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읽기
들뢰즈 강의
스피노자
1980년 12월 21일
존재론-윤리학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이 글은 토마스철학학교 틀밖 교실 토요 고전 강좌의 일환으로 번역되었다. 원문은 www.webdeleuze.com의 것이다. 초벌번역입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순수 존재론의 기획에서 스피노자는 어떻게 이러한 순수 존재론을 윤리학이라 부른 것인가? 우리는 비록 그가 윤리학이라 부른 것이라지만 순수 존재론이란 것을 알 고 있다는 것은 그 특성의 모여진 것에 의해서 일 것이다. 우리는 존재론과 도덕성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윤리학이란 혐의와 함께 윤리학 사이 이 연관의 일반적 상황을 보았다. 왜 우리는 이 순수 존재론이 윤리학의 명칭으로 취하게 되는 그 연관에 대한 협의를 가지게 되는가?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스피노자의 순수 존재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단일 위상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존재자,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단일 실체인 그것은 존재이다. 존재로서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자들은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스피노자가 양태,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양태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태란 무엇인가? 그것의 존재의 방식이다. 존재자 혹은 실존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단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형태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존재자인 우리는 실존하는 우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실체 가운데 존재의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윤리학이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인 것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도덕성 이외 어떤 방식에서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윤리학은 인성학이란 또 다른 이름 가운데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질 것이다.
어떤 이가 짐승 혹은 인간과 연관하여 인성학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어떤 방식에서인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인성학은 실천적 학문인데, 어떤 종류의 것인가? 존재의 방식에 대한 실천적 학문이다. 존재의 방식은 순수 존재론적 관점에서 고유하게 존재의 상태 혹은 존재하는 것의 상태이다.
어떤 방식에서 이미 도덕성과 구별되는가? 우리는 존재론의 관점일 되는 관점의 종류를 고성하고자 한다. 우리는 존재 가운데 존재의 방식이며, 이는 윤리학의 대상이고, 인성학의 대상이다. 반대로 도덕성 가운데 그것은 어떤 방식인가? 근본적으로 함께 용접 되어진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본질과 가치의 방식이다. 도덕성은 우리에게 본질을 이야기한다. 즉 우리의 본질을 말이다. 이것은 가치에 의하여 우리에게 다시 요청된다. 그것은 존재의 관점이 아니다. 나는 도덕성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도덕성이란 것은 항상 존재를 넘어선 어떤 것을 포함한다. 존재를 넘어선 어떤 것은 일자, 즉 선 가운데 기능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초월한다. 사실 도덕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심판을 기획하는 것이다. 즉 오직 존재를 넘어서는 권위의 이름으로 존재를 심판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에서, 즉 도덕성 가운데 본질과 가치의 방식이 존재하는가? 질문 가운데 도덕성에서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의 본질이 무엇이란 말인가? 도덕성 가운데 그것은 항상 본질을 인식하는 재료이다. 이것은 본질이 필연적으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가 본질을 가짐을 포함한다.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명맥하지 않다. 그러나 본질이란 이름 가운데 우리를 명령하고 말하는 도덕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본질의 이름 가운데 명령을 받는다면, 이 본질로 인하여 그 자체를 인식하진 않는 것이 된다. 그것은 본질은 인간 가운데 가능적으로 있는 것이라 이야기될 것이다. 무엇이 도덕성의 관점에서 인간 가운데 가능적으로 있는 인간의 본질인가?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동물이란 것으로 잘 알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적 동물이다. 이 본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이성적 동물은 인간의 본질이다. 비록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성적 동물이라면, 그는 비이성적 방식 가운데 행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인식되진 않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순수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유가 있다. 그는 전환되어지는 것이 중지되지 않는다. 인간에 관한 전체 고전적 개념들은 인간을 그의 본질에 동의하며 발견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가능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현실화되진 않는다. 그리고 도덕성은 인간 본질의 현실화 과정이다.
지금 어떻게 오직 가능적인 이 본질이 현실화되는 것인가? 도덕성에 의하여 그러한가. 도덕성에 의하여 현실화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목적을 향하여 취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은 실존하는 인간에게 목적으로 취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방식에서 행하는 것이다. 즉 본질로부터 도덕성을 취하는 것이다. 지금 목적으로 취해지는 본질은 가치이다. 세계에 관한 도덕적 시야는 본질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질이란 단지 가능적인 것이며, 그것은 본질을 구현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다. 이는 본질이 목적으로 취해지는 것인 한에서 행해져 진다. 그리고 가치란 본질의 구현을 확실하게 한다. 이것은 나 자신이 도덕이라 보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윤리적 세계에서 우린 그러한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윤리학 가운데 우리에게 말 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다. 여기 다른 관점이 있다. 스피노자는 빈번하게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본질은 결코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항상 단일한 규정이다. 이 인간과 그 인간의 본질이 있을 뿐이며, 인간의 본질은 존재하질 않는다. 그는 그 형태에 관한 일반적 본질 혹은 추상적 본질이 인간의 본질이며, 이는 혼돈 된 관념이라고 말한다. 윤리학에서 일반적 관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 그대가 있고, 이 하나가 있고, 그 하나가 있고, 그 특수자가 있다. 본질이란 말은 유사하게 그 의미가 변화한 것이다. 그가 본질에 관하여 말 할 때, 그가 흥미 있던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가 흥미 있던 것은 실존이며 실존하는 것이다.
