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캄의 "임의토론집" 3,6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동물의 기관적 부분의 형상, 즉 살과 뼈의 형상은 종적으로 구분되어지는가?
/225/긍정:그것들은 종에서 구분되어지는 우유이다. 그러므로 그것들 자체는 종적으로 구분되어진다.
반대:하나의 실체적 형상은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하나 이상의 형상은 가정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필요 없이 다수가 가정되지는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하여 나는 대답이 우유와 작용에 대한 구분과 동일성에 의하여 대답이 해결될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 명백하듯이 그 자체로 알려지는 '명제' 혹은 '경험'에 의하여 알려지는 것으로 인하여 충분하게 해결되어지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유를 제외하면 실체에 관한 어떠한 경험도 가지지 않는다.
이 가정은 상이한 종의 실체가 동일한 종의 우유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종의 우유에 대한 주체라는 것을 종종 보게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해결된다. 첫번째 예에 의하면 불과 물이 종에서 다르고, 상이한 종 가운데 우유를 가진다. 두번째 예에 의하면 불과 공기는 종에서 다르고 동일한 종의 우유를 가진다. 예를 들어 열이 그러하다. 유사하게 인간과 천사는 종에서 다르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작용과 의지작용은 동일한 종 가운데 있다./226/
둘째로 우리는 상이한 종 가운데 실체는 동일한 종 가운데 우유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의 우유에 대한 작용원리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동일한 예로 부터 명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뜨거운 물이 그 자신의 본성을 떠나면 차가운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감각에서 명백하다. 그리고 이 차가움은 물의 실체적 형상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야기될 수 없다. 동일한 것에 의하여, 그 대상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작용과 동일한 대상에 의하면 천사의 의지작용, 이는 동일한 종의 작용이며, 이는 그들의 의지에 의하여 야기되어지고, 이는 종 가운데 구별된다.
세번째로 우리는 동일한 종의 실체는 동일한 종의 우유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의 우유의 주체라는 것을 안다. 첫번째의 예에 의하면, 사과는 동일한 종 가운데 있고, 하나는 본성적으로 달고, 다른 것은 쓰다. 유사한 방식에서 두 인간의 경우에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흑인이다. 또한 한 명은 용감하고 다른 한 명은 소심하다. 두번째의 예에 의하면, 동일한 종의 두 사과는 어느때 그 둘은 달고 어느때 그 둘은 쓰다.
네번째로 우리는 동일한 종의 실체가 어느때는 다른 종의 우유의 작용인이고 어느때는 동일한 종의 우유라는 것을 안다. 첫번째것의 예에 의하면, 두 인간은 동일한 본성 가운데 있지만, 한 인간에 의하여 의지되어지는 동일한 대상은 다른 이에 의하여 반대되는 것이 의지되어지는 것이다. 의지함과 의지함에 반대하는 것은 논의 가운데 의지에 의하여 야기되어진다. 두번째 예에 의하면, 만일 두 인간의 의지는 동일한 대상을 사랑한다면, 그러면 그 경우에 동일한 종의 우유는 양자에 의하여 야기되어진다.
유사하게 분명하게 동일한 종의 실체가 종에서 구분되는 작용의 원인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되어지는 것으로 부터 명백하다. 어느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이것을 행하며, 어느때는 다른 우유의 중재에 의하여 행한다. 유사하게 상이한 종의 실체는 상이한 종에 대한 작용과 동일한 종에 대한 작용 양자의 원리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우유의 중재없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신 직접적으로 그러하다. 마치 위의 예에서 명백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유를 통하여 실체의 경험을 가질 수 있음으로 그리고 우유가 종 가운데 구분되거나 종 가운데 동일한 것이 충분하게 해결되어지지 않으므로 어떤 방식에서도 우리는 이 논의에서 형상들 가운데 충분하게 종적으로 구분되거나 종적으로 동일한 양자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살과 뼈의 형상이 종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우유의 상이함으로 인하여 이를 주장한다. 다른 방식에서 이러한 형상이 동일한 종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형상들로 특징되는 모든 구분이 우유의 구분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실체 가운데 종의 구분을 나타내지 않는 구분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다. 나는 단순하게 이를 알지 못한다.
이에 반대하여, 철학자의 "변증론" 7에 의하면 동일한 종의 결과를 가지지 않는 원리는 상이한 종 가운데 있다.
더욱이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그러한 점에서 다른 실체들 사이의 종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모든 방식에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번째 반론에 의하면, 나는 앞서 말된 것은 결과의 직접적인 원리에 대하여 참인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간접적인 원인에 대한 것은 아니다. 논의 가운데 형상이 동일한 종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살과 뼈의 우유가 직접적으로 상이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단지 간접적으로 상이한 결과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 직접적으로 야기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고, 다른 이는 능력은 모든 결과를 여기한다고 주장한다./228/
두번째 반론에 의하면, 나는 우리가 증명적으로 어떤 실체 가운데 종의 구분이 있다는 것의 명백한 논증을 가지지 않는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알려졌듯이 그 자체로 알려지는 원리 혹은 경험에 근거한 그러한 논증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리고 논증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러한 것을 논증한다.
주된 논의에 답하여 위에서 말한 것으로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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