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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중세철학문헌

중세 논리학의 저작 읽기

토마스 철학 학교 중세 문헌 연구 1.

 

중세 논리학 읽기

유대칠 옮김

 

 여기에 적힌 글은 중세 논리학을 공부하고자 하여 내가 2000년도 가을에서 시작하여 2003년 여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읽은 것 가운데 다행히 노트로 남아있는 것의 일부이다. 오랜 과거 중세 서구의 그리스도교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언어에 관한 다양한 논의와 현대 논리학의 발전만큼이나 의미 깊은 다양한 논리학적 성과물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옥캄이나 둔스 스코투스가 그러하고 뷔리당이나 홀코트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많은 수사본이나 익명의 저자들도 그러하다. 다행히 De Rijk이 내어놓은 Logica Modernorum(1967)은 우리의 시야를 더욱 더 열어주었다. 이 옮긴 글은 다른 이들이 읽으라 처음에 준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방 속 자료실에 나만의 것으로 있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지만, 나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기대하며 이렇게 내어 본다. 그리고 간략하게 나마 중세 논리학의 상을 그릴 수 있는 몇몇 글을 뒤에 붙여 보았다. 부디 혹시나 한 명이라도 있을 독자에겐 좋은 읽을 감이 되었으면 한다. 재미없이 방에서 라틴말이나 혹은 중세 라틴어를 소개하는 고리 타분한 글을 읽는 재미없는 나에게 항시 웃음으로 맞아주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나란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2003년 8월 대구 수성동 침해암에서

 

 


《고대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명제론』(De interpretatione) 1장

16a 우선 명사와 동사를 정의하고, 이후에 부정과 긍정 그리고 명제와 문장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을 설명하도록 하자.
 발화된 단어는 영혼의 영향과 인상의 기호 혹은 상징이다. 쓰여진 단어는 발화된 단어의 기호이다. 쓰여짐처럼 그렇게 발화는 인간 모두에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심적 경향 그 자체는 그 가운데 이들 단어가 우선적으로 기호이며, 이는 인간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대상와 같이 이 가운데 이들 영향들은 재현된 것 혹은 유사상 혹은 모상, 복사들이다. 이러한 관점과 함께 나는 영혼에 관한 논의 가운데 다룬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으로부터 다른 연구를 따른다.
 마음 가운데 사고가 있고, 이는 참과 거짓을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참 혹은 거짓인 이들은 , 그렇게 발화 가운데 있다. 왜냐하면, 참과 거짓은 연결과 분리를 공급한다. 더해진 것이 없는 명사와 동사는 연결과 분리 이외에 사고와 유사한 것이다. 고립된 말로서 '인간' 그리고 '하얀'은 아직 참 혹은 거짓도 아니다. 이것에 관한 논의 가운데 tragelaphos를 고려해 보자. 이는 의미대상을 가지지만, 그러나 이에 관한 참이나 거짓은 없다. 현재 혹은 이와 다른 시제 양자 가운데 '이다' 와 '아니다'에 더해지지 않은 한에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Categoria) 1장

1a 그들이 비록 공통의 이름을 가지고, 이름에 상응하는 정의가 각기 다를 때, 사물은 다의적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실재적 인간과 그림 속의 형태 양자를 동물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다의적으로 불리며,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공통의 이름을 가진다고 해도 이름에 양하는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인간과 그림 가운데 형태 양자의 경우에서 동물이 의미하는 것을 묻는다면, 당신은 양자의 경우에 그 경우에만 적당한 정의를 수여한다.
 다르게 사물은 이름과 정의 양자가 공통의 이름 가운데 대답되어지는 경우 일의적으로 불린다. 한 인간과 한 황소 양자를 동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의적으로 그렇게 불린다. 이름뿐 아니라, 정의에서도 양자는 같은 것을 가지는 한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그들의 양자에 의하여 동물이라는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당신은 양자의 경우에 개별적 이름에게 같은 정의를 부여한다.
 사물은 일부 다른 이름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유래되는 것을 파생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과 다른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문법가는 문법이라는 것에서 그의 이름이 파생된다. 그리고 용기 있는 자는 용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중세 논리학》