다른 말해서, 오직 실존의 수준에서 존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며, 본질의 수준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수준에서 이미 스피노자 가운데 실존주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이 문제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는 단지 가능성으로 있는 그리고 구현되는 것으로 지시되어지는 도덕성과 같은 인간 본질에 관한 의문은 없다. 스피노자 가운데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윤리학에 관하여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그가 하나 가운데 두 가지를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가운데 윤리학은 인식할 것이다. 그는 그것들의 단수성 가운데 실존하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어떤 때 그는 당신에게 실존하는 것 사이 구분, 실존 가운데 양적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존하는 것은 그것들이 더와 덜에 의하여 고려되는 양적 스케일의 종류에서 고려되어질 수 있다. 더와 덜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전적으로 여러 개에 공통된 어떤 본질은 없다. 그러나 실존하는 것 가운데 더와 덜의 양적 구분이 있고, 그것은 윤리학이다.
게다가, 윤리학에 관한 동일한 논의가 실존의 양태 가운데 질적 대립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행되어진다. 다른 말에 하면, 윤리학의 두 가지 기준은 실존하는 의 양적 구분과 실존하는 양태의 질적 대립, 실존하는 것의 양태의 질적 분극화이며, 이는 그 안에 존재 가운데 실존하는 것의 두 방식이다.
윤리학과 존재론의 연결이 있게 되어진다. 실존하는 것 혹은 존재자는 동시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실존의 양태의 질적 대립의 관점과 실존하는 것의 양적 스케일의 관점에서 존재 가운데 있다. 이는 전적으로 내재성의 세계이다. 왜인가?
내재성의 세계가 있다. 왜인가. 당신은 내가 그것을 정의하는 것과 같이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부터 구분되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란 고유하게 구현되는 본질과 본질의 구현 사이 장력(tension)의 종류이다.
나는 가치가 정확하게 목적으로 취해지는 본질이라고 본다.
그것은 도덕적 세계이다. 도덕적 세계의 완성은 사실 칸트 가운데 이야기될 수 있다. 즉 인간 본질이 순수한 행위 가운데 목적으로 취해진다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윤리학이란 전적으로 그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다른 두 세계이다. 스피노자가 다른 이에게 이야기한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없단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모든 것을 보는 문제가 있다. 도덕성 가운데 당신은 항상 아래의 행위를 행한다. 당신은 어떤 것을 행한다. 당신은 어떤 것을 말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판단한다. 그것은 판단의 체계이다. 도덕성은 판단의 체계이다. 두 가지 판단 가운데 당신은 당신 자신은 판단한다. 그리고 당신은 판단된다. 도덕성을 위한 취향을 가지는 이들은 판단을 위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다. 항상 판단이란 존재를 초월한 권위를 가진다. 그것은 항상 존재론을 초월한 어떤 것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보다 더 하나인 것을 포함하며, 이는 존재를 취하며 행위를 취하는 선이다. 그것은 존재를 초월한 선이며, 하나이다. 가치는 존재를 초월한 권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가치는 판단 체계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또한 당신은 항상 판단을 위하여 존재를 초월한 이 권위를 지시할 것이다.
윤리학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있다. 당신은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에서 당신은 이야기한다.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 당신은 오직 당신이 열망하는 것을 가진다고 말이다. 어떤 이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행한다. 당신은 가치와 그것을 연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에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어떻게 이것이 내적 방식에서 가능한가? 다른 말로, 당신은 그것이 포함하는 실존의 양태와 사물 그리고 진술을 관계 짓는다. 그것은 그 자체 가운데 감추어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것이 있어야만 하는가? 존재의 어떤 방식을 포함하는가? 당신은 실존의 감추어진 양태를 향한다. 그리고 이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내재성의 작용이다..
윤리학의 관점에서 그 가운데 무엇이 당신은 가능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의 외침으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는 결코 우리가 작용되어진 것을 알지 못하며, 실존의 양태가 그 가운데 어떻게 숨겨졌는지 알지 못한다.
