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초기 저작과 존재론적 배경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칸트 철학에서 전-비판서 시기의 의미
어느 날 갑자기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적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집필 이전 모든 시간의 결과로 {순수이성비판}을 적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그가 우리가 아는 그를 만들어간 재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철학을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따라가려는 나에게
그의 비판서에 앞선 저작들은(Vorkritische Schriften) 그냥 쉽게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필자의 눈에 유독 들어온
것이 1766년 쓰여진 {형이상학의 꿈에 의하여 해명되는 몽상가의 꿈}(Traueme eines Geistersehers, erlauetert
durch Traueme der Metaphysik)과 그 보다 앞선 시기인 1763년에 쓰여진 {신의 현존재 증명에 관한 하나의 가능한 증명
근거}(Der einizig moegliche Beweisgrund zu einer Demonstration des Daseins
Gottes)이다. 여기에서 칸트는 그의 대표작인 {순수이성비판}의 존재론적 사고를 만들어간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Sein)가
술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즉, 한 사물의 개념에 부과될 수 있는 무엇의 개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이에 근거하여 그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논박한다. 여기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신의 개념에 새로운 술어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을 나의 개념에
관계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100탈러의 예를 든다. 현실적인 100탈러는 가능적인 100탈러보다 조금도 더
포함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단지 개념을 의미하고, 현실적인 것은 그 대상과 그 정립,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나의 개념이 대상 전체를 포함하지 못하고, 따라서 또 대상에 관한 적합한 개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를 한다고 해도, 실제 대상에 더해지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개념에서 생각한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실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개념의 대상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존재'란 사물에 부과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것이며, 이미 전제된 사물에 부과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상태이다. 개념은 단지 가능성을
표현하며, 이 가능성을 표현하는 개념에는 어떤 것도 부과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도 더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것, 즉 이미 주어진 대상은 존재가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즉 존재란 가능한 것이며, 이미 전제된 사물에 부과되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의 유명한 정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용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칸트는 가능적인 100탈러는 내용이 없는 사상이며, 100탈러라는 개념이 없는 현실적 100탈러의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한다. 칸트에 의하면,
경험의 내용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대상의 개념이 증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경험 내용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가진다. 이러한
존재에 관한 칸트의 견해는 초기 그의 견해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곳에서 칸트는 자신의 비판서의 이론과는 사뭇 다른 것을 선보인다. 그러나
초기의 것은 비판서의 논의의 뿌리가 된다. 그 뿌리가 훗날 비판서의 초석이 된다. 비판서에서 존재보다 오히려 분석철학적 입장에선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초기의 것이 더 매력적이다. 초기 칸트의 존재는 실재적 술어가 아닐뿐더러, 의미론적으로 보면 어떤 술어도 아니고, 존재 양화 기호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현대적 견해를 선취한다.
초기 칸트는 자신의 존재론적 입장을 위하여 다른 권위에 의지하기
보다, 스스로의 이성에 집중하여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초기 이런 저런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철학을 일구어갔으며, 이러한 그의 철학적 태도는 그의 초기 저작에 잘 드러난다. 초기의 그는 의욕에 가득 차있었고,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뉴턴의 혁명적 발상과 흄의 혁명적 발상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의 위치를 다잡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흄(D.Hume)의 영향
가운데 그는 {형이상학의 꿈에 의하여 해명되는 몽상가의 꿈}에서 기존의 신, 자유, 영혼불멸을 다루는 형이상학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또한 뉴턴(Newton)의 영향은 1755년 작성된 그의 자연철학적 저서인 {보편 자연사의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재론적 논의에서도 칸트의 초기
저작은 청년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필자가 다룰 것은 바로 이 초기 저작의 존재론이다.
2. 흄의 어깨 위에 선 칸트
1749년 칸트가 24세일 때,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적 에세이}가 출판된다. 이곳에서 흄은 강단 형이상학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사실이나 존재에 관한 어떤 경험적 추론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책을 모두 불에 던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철저한 경험론적 저작은 젊은 칸트에게 큰 영향을 준다. 흄의 글을 한번 읽어보자.
