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캄의 "임의토론집" 5,8.
유대칠 번역과 간단풀이
(토마스철학학교)
발화명사의
모든
문법적
우유들은
심적명사에
종속되는가?
긍정:심적명사와
<이에
상응하는>
발화명사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기호로
정리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즉,
발화명사>에
대한
모든
우유들은
다른
것<즉,
심적명사>의
우유이다.
부정:성과
격변화는
발화명사의
우유이지만,
심적명사의
우유는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는
우선
첫번째
주제를
다루고,
이어서
나는
질문에
답을
시도할
것이다./509/
첫번째
논항에
의하면,
나는
발화과
문자명사는
명사,
동사,
대명사,
분사,
형용사,
접속사,
그리고
전치사를
포함하듯이
그렇게
심적명사(심적개념)도
명사,
동사,
형용사,
접속사,
그리고
분사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모든
참된
혹은
거짓된
발화적
표현에
상응하는
심적명제가
개념에
의하여
구성되어진다는
것에서
명백하다.
그러므로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시되어지는
발화명제의
부분이
의미와
표현의
요구에
의하여
구분되어지는
부분이듯이,
왜냐하면
그것은
동사와
명사에
의하여
말함의
다른
모든
부분에
의하여
표현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그렇게
발화된
것에
상응하는
심적명제의
부분도
그것들이
참되고
거짓된
명제로
구성되어지는
한에서
구분되어지듯이
그렇다.
두번째
논항에
의하면,
나는
발화명사와
동사의
우유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입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한면
일부는
공통된
우유들이고,
다른
것은
고유한
우유들이다.
따라서
나는
몇몇
논의를
제시한다.
첫째는
발화명사의
공통우유들이
심적명사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귀납적으로
해결되어진다.
왜냐하면,
첫째
공통우유들은
격이고,
둘째는
수이며,
셋째는
비교급이다.
"인간은
인간이다"와
"인간은
인간의이다"와
같은
발화명제는
오직
격에서
차이를
가지는
구별되는
술어를
가진다./510/
그로
인하여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인
차이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이다"와
같은
발화명제에
종속되는
심적명제는
단지
격에서
차이를
가지는
구분되는
술어를
가진다.
두번째
공통우유의
예를
보자.
"인간은
동물이다"와
"인간은
동물들이다"와
같은
발화명제는
수에서
차이를
가지는
구별되는
술어를
가진다.
그로
인하여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그렇게
상응하는
심적명제도
수에서
차이를
가지는
구별되는
술어를
가지며,
그것이
하나의
명제는
참이고
다른
명제는
거짓으로
만드는
차이이다.
세번째
공통우유의
예를
보자.
"인간은
하얀
것이다"와
"인간은
더
하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가장
하얀
것이다"와
같은
발화명제에서와
같이
오직
비교급에서만
차이를
가지는
구별되어지는
술어를
가지며,
그로
인하여
또
다른
것이
거짓인
동안
그것의
하나는
참이
가능하며,
그렇게
유비적으로
상응하는
심적명제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화명사의
성질은
심적명제에
종속하는가의
여부에
관한
문제이다.
둘째는
명사의
고유한
우유는
단지
발화명사에
속하고
심적명제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
우유는
성과
격변화이다.
이의
근거는
이들
우유는
다른
것과
같이
어떤
의미의
요구에
의하여
명사에
종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어떤
요구에
의하여
종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식의
목적과
말함의
문법성의
목적에
의하여
그렇다.
이것은
질문의
두
가지
우유들은
lapis과
petra과
같은
동의어적
명사에
적절한
것이란
것은
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성과
격변화
가운데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동의어적
명사에
종속되어지는
그러한
우유들의
다양성은
심적개념과
같은
자연기호에
부과되어지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511/
마치
동의어적
명사에
상응하는
개념의
다수성은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심적명제가
참이고
거짓인
것을
구하기
위하여,
성과
주어와
술어가
속하는
어형
변화를
구할
필요는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참으로
격,
수
그리고
주어와
술어의
비교급의
주의를
기울려야한다.
발화명제의
참과
거짓으로
인하여
주어와
주어의
고유한
우유에
주의를
기울려야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법성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homo est albus"와
같은
명제는
문법적이다.
"homo est alba"는
문법적이지
않다.
문법성의
결여는
성의
불일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homo est albus", "homo est alba"라는
발화명제는
서로
다른
술어를
가지만,
동일한
심적
술어가
그것
양자에
상응한다.
