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978
1929년에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교수취임 강의는 그의 일에 있어서 우수한 결과로써 결정되었다. 대학의 강연에서, 오래된 모교 프라이부르크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였으며, 하이데거의 이전에로 넘어가서 1929년 그가 있을 때로 올라가서-그 당시 학생, 조교, 강사, 현재,『시간과 존재』의 결정적인 성공으로부터, 유명한 철학자로서 그의 시대였다. 그래서 강연의 영향력은 뛰어났었다. 곧 번역서의 귀결은 프랑스,일본,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칼,영국 그리고 터키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리고 나는 모르겠으나, 다른 외국어 가운데에서 더 많은 번역서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곧 빠르게 ,처음으로 넓은 다른 문화들 안으로 영향력이 미쳤으며, 강연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히 시간과 존재의 번역서는 생각보다 빨리는 이 작품의 방대함으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연은 전체적으로 특별히 강력한 것이며 넓은 영향력으로 생각되지만 오인되었다. 특히 초기 번역서의 부분은 일본 그리고 터키로 흘러들어갔으며, 유럽의 기독교, 언어영역 두분야 모두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생각은 특히 준비에서 배경형성을 가진 그리고 명백하지 않은 그리스 기독교 형이상학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반면에 무(Nichts)로부터의 강의와 연설은 극단적인 논리학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1932년 루돌프 카르납의 『앎』에서 설명되었으며, 그것은 비판적 날카로움과 모든 반론들을 다시 말하고 있으며 하이데거는 강연안에서 논의하였으며 그것으로서 무에 대한 물음의 준비가 되었으며, 하이데거는 언어를 전달하는 것에 관해 그러한 물음들의 견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한 하이데거 자신은 무엇보다 뛰어난 이 작은 발행 때문에 1943년부터 상당히 긴 1949년까지 그는 뒷날 저서의 판본을 두 번 자세히 주석을 첨부하였다. 오늘날 원전은 초기부피의 두 배를 넘어서 더 크게 이르렀다. 하이데거는 이정표(Wegmarken)와 같은 서정시집 외에 또 계속하여 주목할만한 작은 시리즈를 1929년과 1964년 사이에 작품들을 출판하였으며 모두 세 부분으로 offenbar als wegmarken을 자신이 첨부하였다. 형이상학적 사고와 형이상학의 극복으로부터의 큰 주제는 이 첫 번째 강의에서 그려냈으며, 후기 하이데거의 사고활동으로 간주된다. 자신은 강의에서 여전히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던 것은 양식 안에서 시행된 것이다. 무로부터의 물음은 명확히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 소개되었으며, 만일 어떤이를 단념시키기 위해 논리학의 잘 알려진 방어 수단으로 선택하게 돤다면 어떤 이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무의 물음 그리고 무의 철학적인 기본적 경험이 제기되었으며 그 후에 사고는 그밖에 존재의 그기(Da)에로 사고하도록 되었다. 그것은 사명이었으며, 하이데거는 그의 자각으로서 형이상학의 언어와 존재자로서의 존재의 형이상학적 물음으로부터의 안에서 언제나 의식적인 전향을 했다. 그것들은 숨결안에서 그의 긴 삶을 관철하였다. 하나의 의미 깊은 복잡한 문체에서 그리고 그의 언어위기는 충분한 설명안에서 그는 도전적인 문장을 1945년 후기에 시도하였다. 그것은 존재의 진리에 관한 들음이며, 존재는 아마도 존재하는 것이 없어도 존재하며, 그리고 존재하는 것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되며 그리고 이러한 문장은 5개가 있다. 발행부수는 직접 그의 반대로 변경되었다. 존재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의 존재가 없어서는 인된다. (마지막은 또한 이탈리아 번역서가 원전의 기초를 이룬다.)그의 물음은 둘은 긴장의 공간을 가로질러서 표현양식이 모순됨을 슉고하였다. 둘의 표현양식은 선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사고를 대상화하는 것을 활자로 느낀다. 존재는 어떤 것이 아닌 사고와 표현의 총괄적인 개연적 대상인가? 그 외에 존재는 존재자에 필연적인가?