우리는 감각의 지각들이 갖는 단속을 제거하기 위해 그 지각들의 지속적 존재를 꾸며내고, 그 변화를 감추기 위해 영혼, 자아 그리고 실체 등과 같은 관념에 빠져든다.
이 글에서 흄은 전통적 형이상학적 대상들을 꾸며낸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간단하게 그것은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그것을 넘어선 어떤 지속적 존재를 꾸며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꾸며낸 것이 학문인 한에서 형이상학이 다룰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에서 흄은 이런 것을 다루는 기존의 강단 형이상학의 것들을 불에 던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흄의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주장들은 당시 젊고 의욕에 찬 칸트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불빛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러한 흄의 영향 가운데 과거 철학적 지식으로 다루면 신 존재 증명에 도전장을 내밀고, 이것이 불가함을 보이려 하였다. 칸트의 초기 저작인 {형이상학의 꿈에 의하여 해명되는 몽상가의 꿈}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신의 이름은 모든 감각 없이 있는 단어이거나 그의 의미가 적절한 것이거나 이어야한다... <중략>... 인간들은 철학자의 저서에서 바르고 좋은 증명을 찾고, 그것에 의지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단일한 존재이어야 하고, 각각의 이성적으로 사고된 실체는 자연의 단일성이다....
이 글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에 관하여 안셀무스의 증명을 가져온다. 인간들은 신의 존재에 관하여 철학자, 즉 안셀무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사고된 존재는 자연 가운데 단일한 실체로 존재해야한다. 그러면 칸트는 이러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타당하다고 보았겠는가? 물론, 상식처럼 알 듯이 칸트는 자신의 비판서에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존재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 개념을 통하여 신의 존재는 형이상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검증도 반증도 되지 않는 것으로 학문으로 형이상학의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없다. 칸트는 학문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학문을 이루어 가는 것에 회의하였다. 이는 마치 훗날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의 그것을 생각나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말로 되지만, 사고할 수 없는 것은 말로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칸트의 논의는 흄의 영향 가운데 있던 초기에 이미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논의가 이러하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존재 개념을 추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3. 칸트의 존재론
{형이상학의 꿈에 의하여 해명되는 몽상가의 꿈}이라는 제목에서 칸트는 몽상가의 꿈 혹은 가상을 분석하며 비판하면서, 형이상학의
꿈도 가상임을 보인다. 이 형이상학의 꿈은 전통 형이상학이 다루던 것들, 즉 신이나 영혼 등과 같은 것이다. 이 가운데 유독 칸트의 존재 개념과
관련되는 것은 신에 관한 것이다. 실제 그는 기존의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독립적인 저서를 적었다. 이것이 바로 {신의 현존재 증명에 관한 하나의
가능한 증명 근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에 관한 칸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칸트는 "바다외뿔소는 실존하는 동물이다"(Ein
Seeinhorn ist ein existierend Tier)라는 명제를 통하여 존재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sein, 즉 존재는 실재적 술어도
어떤 형태의 술어도 아니며, 오히려 존재 양화 기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다외뿔소는 실존하는 동물이다"는 존재를 진술하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어떤 것을 외뿔소라고 지칭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술어가 자연 속에 어떤 사물에 부과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존재 문장은 본질적으로 특칭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외뿔소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정하기 위한 방식은 가능한 외뿔소에
대하여 '존재'라는 술어가 적합한지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단지 실재 자연 세계에 동물 가운데 몇몇 동물이 바다외뿔소인가 라고
동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존재는 양화사이고, 이와 관련된 문장은 특징 문장인 것이다.
