대적 개념도 순수하게 본질 가운데 그리고 일의적으로도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확정에 대하여 보고서(Reportatio) 가운데 그의 경우를 보자. 이는 더 큰 불일치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술어는 본질 가운데 “인간은 단어이다”, “선한 것은 단어이다”, “선한 것은 단어이다”이다. 마치 질료적으로 지칭되어지는 경우에서와 같이 말이다. 마치 인칭적으로 지칭되어지는 경우엔 본질 가운데 술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단어가 아니며, 선한 돌은 단어가 아니다”이기에 거짓 술어이다.

 두 번째로 지금 일의적 개념인 “존재자”라는 이 지향은 그 자신을 지칭하며, 본질적으로 그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함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것(aliud)가 그렇다. 이는 그것에 대하녀 일의적으로 서술되어진다. 왜냐하면 “모든 개념들은 존재자이다”와 같은 이러한 명제 가운데 개념은 모든 개념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서 존재자인 그 개념을 지칭하고, 그 자체로 일의적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은 동의되어진다. 예를 들어, “모든 단어들은 주어이다”와 같은 이러한 명제에서 단어는 모든 단어를 지칭하며, 결과적으로 ‘단어’라는 그 단어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 자체로 지칭하며, 그 자체를 의미하고, 그 자체에 대하여 일의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위의 것이 하위의 것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은 동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항상 상위의 것이 하위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에 대하여 동일한 것이 서술되어질 때, 혹은 개념 가운데 혹은 발화되어 말 된 것 가운데 그러할 때, 상위의 것이 하위의 것에 대하여 서술되진 않는다. 이러한 것이 일의적 술어이다.

 세 번째로 철학자가 『형이상학』114)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그리고 주해자가 마지막 주해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존재자는 영혼 외부의 존재자와 영혼 내부의 존재자로 구분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해자에 의하면 ‘영혼 가운데 존재자’에 의하여 참된 혹은 거짓된 명제 그리고 긍정 혹은 부정 명제가 사고되어진다. ‘영혼 외부의 존재’에 의하여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모든 복합적이지 않은 것이 사고된다.  명제의 주어 혹은 술어건 아니건 말이다.5) 영혼 가운데 그러한 존재자를 철학자는 그의 고려로부터 배제한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그러한 받아드림이 의미하는 대상에 의하면 명제에 대하여 결정하는 것은 철학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이와 같은 것은 논리학에 속하는 다른 받아드림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제는 그러한 술어 가운데 고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 자체로 어떤 하나가 아닌 사고의 행위가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 혹은 개념자과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명제는 성질이다”와 같은 이것은 논의에 의하면 거짓이다. 마치 "백성 혹은 군대가 실체이다”가 거짓 함축에 의한 것이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성질은 명제이고 어떤 실체는 백성이라는 것이 함축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들 명제의 역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주장된다. 그러므로 명제는 고유하게 어떤 술어 가운데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종이나 개별자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서와 같이 영혼 외부 존재자에 의한 구분은 10 범주에 의한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임의의 어떤 개념은 성질의 범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마치 종이나 개별자와 같이 말이다.

 네 번째로 거짓은 두 가지로 이해된다. 즉 복합적인 거짓과 복합적인 거짓이 그것이다. 복합적 거짓은 거짓 명제와 같다. 비복합적 거짓, 그것에 의하여 철학자는 『형이상학』 5권에서 개념에 대하여 진술한 견해에 따라 이야기하였다.7) 이것은 사고 행위이며, 이것에 의하여 어떤 방식으로 하나로 일어날 수 없는 여럿을 우리는 이해한다. 예를 들어, 마치 하나의 사고 행위에 의하여 산과 황금이 <동시에>에 이해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된 것은 거짓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만일 명제의 주어와 술어8)가 긍정적으로 일어났다면, 거짓된 명제이고 불가능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황금산은 존재자이다”와 같은 명제는 거짓된 함축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산은 산과 황금에 의하여 복합된 어떤 복합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형이상학』 7권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러한 거짓된 것 가운데 참된 것이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