플라톤은 코리스모스의 오랜 시기를 관념적 사고의 시기로서 간파하였으며, 여기에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새로운 복잡한 배경물음은 하이데거가 저 상이한 서문을 첨부하는 5판(1949)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새로운 어조인 서문은 원전의 변형의 용어에 관해 차이가 드러났을 때인 1943년의 오래된 후기의 어조와 거의 드물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몇몇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처럼 1943년의 후기는 강한인상을 주며, 강의는 사유와-무(Nichts), 그것은 불안의 본질이 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합되어 있다. 강의는 무에로의 물음을 함으로써, 물음은 존재에로의 물음 ,존재는 본질이 아닌 본질(τι)이며 형이상학의 존재로부터는 존재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후기는 논리학에 비해 본질적 사유로서 이 새로운 물음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사유는 결말을 짓는다. 변호는 요구로 바뀌며, 존재자의 상이성으로부터 존재요구는 말하자면 존재자체로부터 확실한 사유를 표현이 되도록 추구하는 것이며, 언어화 그리고 표상화를 통해 존재는 독일인들의 저 해(Jahre) 종말론적인 격정은 대변동으로 전율하였다. 그것은 희생자의 노력의 주장이며, 고마움으로부터, 고마움은 존재에 대한 감사이며 그리고 그의 기억을 지킬것이며 존재인정의 반응으로부터, 현존재에 절박함으로부터, 절박함은 존재에 단어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고 후기자체는 사상가의 의견이 마지막인 것과 그것은 시인으로 불려지는 친밀함이 가까워진다.
후기의 서문은 방금 언급한 것에 비해 노력을 했으며, 사고출발의 본질적 귀결로서 강의가 재현한 것은 『존재와 시간』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강의에 대한 사고출발은 밖으로 사고를 시도하기 위해 이른바 전회(Kehre)로 나아간다. 그러는 사이에 단지 하이데거의 횔덜린(Hoelderlin)해석만이 일반적인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인문주의에 관한 편지』그리고 『숲길』은 하이데거 사유가 발전하는 길이었으며 명확하게 전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라이프니츠로부터의 모든 것에 앞서서 『존재와 시간』그리고 『형이상학의 역사』로부터의 엄밀한 관련안에서 형이상학 극복의 문제서문이 시작되었으며 하이데거의 사유는 전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또다시 하이데거는 은유로부터 시작하였으며, 형이상학의 역사에서는 명백히 은유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문의 수목(arbor scientiarum)은 근원에서 멀어지는 나무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본질은 은폐된 근원을 해명하는 역행을 통한 문제의 성립, 그리고 형이상학은 자신의 근원을 사유하지 않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이것,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시작하는 것이며, 형이상학의 요구에로 나아간다. 존재자체 그리고 인간에게 의미하기 위한 존재자의 존재에로의 형이상학적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이상학의 물음: 도대체 존재자와 더 자세히 말해서 무가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가지고 물음에로 향한다: 왜 존재에로 보다 존재자에로의 더 많은 사유함을 제기하는가? 하지만 그 외에 무로부터의 물음을 취하거나, 반대로 형이상학에서의 물음으로서 이전에 생각한 강의처럼, 형이상학적 물음은 하지 않는다.
아니다:무엇이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이며 아니면 형이상학이란 원래 무엇인가? 어느 것이 운명인가? 어떻게 이것이 확실히 우리의 운명에 닥치는가? 강의의 이 서문은 1949년에 첨부되었으며, 1929년의 정중한 내용인 강의가 시행된 것처럼, 반대로 현대세계와 전체로서 인류의 상황처럼, 20세기의 절반은 제2의 산업혁명의 격렬한 진행을 가지고 그리고 전후시대의 각성처럼 학문과 대학학문(universitas literarum)의 문제의 상황에 더 이상 서두를 장식하지 못했다. 100년의 반영이다.
*이 글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Heideggers Wege에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번역한 것 이다.