익명의 저가 {논리학 : cum sit nortra...}(Logica : cum sit nostra) 발췌

명사(terminus)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를 모든 추론은 문장으로부터 함께 두어진다. 그리고 명사로부터 문장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추론의 인식으로 인하여 처음 장소에서 명사를 아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명사는 두 가지로 알려질 수 있다. 글자와 음절로부터 함께 놓여진 표현에  따른 질료를 통하여 그리고 문법가는 그것들을 만다. 그러므로 혹은 형상에 따라서 그리고 고유한 의미에 따라서 그리고 논리학자는 그들을 안다.
 그들은 어떤 명사는 범주적이고, 어떤 명사는 부수범주적이라 말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범주적인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을 의도한다.
 명사 가운데, 일부는 형용사를 표함하여 주어이고, 일부는 동사이다. 주어 가운데 일부는 형용자이고, 일부는 실명사이다. 실명사 가운데 일부는 공통적이고, 일부는 고유하다. 실명사 가운데 일부는 고유한 명사가 하는 것처럼 단지 지칭하고, 일부는 지칭하고 부른다. 마치 질료 혹은 문장으로 인하여 지칭하는 것이고 성질에 의하여 부르는 일반 명사가 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형용사는 지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성질을 의미하며,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하얀'은 단지 성질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하얀 (것)'은 명사가 아니라는 것이 해결되며, 왜냐하면, 도나투스(Donatus)는 모든 명사는 성실과 함께 문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문장 가운데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성질이다. 그러므로 '하얀 (것)'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명장을 의미하는 것을 이야기함이라 이야기될 것이다. 그러나 고유하게 그렇지는 않다.
 동사는 단지 결합한다.
 그러나 왜냐하면 지칭은 주어의 부분에 있고, 우리는 지칭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지칭에 관하여      

 지칭은 사물에 관한 실명사적 지정이다. 그것은 실명사적 명사의 의미(significatio)이다. 
 그러나 반대에 의하면, '하얀 (것)이 달린다.' 여기에서 '하얀 것'은 지칭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명사적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실명사가 실명사 혹은 실명사를 만드는 모든 것을 위해 취해지는 것이라 이야기되어진다.
 다시, '읽는 것은 동사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읽는 것'은 동사의 구체화이고, 그러므로 실명사의 자리 가운데 있다.
 다시, 지칭은 말함의 주어적인 조각의 의미이다. 말함의 주어적 조각은 말함의 서술어적 조각으로부터 다른 것으로서 취해진다.
 지칭과 의미는 서로 다르다. 지칭하는 것은 그것의 적절한 것 가운데 사물을 취하는 것이다.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설립된 것의 원리적 근거 가운데 사물을 지명하는 것이다. 명사는 지칭한다. 말 가운데 위치되어질 때 말이다. 명사는 말의 위치된 내면 혹은 외부로 자리잡히는지를 의미한다.
 다시, 지칭 가운데 일부는 일의적이고, 일부는 다의적이다. '사람이 달린다'에서처럼 일의적 지칭은 일의적 명사가 지칭할 때, 일의적 지칭이다. '개가 달린다'에서처럼 다의적 명사가 지칭할 때, 다의적 지칭이다.
 일의적 지칭은 그렇게 나누어진다. 일부는 단순 지칭이고 일부는 인칭 지칭이다. 명사가 나타나는 것에 의하여 공통의 형상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일 때, 단순 지칭이 있다. 마치 '인간이 창조물 가운데 가장 위엄있는 창조물이다'에서와 같이 말이다. 일부 하위의 것을 지칭하는 공통 명사일 때, 인칭 지칭이 있으며, 마치 '일간이 달린다'에서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그것 그리고 이것을 지칭한다.
 인칭 지칭은 그렇게 나누어진다. 일부는 공통 지칭이고, 일부는 분리 지칭이다. 공통 명사가 그것이 공통적인 이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에 의하여 주어일 때, 공통 지칭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달린다'처럼 분리된 명사가 주어일 때, 혹은 그 혹은 이것이 달린다와 같이 분리된 명사가 지시 대명사일 때, 분리 지칭이 있다.
 공통 지칭은 그렇게 나누어진다. 일부는 확정된 지칭이고, 일부는 불확정된 지칭이다. '인간은 달린다'에서와 같이 공통 명사는 확정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할 때, 확정 지칭이 있다. '모든 인간은 달린다'에서처럼 몇몇 것을 불확정적으로 공통 명사를 지칭할 때, 불확정적 지칭이 있다. 불확정적 지칭과 혼돈 지칭은 동일한 것이다.
 혼돈 지칭은 그렇게 나누어진다. 일부는 단순 혼돈 지칭이며, 일부는 혼돈 분배 지칭이다.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에서처럼 그 가운데 만들어 질 수 없는 그것의 하위의 것과 내려진 것을 지칭하는 공통 명사일 때, 단순 혼돈 지칭이 있다. 여기에서 '동물'은 순수하게 혼돈된 채로 자리 잡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중재적으로 '모든'이라는 것과 인접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분명하지 않다 ;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 동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의 형태에서 거짓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첫째로 순수하게 혼돈되게 위치하며, 결론적으로 어떤 것임을 지칭한다. 이는 확정적으로 그리고 확실한 이것을 의미하고, 어떤 것은 확실한 이들과 교환되어진다.
 공통 명사는 그 하위 것을 지칭하며, 그러므로 내려진 것은 그 가운데 분리된 명사 가운데 포함되는 어떤 명칭에 그 가운데 만들어 질 때, 혼돈 분배 지칭이 있다. 마치 '모든 인간이 동물이다'라고 이야기되어질 때, '인간'이 혼돈되게 그리고 분배적으로 지칭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모든'이라는 것과 인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양의 전체 주체에 따라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그 인간' 그리고 그렇게 개별자들을 고려한다.
 다시, 지칭 가운데 일부는 이중적이고, 다른 것은 반대되며, 일부는 환유(換喩)적이고, 다른 것은 제유(提喩)적이다. 이중적 지칭은 주어가 쌍을 이룰 때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달린다'에서처럼 말이다. 반대되는 지칭은 공통 명사가 그를 지칭하며, 그에게 이름이 가장 적당한 것일 때이다. 마치 '사도는 바울이 이야기한 이것을 이야기했다'처럼 말이다. 유사하게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을 이야기한다'와 같이 말이다.
 다시, 지칭 가운데 일부는 제유적이고, 일부는 환유적이다. 제유적 지칭은 부분이 전체 혹은 역으로 있는 것을 지칭할 때이다. 마치 '뱃머리는 바다를 향한다'와 같이 말이다. 환유적 지칭은 담는 것이 그의 내용을 지칭할 때이다. 마치 '병을 마신다'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는 병에 담긴 것이다.
 다시, 지칭 가운데 일부는 고유하고 일부는 고유하지 않다. 고유한 지칭은 명사가 그들의 고유한 의미를 지칭할 때이며, 마치 '인간이 달린다'와 같이 말이다. 고유하지 않은 지칭은 명사가 고유하지 않게 지칭할 때이다. 마치, '영국은 싸운다'와 같이 말이다. 그것은 영국의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 지칭은 문법에 속하는 것이다.
 