이어서 그는 신의
실존에 이 논리를 적용한다. "신은 전능하게 있다"(Gott ist allmaechtig, 신은 전능하다)라는 명제에서 신의
현존재(dasein)는 우리에게 이해되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인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신은 전능하게 있다"는 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탐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즉, 신에 존재라는 술어가 적합한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에서 전능한 것 가운데 몇몇이 신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양화사란 '모든'과 '어떤'에 해당하는 기호들을 현대 논리학자들이 부르는 말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에
의하면, "집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오직 하나의 집이 있고, 더 이상은 없는 경우도 포괄한다"고 이해될 때와 같다. 이와 같은 논의는
프레게의 논의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처음으로 체계화된다. 그러나 칸트에게도 이와 유사한 것은 볼 수 있다. 그에게 "외뿔소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는 가능한 형태로의 외뽈소의 현존재 여부가 아니라, 실재 자연계 가운데 존재하는 동물 가운데 몇몇 동물이 외뿔소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 가운데 '어떤' 것을 다루는 양화논리의 형태가 칸트에게도 보이는 것이다. 칸트는 외뿔소와 함께 생각하는 어떤
술어가 동물에 부여된다고 것이 "외뿔소는 존재하는 동물이다"의 바른 해석이라고 한다.
4. 칸트 초기 이론의 정리
칸트는 신 존재 증명이란 전통 형이상학의 영역을 흄의 입장에서 제거한다. 그러면서 신 존재 증명과 같은 전통적 논의를 몽상가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칸트는 '존재', 즉 독일어로 sein을 분석한다. 실재로 그의 존재 분석은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철학사적으로도 친숙하다. 여기에서 칸트는 존재란 실재적 술어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전통적 형이상학의 논의에서와 달리 신 존재 증명에서 전제하는 존재는 그 자체로 개념적 규정이 아니다. 그러나 비판서의 존재는 가능한 것이라고 우선 전제되어 있는 사물에 부과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신이 있다" 또는 "그것이 신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신의 개념에 새로운 술어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어와 더불어, 그리고 대상을 나의 개념과 관계시켜서 정립한 것이다.
여기에서 "신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개념에 새로운 술어를 설정한 실재적 술어가 아니라, 오직 주어와 함께 대상을 나의 개념과
관계하여 정립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상과 개념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사고가 경험과 만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하였듯이 칸트의 초기 존재에 관한 사고는 비판서와는 일부 구별되어지며, 이는 현대 양화사 논리의 일부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초기
저서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실재적 술어가 아니며, 어떤 술어도 아니고, 오히려 존재 양화사에 의하여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칸트는 외뿔소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실재 세계의 동물 가운데 몇몇 동물이 외뿔소인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명제의 진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관찰에 근거하지만, 외뿔소의 관찰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그의 초기 저작에서 사물의
현존재에 관한 명제의 진위는 그 주어의 개념을 탐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명제가 참임을 확정하기 위하여 실재하는 양을 관찰 혹은 경험하는
것은 그 존재를 이미 전제하기에 무의미하다. 이렇게 존재와 관련된 명제의 분석은 칸트에게 복잡하기만 하다. 어떤 사물에 관한 현존재에 대한
명제는 경험에 의하여 주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양화사이다.
비판서의 존재개념은 연계사이다. "신은 전능하다"(신은
전능하게 있다)라고 한다면, 신과 전능을 합해서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술어를 더한 것이 아니라, 개념과 대상을 정립한
것이다. 또한 개념과 대상은 동일해야한다. 이는 "신은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초기 저작에서 존재는 양화사이다.
"외뿔소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외뿔소로 지칭하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술어가 실재 세계 가운데 어떤 것에 부과된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즉 우리가 외뿔소와 함께 생각하는 술어가 어떤 동물에 부과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 칸트에게 "외뿔소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는
가능한 형태로의 외뽈소의 현존재 여부가 아니라, 실재 자연계 가운데 존재하는 동물 가운데 몇몇 동물이 외뿔소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이나 '어떤'과 관련되어 논의되는 양화 논리와 관련되어 보인다.
5. 나가면서
필자의 눈에는 칸트의 초기 저작이 그의 비판서 보다 더 매력적이다. 물론 이는 존재에 관한 그의 생각에 한정되어질 것이며, 실상
초기 그의 생각 가운데 필자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그 정도이다. 필자는 칸트의 전공자도 아니고, 그의 책을 체계적으로 읽은 이가
아니라서, 더 이상 무엇을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남은 것이 필자에게 남겨진 숙제가 될 것이라 여겨지며, 우선 여기에서 논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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