1978
1929년에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교수취임 강의는 그의 일에 있어서 우수한 결과로써 결정되었다. 대학의 강연에서, 오래된 모교 프라이부르크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였으며, 하이데거의 이전에로 넘어가서 1929년 그가 있을 때로 올라가서-그 당시 학생, 조교, 강사, 현재,『시간과 존재』의 결정적인 성공으로부터, 유명한 철학자로서 그의 시대였다. 그래서 강연의 영향력은 뛰어났었다. 곧 번역서의 귀결은 프랑스,일본,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칼,영국 그리고 터키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리고 나는 모르겠으나, 다른 외국어 가운데에서 더 많은 번역서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곧 빠르게 ,처음으로 넓은 다른 문화들 안으로 영향력이 미쳤으며, 강연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히 시간과 존재의 번역서는 생각보다 빨리는 이 작품의 방대함으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연은 전체적으로 특별히 강력한 것이며 넓은 영향력으로 생각되지만 오인되었다. 특히 초기 번역서의 부분은 일본 그리고 터키로 흘러들어갔으며, 유럽의 기독교, 언어영역 두분야 모두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생각은 특히 준비에서 배경형성을 가진 그리고 명백하지 않은 그리스 기독교 형이상학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반면에 무(Nichts)로부터의 강의와 연설은 극단적인 논리학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1932년 루돌프 카르납의 『앎』에서 설명되었으며, 그것은 비판적 날카로움과 모든 반론들을 다시 말하고 있으며 하이데거는 강연안에서 논의하였으며 그것으로서 무에 대한 물음의 준비가 되었으며, 하이데거는 언어를 전달하는 것에 관해 그러한 물음들의 견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한 하이데거 자신은 무엇보다 뛰어난 이 작은 발행 때문에 1943년부터 상당히 긴 1949년까지 그는 뒷날 저서의 판본을 두 번 자세히 주석을 첨부하였다. 오늘날 원전은 초기부피의 두 배를 넘어서 더 크게 이르렀다. 하이데거는 이정표(Wegmarken)와 같은 서정시집 외에 또 계속하여 주목할만한 작은 시리즈를 1929년과 1964년 사이에 작품들을 출판하였으며 모두 세 부분으로 offenbar als wegmarken을 자신이 첨부하였다. 형이상학적 사고와 형이상학의 극복으로부터의 큰 주제는 이 첫 번째 강의에서 그려냈으며, 후기 하이데거의 사고활동으로 간주된다. 자신은 강의에서 여전히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던 것은 양식 안에서 시행된 것이다. 무로부터의 물음은 명확히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 소개되었으며, 만일 어떤이를 단념시키기 위해 논리학의 잘 알려진 방어 수단으로 선택하게 돤다면 어떤 이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무의 물음 그리고 무의 철학적인 기본적 경험이 제기되었으며 그 후에 사고는 그밖에 존재의 그기(Da)에로 사고하도록 되었다. 그것은 사명이었으며, 하이데거는 그의 자각으로서 형이상학의 언어와 존재자로서의 존재의 형이상학적 물음으로부터의 안에서 언제나 의식적인 전향을 했다. 그것들은 숨결안에서 그의 긴 삶을 관철하였다. 하나의 의미 깊은 복잡한 문체에서 그리고 그의 언어위기는 충분한 설명안에서 그는 도전적인 문장을 1945년 후기에 시도하였다. 그것은 존재의 진리에 관한 들음이며, 존재는 아마도 존재하는 것이 없어도 존재하며, 그리고 존재하는 것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되며 그리고 이러한 문장은 5개가 있다. 발행부수는 직접 그의 반대로 변경되었다. 존재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의 존재가 없어서는 인된다. (마지막은 또한 이탈리아 번역서가 원전의 기초를 이룬다.)그의 물음은 둘은 긴장의 공간을 가로질러서 표현양식이 모순됨을 슉고하였다. 둘의 표현양식은 선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사고를 대상화하는 것을 활자로 느낀다. 존재는 어떤 것이 아닌 사고와 표현의 총괄적인 개연적 대상인가? 그 외에 존재는 존재자에 필연적인가?
