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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중세철학문헌

마이모니데스의 창조와 우주 영원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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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모니데스의 {방황하는 이를 위한 안내} 발췌 번역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읽기 전에.

창조의 문제와 신 존재의 문제

 1135년에서 1204년을 살아간 코르도바 출신의 유대 철학자 모세스 벤 마이모니데스(Moses ben Maimonides)는 중세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은 그의 주저인 {방황하는 이를 위한 안내}이다. 이 책은 이슬람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그 자신의 영향력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보여진다.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그의 사상 가운데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논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으로 '우주의 영원성'을 지지하며, 성서는 이와 다르다. 성서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시간 속의 창조'를 주장하였다. 마이모니데스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나름의 길을 찾아 나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성서의 신과 동일한 것으로 부동의 원동자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천체 운동에서는 만족스럽지 않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완벽한 증거를 가지지 못했다. 만일 우주의 영원성이 이성에 의하여 증명된다고 한다면, 이는 성서의 가르침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성서의 내용은 분명하다. 이성에 의하여 논의되어지는 신과 우주의 영원성은 결론적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영원성은 결정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면, 시간 속의 창조하는 성서의 교리도 받아드려질 만 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속의 창조도 우주의 영원성도 모두 증명될 수 없기에 마이모니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자를 선택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논의와도 일치한다.
 이러한 논의를 위하여 마이모니데스는 위와 같이 우주의 창조에 관하여 세 가지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의 존재 증명에도 사용된다. 그가 정리하는 세 가지는 이렇다. 그 가운데 첫째는 율법의 견해로서 전체로서 우주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철학적인 것으로 우주가 제일 질료(prima materia) 혹은 최초의 질료로 인하여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지자자는 플라톤이다. 마지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며, 이것은 전과 후 양자로 인한 우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제일 질료가 영원하다고 한 것을 본다면, 중요한 것은 성서의 것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이성에 의하여 우주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마이모니데스는 제일 질료에 관하여 섬세한 입장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제일 질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마이모니데스는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제일 질료가 난자(ovum)로부터 인간이 나오듯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은 분명하게 무로부터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 질료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간부터 존속했다고 해야한다. 그렇다면, 결국 시간 속의 창조에 관한 이러한 논의가 신의 존재를 요구하기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하여간 마이모니데스는, 후에 토마스가 그러하였듯이, 시간 가운데 우주의 창조를 생각하였으며, 동시에 이성으로는 신의 우주 창조를 설명할 수 없으며, 다만 제일 운동자 혹은 부동의 원동자로서 신의 존재를 논증할 뿐이라 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신의 속성에 관하여 인간은 인식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게 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며 신학을 전개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신학에 적용될 때의 한계와 유용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세계의 영원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신학적으로 잘못일 수 있지만, 그리고 그만으로 시간 속의 창조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익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 속에서 부동의 원동자로서 신을 논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이모니데스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속성을 정확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신에 관한 상에 사로잡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로 신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모니데스의 부정의 길은 토마스의 유비의 길(via analogica)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미묘한 문제를 다루었고, 철학에 관한 흥미로운 태도를 가졌다. 그는 많은 점에서 신학의 시대에서 철학에게 면허장을 주었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2부 - 창조와 우주 영원성에 관하여

16장 마이모니데스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모든 반대자를 거부한다.

 이 장에서 나는 이 물음에 관한 나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에 논증에 의하여 그것을 지지할 것이다. 무타칼리뭄들(Mutakallemin)의 것과 같은 그러한 논증에 의하여가 아니라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無)에서 창조됨을 입증했음을 믿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논증으로서 변증법적 방법을 숙고할 것이다. 그리고 몇몇 명제가 변증법적 논증에 의하여 해결되어진 사실이 결코 그 가운데 나의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그 명제를 용인하라고 나를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의심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근거의 오류를 이해할 때, 명제 그 자체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흔들려진다. 그러므로 공리로서 수용되어지는 검증될 수 없는 명제 혹은 권위에 의해 수용되어지는 문제의 두 반대되는 결론의 하나가 더 나은 것이다. 그 방법, 그로 인하여 이미 나에 의하여 쓰여진 무타칼리뭄들은 무로부터의 창조를(creatio ex nihilo) 해결했었고, 나는 그들의 약점을 폭로했었다. 우주의 영원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근거에 의하면, 나의 견해에 따라 그들은 결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설명하였듯이 강력한 반대들 변할 수 없다. 나는 성서에 가르침으로서 창조의 이론이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보이려고 의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견해를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그 모든 철학적 논증들은 그들을 결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그들을 만드는 약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관점을 향한 논박을 근거 없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방법에 정확성에 관하여 확신을 하였다. 그리고 두 이론 양자를 숙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용인되어지는 것으로서 우주의 영원성과 창조를 말이다. 나는 선지자의 권위에 후자를 수용하며, 그것은 철학적 사색의 연구를 넘어서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믿음은 이 논구에서 보게 될 것과 같이 우주의 영원성 안에 일관된 믿음을 가진다. 내가 우리의 이론의 수용함을 분명히 할 때, 나는 철학적 논증에 의하여 창조에 관한 우리의 이론이 우주의 영원의 그것보다 더 수용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이론이 비판을 만나게 될 것이라도 말이다. 나는 우리 반대자들의 이론의 거부를 위한 강력한 논증을 보일 것이다.
 나는 지금 방법을 설명하면서 그 방법에 의하여 우주의 영원성을 주는 근거를 제거할 수 있다.   

