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실존철학에서의 인간관을
음미함
-볼안의 철학-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서론
21세기의 시작에서 지난 20세기를 돌아본다는 것이 단지 지난
일에 대한 향수로 이해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20세기 그 혼란의 시기를 대변하는 실존철학을 논함으로서그 시기의 사상에 대한 철학적인
위상을 드높이고자 함은 더 더욱 아니다. 이는 그 당시 실존철학자들이 가진 탁월한 인간에 대한 이해지평을 살피고자 함이다. 그러기
위해 본인은 독일의 두 사람-하이데거, 야스퍼스-과 프랑스의 한 사람-샤르뜨르-을 내세울 것이다.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존철학의 중심이라
믿어지는 까닭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 철학이 한낱 시대의 흐름에 의한 유행이라 하지만 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확신에서 이 글을
쓴다.
본론
1. 하이데거의 사상을 음미함.
그의 저서 『시간과 존재』를 따라가며 살펴보기로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거기에"(da) "있음"(sein)으로서 이를 현존재(dasein)라고 한다. 이 현존재는 곧 "내-존재"(in-sein)이며, 바로 "세계-내-존재"(das-in-der-zeit-sein)이다. 다시말해 현존재는 즉 "거기"(da)있다는 말은 "세계-내-존재"라는 말이다.
"세계 내 존재"에서 "내 존재"를 우선 문제 삼아
보자.
이는 누가 방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컵 안에 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것과 엄연히 구별된다고 한다. 그가 말한 "세계-내-존재"에서 "내-존재"라는 말은 "∼에 산다,∼에 거주한다.∼친숙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전자와 같이 그저 공간적인 "내(內)"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범주적이라 하고, 후자와 같이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의 하나인 바를 "實存範疇"의 하나라 한다.
그러면 "세계"(welt)를 이어서 문제삼기로 한다.
그가
말한 "세계-내-존재"에서 세계는 그저 공간적이거나 장소를 나타내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는 현존재가 그 안에 살고 거주하고 친숙한 곳이다.
그리하여 이는 주위세계이다. 이 역시 현존재의 실존범주 中에 하나이다.
이상을 요약해보자.
인간은 거기에(da)
존재한다.(sein)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라는 말마디이다. 이때 "內-存在"는 "∼에 산다,∼에 거주한다,∼친숙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세계"는 현존재가 그 안에 살고 거주하며 친숙한 세계이며, 주위세계이다. 인간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은
현존재이며, 그가 주위세계라는 곳에 머무는 "세계-내-존재"이다. 이런 인간의 현존재를 실존이라 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존재하거나 해야할 것이다. 허나 분명 현존재는 자신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이미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이해"(先理解)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세계에 대하여 이미 이해를 가진다는 말이며 이러한 이해로 인하여 현존재는 자신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곧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고 있다. 이는 자신의 存在可能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음이다.
현존재란 본시 어떤 상황에 있는 바로 그 존재가능으로서, 이는
현존재에 떠맡겨져 있다. 즉 현존재란 존재가능이다. 이런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야하며, 이를 위해 자기 미래에 대하여 계획하고 이를
내던진다. 이를 하이데거는 "기획투사"라고 한다. 이는 현존재가 자신의 자기 존재가능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한 이해로서 가능하다. 이런
이해의 기획투사는 현존재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를 존재가능(있을 수
있음)으로 파악한다. 이때 인간에게 피 할 수 없는 가능이 드러난다. 즉 인간 현존재의 최종가능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현존재는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다. 즉 무엇을 할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타인의 것을 빼앗을 수도 없다. 이는 철저하게 개인인 "나"에게 주어진 고유한 가능성이다. 이는 현존재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한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종말을 행한 존재이다. 이런 현존재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다하려 하지만, 죽음은 어느 땐가 다가올
가능에 있으며, 그 시기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러한 현존재는 일상 속에서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일상 속에서
거주함으로 친숙함과 편안함을 누리려한다. 하지만 이러한 친숙함과 편안함은 불안 속에서 무너진다. 일상으로의 몰입은 하나의 도피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피 중에도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불안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불안 가운데 현존재는 선뜩함을 느낀다. 이러한 섬뜩함으로부터의 도피, 즉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일상에로의 몰입이라 한다.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죽음은 가장 고유한 건널 수 없는
가능성으로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으며, 진실로 현존재는 실존하는 동안 죽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에게 도래적인 것이다. 이때 도래는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게 자기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런 옴이다. 현존재는 염려로서 자기를 앞질러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을 불려세운다. 즉
염려로서 현존재는 스스로를 앞질러 달려가 죽음 앞에 나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불안하며, 이러한 죽음은
바로 누구도 대신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이러한 것은 현존재를 개별화시킨다. 이런 죽음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태도를 가진다. 하나는 하이데거가 본래적이라 표현한 것으로서 죽음을 참이라 여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마다하는 것으로서 일상에
몰입하는 것으로 이를 비본래적이라 한다.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자기를 이해하며, 또한 자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야하며, 이를 위해 기획투사를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고유한 가능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죽음이다. 현존재는 이러한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며, 염려로서 죽음으로 앞서간다. 죽음 앞에서 불안은 인간을 개별화시키며 이런 죽음 그리고 불안을 피해 일상으로 몰입한다. 하지만 이는
비본래적인 것이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받아드리는 것을 본래적이라 하이데거는
말한다.