삭소니의 알베르투스의 {논리학 대전}(Summa Logica) Part 2 ch.1 발췌

1장 : 명사의 지칭에 관하여

 복잡하지 않은 명사에 관한 논의를 가지는 것, 우리는 지금 그러한 명사의 지칭과 속성에 관하여 논의해야한다. 그리고 우선 우리는 명사의 지칭을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 의도하는 지칭은 일부 사물 혹은 사물들을 위한 범주적 명사의 해석 혹은 사용이다. 그리고 아는 명제 가운데 명사가 어떤 것으로 해석되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이 의미에서 말이다. 그것은 그 명제의 서술어는 그 사물을 표시하는 지시 대명사에 관하여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입증되어지는 것으로 지시된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인간이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인간'이라는 명사는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동물'이라는 명사, 그것은 명제 가운데 서술되어지는 것이며, 이는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을 표시하는 지시 대명사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입증되어지는 것으로 지시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서 질문의 명제 가운데 '동물'이라는 명사는 이들과 같은 사물에 의하여 해석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물'이라는 명사는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을 표시하는 지시 대명사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입증되어지는 명제에 의하여 지시되어진다.    
 이로부터 명제 가운데 일어나는 것처럼 명사는 항상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 귀결된다. 왜냐하면, 이는 이 모든 사물을 위해 해석되어지도 않고 이용되어지도 않을 것이다. '하얀 것이 달린다'(album currit), '하얀 것'이라는 명사는 하양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양을 가지는 것을 지칭한다.
 지칭의 한 형태는 단순 지칭이라고 불리어진다. 또 다른 형태는 실질 지칭이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는 인칭 지칭이다. 인칭 지칭은 분리 지칭과 공통 지칭으로 나뉘어진다. 공통 지칭은 확정 지칭과 혼돈 지칭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혼돈 지칭은 그 자체로 순수 혼돈 지칭과 혼돈 분배 지칭으로 나뉘어진다. 마지막으로 혼돈 분배 지칭은 동적 혹은 부동적 혼돈 분배 지칭 양자이다.
 