17장 자연의 법칙은 창조된 사물에 적용되지만, 그들을 창조하는 창조적 행위에 제한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비 존재에서 존재에로 나오는 것으로 창조된다. 심지어 사물의 실체가 실존 가운데 있었을 때 그리고 단지 그 형상과 생성과 발전의 과정을 통하여 행해지는 사물 그 자체가 변화하였을 때, 그리고 그의 최종 상태에 도달하였을 때, 지금 가능태에서 현실태에로의 전환의 시작에 가지는 것으로부터 다른 속성을 가진다. 혹은 그 시간 이후에 말이다. 예를 들어, 여전히 배 가운데 포함된 여성의 피 가운데 구성되어지는 인간의 난자와 같이 말이다. 그 본성은 그것이 남성의 씨앗을 만나고 발전되기 시작하는 때, 임신의 순간에 있었던 것과 다르다. 그 순간 가운데 씨앗의 속성은 충분하게 발전했을 때 그의 탄생 이후 살아 있는 존재의 속성과 다르다. 그러므로 사물이 시작되어질 때 그 순간 가운데 사물의 상태가 가지는 그의 발전의 모든 단계를 통하여 통과되어지는 것 이후에 가지는 본성으로부터 추론되어지는 것은 매우 불가능하다. 이 순간 가운데 사물의 상태는 존재했었던 앞선 상태의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 실수를 했다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 그의 속성에 의한 가능적 존재 가운데 사물의 본성을 해결하는 것을 시도했다면, 당신은 거대한 혼돈 가운데 빠질 것이다. 당신은 명확한 진리를 거부할 것이고, 거짓된 견해를 수용할 것이다. 몇 달간 그의 어머니에 의하여 양육되어  결함 없이 태어난 한 인간을 가정해보자. 그런 후에 어머니가 죽었고, 단지 아버지만이 외롭게 섬 가운데 그가 성장하기까지 그를 길렸고. 그는 현명해 졌으며, 그리고 지식을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결코 여자 혹은 어떤 여성적 존재도 본적이 없다고 가정하자. 그는 어떤 사람에게 인간이 어떻게 실존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는 발전하는지 질문했다. 그리고 아래의 답을 얻었다. "인간은 즉 몇몇 형상을 가지는 그 자신의 류의 개별자의 자궁 가운데 그의 실존을 시작한다. 여성의 자궁에서 말이다. 자궁 안에 있는 동안 그는 매우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있으며, 움직이고, 영양을 흡수한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자란다. 그가 발전의 어떤 상태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다. 그런 후에 그는 자궁을 떠나며, 너가 그를 보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장을 계속한다." 그 고아는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이 인격은 움직이고, 그리고 자궁 가운데 자라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그의 입과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가? 그는 어떤 실체를 분비하는가?" 이것에 관한 대답은 이렇다. "아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런 후에 그는 그 인격에 관한 진술을 거부하는 것을 시도할 것이고, 그들의 불가능성을 해결함을 시도할 것이며, 충분히 발전한 인격의 속성에 의하여 언급함에 의하여 말이다. 아래의 형식에 따라서 말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짧은 시간 호흡을 하지 못하게 할 때, 그는 죽는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달 동안 몸 가운데 가방 안에 포함시킨 우리 가운데 어떤 이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생명이 남아이겠는가 그리고 움직일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이가 살아있는 새를 들이킨다면, 새가 위에 도착하자말자 새는 즉시 죽을 것이다. 그렇게 북부의 낮은 부분에 다다르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음식도 취하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면, 몇 일 안에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인격이 음식을 취하고 그것을 배설하지 않는다면, 큰 병이나 죽음이 곧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인간이 그 기능 없이 몇 달 동안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우유에 의하여 전체가 인격의 복구 가운데 형성되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치명적인 것을 해결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아의 탯줄이 열려있음을 믿는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지가 모두 전체이고 완전하다면, 태아가 눈을 뜨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손을 앞으로 펴기 때문이고, 다리를 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의 방식은 인간이 존재 가운데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끈다. 그리고 서술된 방식 가운데 발전된다.
 만일 철학자가 이러한 예를 잘 숙고하였다면, 그리고 이것에 그것을 초래한다면.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 자신 사이에 논의되는 것을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을 찾을 것이다. 모세와 우리의 스승 그리고 아브라함과 우리의 아버지에 의하여 우리는 우주가 창조되었고, 몇몇 방식으로 발전되며, 그리고 그것이 몇몇 질서 명령 가운데 창조됨을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반대한다. 그리고 우주 가운데 사물이 현실 존재 가운데 그리고 충분히 발전되어졌을 때 속성에 관한 그들의 반론을 형성하였다. 우리는 이 속성의 실존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창조의 순간에 사물이 가지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속성 자체가 절대적 비 존재로부터 존재에로 나옴을 주장한다. 그들의 논증은 그러므로 우리 이론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반론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존재의 주어짐으로 사물의 본성이 창조를 해결하였다고 주장하는 이에 반대하는 검증의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견해가 아니다.