2. 야스퍼스의 사상 음미함.
야스퍼스는 인간의 현존재(dasein)을 세계존재라고 보고, 이를
통하여 그의 말마디인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놓여진 실존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초월(transzendenz)을 문제삼는다. 우리
인간은 현존재이다. 그리고 현존재(dasein)는 여기(da)있다(sein)이라는 말이다. 이는 또한 "세계-내-존재"라는 말이며, 내재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런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는 그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하며 타자와 함께 있다. 그리고 세계전체를
부정하고는 개인이 없으며, 또한 개인 없이 세계전체도 없다고 한다. 이를 야스퍼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영혼이 모든 것이라 한 말을 빌려와
덧붙이며 설명한다. 즉 세계는 인간 현존재의 구성요소이며, 또한 인간 현존재 없이는 세계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는
고대의 말을 빌려오기도 한다.
이때 "세계"란 결국 인간 현존재가 거기(da) 있는 곳일 따름이며, 현존재가 관련하는 대상들의
총화일 따름이다. 현존재는 이러한 세계에 무자비할 정도로 내맡겨져있다. 현존재의 환경과 감각이 모두 거기에 의존해 있으며, 여기에서 현존재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존재는 세계에 대하여 인식에 주어진 경험만을 가질 뿐이다. 이런 인식은 세계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며 세계를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로 단정한다. 이런 단정은 인식에 만족감으로 준다. 하지만 세계는 대상으로서 이것을 이것이라고 인간을 강요하며, 저것을 저것이라고
강요한다. 세계는 누가 생각해도 이것은 이것이라 해야하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해야한다. 이러한 것에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현존재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폭을 넓혀 그 외접원을 크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세계 자체일
수는 없다. 인간의 현존재가 가진 지식은 결코 세계 자체일 수 없다. 아무리 커다란 망원경을 가지고 멀리 있는 것을 부아도 그리고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 微細世界를 보아도 더 알려질 것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지식욕은 그 끝이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세계 안에 있는 것이지 세계 자체가 아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야스퍼스는 결코 우리가 세계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며, 그저 개개의 것에 인식이 머물 뿐이라고 한다. 세계전체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과학은 좌절하며 과학적인 인식에 의한 세계는 세계자체가 아니라 개개의 것으로 찢겨진 세계일 뿐이라 한다. 이런 생각 下에서 그는 철학을 어떤
지식이나 고정된 것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세계 그 자체는 인간에 의하여 지식이 되어지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세계 속에서만이 현존재는 자기를 실현할 뿐이다. 이런 현존재의 內在性(immanenz)으로 드러난다. 이는 대상으로서
세계와 나의 현존재를 포괄한다. 나는 세계 속에서 전적으로 내재해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현존재는 세계존재이다. 이런 현존재는 한계점을
가지며, 그 한계점을 스스로 넘으려 한다. 이러한 한계점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죽음, 전쟁, 죄...-라 한다. 예를 들어 죽음은 인간이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즉 그 앞에서 모든 것이 일체의 허무가 되어버린다.
즉 현존재는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는 한계를 마주하게 되며, 여기에서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한다. 즉 세계의 의미는 상실되며, 그런고로 世界-內-存在 즉 內 존재도 의미를
상실한다. 이런 한계상황은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타자와의 모든 관계가 의미를 상실한다. 즉 한계상황은 "나"라는 바라 자기 자신에게
직면된 것이다. 현존재는 실존이 된다.
실존은 초월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초월이란 대상화되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는 무한성이며, 無로 드러난다. 대상화 될 수 없기에 이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언제나 대상화됨이며, 이는 무엇이라
이름됨이며, 한정됨이기 때문이다. 이는 초월(초월자)이 아니다. 초월(초월자)은 우리의 지식으로 무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에 이는 세계와 같이 현존재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알지 못하는 것에 강요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와 같이 모두가 함께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아는 그러한 보편적인 지식도 아니다. 이는 단지 한계상황 속에서 홀로 드러남이지 보편적으로 아는 그런 지식이
아니다.