말함의
문법성을
가정하면,
주어
혹은
술어가
속하는
성과
격변화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adamas est lapis"가
참인
것
처럼,
그렇게
"adamas est petra"는
참이며,
그는
성과
격변화
가운데
차이를
가지며
서술되어진다.
말함과
같이
영혼
가운데도
상이한
술어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며,
말함
가운데
하나의
명제는
다른
것이
참이
아닌
한에서
참일
수
없다.
셋째는
동사의
공통된
우유가
심적동사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한
5가지
우유가
있다.
법,
태,
수,
시제,
인칭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유
가운데
차이를
가지는
상이한
술어들을
가지는
상이한
발화명제가
있다.
그
차이는
어느
때
하나의
참이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니기에
그렇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독서하고
있다"와
"소크라테스야
독서해라",
그것은
단지
법에서
차이를
가진다./512/
유사하게
"소크라테스는
사랑한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랑받는다"는
능동태와
수동태의
차이를
가진다.
유사하게
"너는
독서하고
있다"와
"당신들은
독서하고
있다"는
수에서
차이를
가지니다.
유사하게
"너는
독서하고
있다"와
"너는
독서했다"는
시제의
차이를
가진다.
유사하게
"너는
독서하고 있다"와
"나는
독서하고
있다"는
인칭의
차이를
가진다.
동일한
방식에서
발화명제에
상응함으로
같은
방식에서
그들의
우유
가운데
다른
상이한
술어를
가지는
상이한
심적표현이
있으며,
명제의
진리
혹은
거짓을
야기하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발화명제는
분명하게
그것에
상응하는
유사한
심적명제가
아닌
한에서
참이나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동사의
고유한
우유는
발화동사와
문자동사에
속하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발화명사와
문자명사에
대하여
이야기되어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질문
가운데
우유는
어형변화와
활용이다.
이유는
간혹
상이한
어형변화의
동사와
상이한
활용의
동사는
동의어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상응하는
정신
가운데
그러한
차이일
수
없다. 마치
동의어에
상응하는
정신
가운데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명사와
동사의
우유에
관하여
이야기되어지는
것은
말의
다른
부분에
유비적으로
적용되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발화된
분사에
상응하는
동사와
구분되어지는
심적
지향은
존재하는가?
나는
정신
가운데
그러한
다수성을
둘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동사는
항상
'est'라는
동사와
함께
취해지는
동사의
분사로
의미되거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513/
그리고
그렇게
마치
동의어가
의미의
요구에
의해서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의
적절성을
위하여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의어
명사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이나
표현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적합하게
그것의
하나에
의하여
표현되어질
수
있으며,
이는
몇몇
동의어
명사에
상응하는
개념의
다수성은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발화동사와
그것의
분사는
의미
혹은
표현의
어떤
요구에
의하여
구성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정신
가운데
개념의
그러한
다수성은
없다.
중요한
논의에서
나는
심적명사의
모든
우유는
발화명사의
우유라고
답한다.
반대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의미와
표현의
요구에
의하여
발화명사의
우유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심적명사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것은
말함의
적절성에
의하여
발화명사의
우유가
있다.
예를
들어,
동의어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문법성에
의하여
그리고
이것은
심적명사에
속하지
않는다.
<풀이-옥캄에게 심적언어와 발화언어 그리고 문자언어는 기존의 이해 방식에 의한 의미관계가 아니라, 종속관계이다. 이에 의하면 규약적 언어인 발화언어와 문자언어의 모든 요소는 심적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심적언어는 규약적 언어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문자언어가 발화언어에 종속되고, 발화언어가 심적언어에 종속된다고 한다면, 비록 종속이라 하여도, 규약적 언어와 심적언어는 1:1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종속되어진다고 하여도, 심적언어가 가지지 못한 많은 문법적 요소를 규약적 언어는 가지는 것이다. 이 장의 이러한 논의는 당시 철학자인 뷔리당이나 작센의 알베르투스 등과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이 이후 지칭(suppositio)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쉽게 설명하기는 힘들고, 이후 지칭 이론에 관한 논의의 번역과 소개가 진행된 이후에야 다시 한번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에 관한 모든 권한은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에게 있습니다. 학문적 목적에 의한 자유로운 이용을 허락하지만, 인용이나 인터넷상의 사용(블로그,카페,홈페이지,미니홈피,클럽...)시 분명하게 출처를 명시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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