플라톤은 코리스모스의 오랜 시기를 관념적 사고의 시기로서 간파하였으며, 여기에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새로운 복잡한 배경물음은 하이데거가 저 상이한 서문을 첨부하는 5판(1949)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새로운 어조인 서문은 원전의 변형의 용어에 관해 차이가 드러났을 때인 1943년의 오래된 후기의 어조와 거의 드물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몇몇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처럼 1943년의 후기는 강한인상을 주며, 강의는 사유와-무(Nichts), 그것은 불안의 본질이 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합되어 있다. 강의는 무에로의 물음을 함으로써, 물음은 존재에로의 물음 ,존재는 본질이 아닌 본질(τι)이며 형이상학의 존재로부터는 존재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후기는 논리학에 비해 본질적 사유로서 이 새로운 물음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사유는 결말을 짓는다. 변호는 요구로 바뀌며, 존재자의 상이성으로부터 존재요구는 말하자면 존재자체로부터 확실한 사유를 표현이 되도록 추구하는 것이며, 언어화 그리고 표상화를 통해 존재는 독일인들의 저 해(Jahre) 종말론적인 격정은 대변동으로 전율하였다. 그것은 희생자의 노력의 주장이며, 고마움으로부터, 고마움은 존재에 대한 감사이며 그리고 그의 기억을 지킬것이며 존재인정의 반응으로부터, 현존재에 절박함으로부터, 절박함은 존재에 단어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고 후기자체는 사상가의 의견이 마지막인 것과 그것은 시인으로 불려지는 친밀함이 가까워진다.
후기의 서문은 방금 언급한 것에 비해 노력을 했으며, 사고출발의 본질적 귀결로서 강의가 재현한 것은 『존재와 시간』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강의에 대한 사고출발은 밖으로 사고를 시도하기 위해 이른바 전회(Kehre)로 나아간다. 그러는 사이에 단지 하이데거의 횔덜린(Hoelderlin)해석만이 일반적인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인문주의에 관한 편지』그리고 『숲길』은 하이데거 사유가 발전하는 길이었으며 명확하게 전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라이프니츠로부터의 모든 것에 앞서서 『존재와 시간』그리고 『형이상학의 역사』로부터의 엄밀한 관련안에서 형이상학 극복의 문제서문이 시작되었으며 하이데거의 사유는 전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또다시 하이데거는 은유로부터 시작하였으며, 형이상학의 역사에서는 명백히 은유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문의 수목(arbor scientiarum)은 근원에서 멀어지는 나무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본질은 은폐된 근원을 해명하는 역행을 통한 문제의 성립, 그리고 형이상학은 자신의 근원을 사유하지 않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이것,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시작하는 것이며, 형이상학의 요구에로 나아간다. 존재자체 그리고 인간에게 의미하기 위한 존재자의 존재에로의 형이상학적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이상학의 물음: 도대체 존재자와 더 자세히 말해서 무가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가지고 물음에로 향한다: 왜 존재에로 보다 존재자에로의 더 많은 사유함을 제기하는가? 하지만 그 외에 무로부터의 물음을 취하거나, 반대로 형이상학에서의 물음으로서 이전에 생각한 강의처럼, 형이상학적 물음은 하지 않는다.
아니다:무엇이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이며 아니면 형이상학이란 원래 무엇인가? 어느 것이 운명인가? 어떻게 이것이 확실히 우리의 운명에 닥치는가? 강의의 이 서문은 1949년에 첨부되었으며, 1929년의 정중한 내용인 강의가 시행된 것처럼, 반대로 현대세계와 전체로서 인류의 상황처럼, 20세기의 절반은 제2의 산업혁명의 격렬한 진행을 가지고 그리고 전후시대의 각성처럼 학문과 대학학문(universitas literarum)의 문제의 상황에 더 이상 서두를 장식하지 못했다. 100년의 반영이다.
*이 글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Heideggers Wege에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번역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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