세계는 인간을 강요하지만 초월은 인간에게 자유를 준다. 자유 안에서 초월이 가능하다. 자유란 일체 대상-세계-로부터
벗어남 즉 초월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계상황 속에서 실존이 되며, 실존은 초월로 가능하다. 한계상황 가운데 현존재는
일체의 모든 것, 즉 세계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런 어둠에서 그에게 불안이 다가온다. 이 불안은 초월을 향해 나를 열게 한다. 마치 無知의 知와
같이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신앙과 같이 말이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며, 그 자신이 한계를 가진다. 이 한계상황에서
인간현존재는 "나"를 발견하며, 이 한계상황을 뛰어넘으려 한다. 이때 현존재는 단순히 현존재가 아니라 초월과 대면한 실존임을 발견한다. 즉
한계상황에 대한 불안 가운데 초월로 열려지고, 이때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3. 샤르뜨르의 사상을 음미함.
그의 저서 "實存主義는 휴머니즘이다"를 따라가며 그의 사상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는 실존주의를 두 가지 흐름으로 구분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적인 마르셀과 야스퍼스의
실존주의와 무식론적인 하이데거와 샤르뜨르 자신의 실존주의이다. 이 둘은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한 권의 책은 그것을
만드는 이의 개념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기술자의 개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의
예지(l'entendement divin) 속에 일종의 개념이 현실화 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이라 한다. 인간은
존재하고 난 後에 무엇으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로서 자신이 존재한 후 스스로 무엇임이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한 권의 책이나 꽃과 같은 그런 것과 달리 자기의 삶을 영위하는 일종의 기획투사(project)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무엇임을
기획투사하는 존재일 뿐이다. 만일 인간이 이와 같다면 인간은 자신의 무엇임에 책임저야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삶의 주인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행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행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행위는 全人類를 끌어드린다. 만일 내가 자식을 가지기 위해 혼인을 한다면, 비록 이것이
나의 생각이나 욕망에 기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로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니고 전인류의 일부일처체계의 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흔히
실존주의자는 인간을 불안(l'angoisse)한 존재라고 한다. 이는 나의 선택이 단지 스스로를 결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아와 더불어
전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인간이 자기의 심각한 책임의식에서부터 벗어 날 수 없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것으로서 거짓을
행하고 자신에게 "모든 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냐"라고 변명한다면 이는 자기의 양심에 대하여 불안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무상(無償)을 낳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위의 조건으로서 행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순간마다 모범적인 행위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 행위가 인류에게 모범인가를 숙고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심각한 책임 즉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한 책임인 "불안"을 슘기는
이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언제나 가능성 속에 있다. 이는 모두 샤르뜨르에게
인간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에게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 속에서 그 삶에 뛰어들어 자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것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의 삶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을 마다한다. 이는 어느 특정인이
인간을 굳어진 무엇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실존주의적인 휴머니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에 때라면 인간은 끝없이 기투(project)하며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기에 결코 하나의 굳어진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샤르뜨르에게 인간은 신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떠한 구원이나 은총도 없이 순간순간 인간을 창조하도록 선고받은 존재이다. 그에게 신의 예지는 인간의 자유와 서로 모순이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신의 예지 가운데 있는 개념(무엇임)이 현실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선택 가운데 던져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자아뿐 아니라 전인류를 끌어드린다. 그러기에 자아의 선택은 스스로를 실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를 선택하는 것이고,
이는 심각한 책임의식, 즉 불안을 일으킨다. 이 불안은 행위와 선택에 대한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자유로이 자신을 형성하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이것에 대한 책임감인 불안에 봉착한 존재이다. 이 불안은 무상을 낳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결론
필자는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중 실존주의철학자 세 사람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인간에 쳐한 현실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20세기 초반에 인류는 비극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세계 1차 대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인류를 죽음과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또 다시
세계 2차 대전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그러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6.25와 미소의 냉전은 인류에게 죽음과 가난 그리고 수많은
고통을 맛보게 하였다. 무엇보다 인간을 불안 가운데 놓여진 존재로 규정하게 하였다. 이때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이런 애써 피하려고 일상에 몰입하는 것을 비본래적이라 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본래적이라 한 이와 그러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초월할 것을 논하는 이 그리고 오랜 시간 유럽의 전통적인 종교적 전통 가운데 신이라는 것에 대하여 믿음을 붕괴하려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그리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논하려는 이들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가 단지 20세기에만 가능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신한다. 분명 이들 철학은 한낱 유행으로 가는 철학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위상에 대한 숙고할 만한 논의임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부족한 역량으로 인해 각 철학자의
일면에 만 치우친 것에 대하여 사과한다.>
'근현대철학의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디우의 (전후) 프랑스 철학의 모험 (0) | 2006.11.09 |
---|---|
들뢰즈 스피노자 강의 1980년 12월 21일 (0) | 2006.11.09 |
가다머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황재원 옮김 (0) | 2005.07.07 |
칸트의 초기 저작과 존재론적 배경 (0) | 2005.05.11 |
가능 세계 존재론의 이해 (0) | 2005.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