 지금 나는 우리의 주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근원적 근거에 관한 서술에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 반대하는 것을 전혀 해결하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절대적 비 존재에서 존재에로 전체 우주를 이끌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상태에로 발전하는 것을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질료(materia prima)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덧없는 존재의 속성을 언급함에 의하여 그는 이 진술을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제일 질료가 창조됨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이려고 시도한다. 그는 옮다. 우리는 제일 질료가 인간이 자궁에서 만들어지듯이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목마름으로 약해지듯이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소멸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무로부터 그것을 창조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창조로 인하여 그것이 그 자신의 속성들을 가진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그 가운데 만들어지며, 다시 그들이 존재하기를 그칠 때, 그것에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형상이 없이 실존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생성과 소멸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그것의 생성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소멸도 유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창조자의 맘에 들어야한다면, 그는 그것을 절대적 무에로 그것을 떨어뜨려야 했다. 같은 것이 운동에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 생성 혹은 소멸에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한 그의 근거의 일부를 세운다. 이것은 정확하다. 만일 우기가 현재에 실존하는 것으로 운동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의 전체성 가운데 그것이 주체라고 상상하지 못한 것이고, 유사하게 생성 소멸하는 개별적 운동처럼 말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회전 운동은 시작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확하다. 현실적 존재 가운데 회전 운동하는 천체를 봄에 의하면, 우리는 회전이 결핍이라는 생각을 수용할 수 없다. 같은 논증이 우리가 모든 현실적 생성을 앞서는 가능성의 상태에 법칙을 고려함으로서 제공되어진다. 모든 것이 또 다른 사물 가운데 근거를 가진다는 이 법칙은 현재에 실존하는 것으로서 우주에 적용된다. 그러나 어떤 것도 우리의 감각에 지각되지 않으며, 우리의 맘 가운데 파악된 것도 사물이 가능성의 상태 가운데 우선적으로 존재해야하는 무로부터 창조된 사물을 해결할 수 없다. 다시, 하늘은 반대자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그것의 정확성을 수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창조가 말 혹은 당나귀의 것과 같이 동일한 방식으로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들을 구성하는 반대되는 요소에 의하여 소멸되어지는 식물이나 동물과 유사한 방식으로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간단하게 충분히 발전하였을 때, 사물의 속성은 그들의 완전성에 이전 사물의 속성이 있었던 것으로서 실마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이 땅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의견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거부하지 않는다. 혹은 어떤 동물의 종이 실존 가운데 있었다고 그리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 가운데 나왔을 때, 전체 우주의 상태는 그들의 존재가 시작되었을 때 동물의 그것과 비교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명백하게 심장은 고환에 앞서며, 정맥은 뼈 이전에 존재 가운데 있었다. 비록 동물이 충분히 발전되었을 때, 부분의 어떤 것도 그의 존재에 본질인 것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 의견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만일 창조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이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말이다. 실재 가운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취해질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이 주제에 관하여 논구해야할 때 보여지듯이 말이다.
 앞서 보여진 것 가운데 놓여진 원리는 잘 이해되어졌다. 그것은 높은 성벽을 율법의 주변에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그의 추종자들은 아마도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우주가 창조되어졌는지 아는 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강한 또 다른 힘, 그것이 어떻게 현재 그의 창조 가운데 행하는지를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의 속성이 현재 존재하는 것처럼 그의 창조를 고려함으로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답한다. 우리의 계획에 의하면 이것을 위하여 필연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를 해결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단지 그 가능성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그것은 우리가 논의하지 못하는 현재 우주의 본성에 근거하는 논증에 의하여 거부되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의 이론의허용성을 세울 때, 우리는 그의 초월성을 보게 될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의 허용성을 해결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우주의 본성으로부터 지지되는 것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이 신에 관하여 형성한 지식에 의존할 뿐이다. 그들의 근거는 세 가지 방법을 포함한다. 그것을 나는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에 관하여 가진 지식에 근거한다. 다음 장에서 나는 이들 논증의 약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