나의 가정은 윤리학에 관한 담론이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자가 더와 덜의 양적 구분을 가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게다가 그것은 우리에게 실존의 양태가 질적 양극단을 가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존의, 두 가지 큰 양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이게 당신과 나, 두 인격, 인간과 짐승, 짐승과 사물 사이 인성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단지 양적 구분이 있다고 가정되어질 때, 성질이란 무엇을 포함하는가? 우리에게 우리의 단수자의 가장 심원한 것이 어떤 양적인 것이라고 제안될 때, 실재적으로 의미되는 것은 무엇인가? 피히테와 셀링은 우리가 양적 개체화란 이름 가운데 다루는 개별화에 대한 흥미있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만일 사물이 양적으로 개별화된다면, 우리는 막연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무엇이 양인가? 각각이 그것으로 해할 수 있는 사람과 사물과 짐승과 그 외 어떤 것을 정의하는 재료이다.
사람과 사물과 짐승은 그것이 행하는 것에 의하여 구분된다. 즉 그것들은 동일한 것을 행하지않는다. 내가 행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도덕주의자는 결코 그가 행할 수 있는 것으로 그를 정의하지않을 것이다. 도덕주의자는 그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가 그것에 의하여 바르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덕주의자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다. 그것이 본질이다. 스피노자는 결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이 그로 인하여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몸과 맘이다. 만일 내가 이성적인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지만,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비합리적이기에 변화한다. 미쳤다는 것은 인간 능력의 한 부분이다. 짐승의 수준에서 분명하게 우리는 그 문제를 본다. 만일 당신이 자연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취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 그 근거를 가진다. 그것은 동물이 그것에 의하여 존재하는 동물을 정의한다. 이러한 근본적 야심 가운데 어떤 이는 동물이 그 가운데 존재하는 문제가 있다. 척추동물은 무엇인가. 물고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역사는 본질에 관한 이러한 연구로 가득하다. 동물을 분류하는 것이라 불리는 것 가운데 어떤 이는 가능할 때라면 그 본질에 의하여, 즉 무엇임에 의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동물을 정의할 것이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이 그리고 나아가려는 그러한 부류의 인간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사물 혹은 동물이 그 가운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흥미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물의 능력의 목록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이것들은 날 수 있고 이것은 잔디를 먹을 수 있고, 다른 것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영양섭취의 영역, 당신이 그것은 실존의 양상에 관한 것이라 느낀다. 무생물 역시 그렇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이아몬드.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가운데 실험하는 것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무엇을 지지하는가. 그것은 무엇을 하는가. 낙타는 물을 마시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여행할 수 있다. 그것은 낙타의 수난이다. 우리는 그것에 의하여 그것들이 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그것은 실험의 형태를 털어놓는다. 그것은 실재에 관한 전체적 탐구이며, 이는 본질 없이 어떤 것을 행하지 않는다. 능력( pouvoir)의 작은 다발로 사물들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 가운데 사람들이 무엇을 행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을 만들고자 한다.
윤리학의 관점에서 모든 실존하는 것, 모든 존재자는 능력( puissance)의 그것인 질적 스케일과 연관되었다. 윤리적 논의는 우리가 본질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제거한다. 그것은 본질 가운데 믿지 않는다. 그것은 능력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할 뿐이다. 즉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행할 수 있는 능동과 수동에 관하여 말한다. 사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지만 행할 수 있고 지지하는 가운데 능력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만일 일반적 본질이 없다면, 능력의 수준에서 모든 것은 개별자일 뿐이다. 우리는 비록 본질이 우리에게 사물들의 집합에 무엇인지 말한다고 하여도 그 도래를 알지 못한다. 윤리학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알 수 없다. 어떤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가 할 수 있는 무엇을 할 수 없다. 실존하는 것에 의하여 능력의 양의 무한한 차이가 거기에 있다. 사물은 양적 구분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능력의 스케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이후 니체가 능력에 대한 의지의 개념을 잘 내세웠다. 나는 그가 이것을 이야기하며 의도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것에 의하여 우리 각각이 능력을 향할 수 있는 작용이 있다고 믿던지 간에 니체 가운데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능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에 의하면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능력 혹은 저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양적 스케일 가운데 나에게 놓여진 것이다. 의지의 대상이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가 가진 능력에 의하여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한다. 능력에 대한 의지는 당신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작용 능력에 의하여 사물, 인간, 동물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시, 의문이 있다. 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은 당신의 본질에 의하여 무엇을 수 있는가라는 도덕적 의문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즉, 당신은 당신의 능력에 의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당신은 존재의 양적 스케일을 구성하는 능력을 가진다. 그것은 능력의 성질이며, 이는 다른 존재하는 것과 하나의 존재하는 것을 구분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스피노자는 매우 빈번하게 본질은 능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만듬의 과정 가운데 있는 철학 여행권을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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