2장 단순 지칭

 단순 지칭은 문장 가운데 발화된 혹은 쓰여진 명사의 해석이다. 그것에 의하여 그것의 명명(impositio)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않는 심적 지향에 의하여 취해진다. 그리고 나는 발화된 혹은 쓰여진 명사가 단순 지칭을 가질 수 없는 심적 명사를 지시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지 실질 지칭 혹은 인칭 지칭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발화된 혹은 쓰여진 명사가 심적 명사가 단순 지칭을 가질 수 없는 것을 지시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질 지칭 혹은 인칭 지칭은 가진다. 왜냐하면, 만일 마음 외부의 것을 지칭한다면, 그것 가운데 그것은 자연적 기호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그것 하위의 쓰여진 혹은 발화된 명사에 이하여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심적 명사는 인칭 지칭을 가진다. 또한 나는 그것의 명명에 의하여 의미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만일 명사가 의미로 구성되어지는 심적 지향을 지칭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이 지향에 의하여 단순 지칭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칭 지칭을 가진다. 그러한 것은 만일 '일부 성질이 심적 지향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경우이다.
 단순 지칭은 '보편 본성'을 위한 명사의 해석으로서 구성되어지지 않아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며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수의 것에게 재현되어지는 개념 혹은 많은 것과 본성적 유사성인 '보편 본성'이라 표현에 의하여 의미되어지는 것으로 선택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보편 본성은 자리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서 발화된 그리고 쓰여진 명사는 의미 가운데 속하게 된다.
 단순 지칭은 이들 발화 혹은 쓰여진 명제 가운데 주어에 이하여 주어진다. ''인간'은 종이다.', ''동물'은 류이다.' 그리고    
     
            
파울루스 베네투스의 {소(小)논리학}(Logica Parva) 발췌

지칭에 관하여

 지칭은 일부 사물 혹은 사물들을 위한 명제 가운데 명사의 수용이다. 전자의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달린다.' 후자의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달린다.' 처음에는 주어가 일부 사물을 지칭했다. 둘째에는 주어가 일부 사물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는 명제 가운데 이야기하는 것으로 적힌다. 왜냐하면, 명제의 외부에 명사는 지칭하지 않으며, 비록 그것이 잘 의미되어져도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명제 밖에서처럼 명제 가운데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명제 가운데 자리하지 않은 이상 지칭하지 않는다. 지칭은 두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이는 실질 지칭과 인칭 지칭이다. 실질 지칭은 실질 의미대상을 위한 명제 가운데 명사의 수용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명사이다.' '인간'은 그 자체 혹은 '인간'이라는 명사의 실질 의미대상인 것들을 위한 것이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지칭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인칭 지칭은 형식적 의미대상을 위한 명제 가운데 명사의 수용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은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이라는 명사의 형식적 의미대상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의가 지지하는 것, 그것은 명사의 형식적 의미대상과 실질적 의미대상 사이의 차이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야한다. 왜냐하면, 형식적 의미대상은 명사가 의미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같은 대상을 통하여, 그것은 실질적 기호의 더함 없이 긍정적으로 입증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이라는 명사의 형식적 의미대상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실질적 의미대상의 더함 없이 긍정적 명제 가운데 입증되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이다.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플라톤은 인간이다.' 명사의 실질적 의미대상은 명사가 의미하는 것 그것이다. 제아무리 그것을 통하여 명사는 실질적인 것의 명사의 더함 없이 긍정적 명제 가운데 입증되어질 수 없다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명사는 그리고 그 같은 어떤 명사는 '인간'이라는 같은 명사의 실질적 의미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와 유사한 어떤 명사를 의미한다. 제아무리 그것이 실질적인 것의 기호 없이 그러한 대상이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거짓이다. ; ''인간'이라는 명사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이다. : ''인간'이라는 명사는 '인간'이다.' 혹은 이것은 실질적인 것의 기호 가운데 더함 없이 지시 대명사에 의하여 긍정적으로 입증되어질 명사인 것 가운데 있는 명사의 형식적 의미대상인 것을 더 간단하게 이야기되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는 명사의 형식적 의미대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지적함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명사의 실질 의미대상은 실질적인 것의 기호의 중재를 통하지 않은 한에서 긍정적으로 입증되어질 명사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명사는 그 자체의 실질적 의미대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이 아니다. : '이것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명사를 지시하는 동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이다. '이것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명사를 지시하는 동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