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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하클레이의 헨리 존재의 일의성

하클레이의 헨리의 존재의 일의성에 관하여.<마우어를 길잡이로 잡아 정리>
A.Maurer, "Henry of Harclay's Question on the Univosity of Being" In Being and Knowing (Toronto:PIMS, 1990), 203-228.

유대칠 정리
<토마스철학학교>

 

옥스퍼드의 대학의 신학교수이며, 학장인 하클레이는 스코투스와 옥캄의 사이에 놓은 철학자이다. 그는 1300년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스코투스의 영향 가운데 명제론 주해를 적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곧 독자적인 철학적 면모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가 곧 반-스코투스주의자로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옥캄주의에 완전하게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스코투스주의에서 옥캄주의의 사이에 중요한 연결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옥캄의 편에도 스코투스의 편에도 온전하지 못했지만, 반-스코투스주의이며, 반-옥캄주의였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는 스코투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존재의 일의성에 관한 논의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의 일의성에 관한 논의는 신과 피조물 사이와 실체와 우유 사이의 논의로 구분되어진다. 그는 인간의 인식능력은 단지 하나의 우선되고 적절한 대상을 가진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은 다른 영혼의 능력과 구별되는 그러한 대상이다. 지성 역시 하나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고유한 대상은 아비첸나가 이야기하듯이 존재자(Being)이다. 이는 지성의 우선되고 적절한 하나의 대상이다.
 그런데 지성의 대상인 존재자는 피조물과 창조자의 존재자 모두에 걸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 둘에 관하여 일의적 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은 분명하게 스코투스의 영향력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스코투스는 인간 인식의 고유하고 적절한 대상으로 존재자를 말하며, 이는 창조자와 피조물에 무차별적이라고 한다. 아비첸나 역시 이들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며, 일의성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신과 피조물에 공통된 개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클레이는 그의 입장을 분명히하였다. 모든 이들은 신이 모든 것을 넘어서 있다고 전재한다. 일의성에 반대하는 이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신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단지 그가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간단하게 그는 존재자를 넘어서 있다가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이가 신에 관하여 가지는 공통된 개념이다. 모든 이들은 그가 모든 것을 넘어서 있다는것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증명되어진 것은 실재적으로 이 개념에 상응하는 존재자가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신과 피조물에 공통된 어떤 일의적 개념을 요청하게 된다.
 현명함과 같은 개념은 신과 피조물에 형식적으로 서술되어지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는 다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과 피조물의 현명함이 비교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현명함이 피조물의 것 보다 더 대단하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 1에서 어떤 비교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문헌적 증거로 가져온다. 예를 들어, 목소리의 맑음과 색의 맑음은 비교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러한 것이 다의적이다. 반명 비교가 가능한 모든 것은 일의적인 것이다. 그러면 그가 생각한 유비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하클레이에게 유비란 그저 일의성의 한 종류이다. 그것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유비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신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과 피조물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 동일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사물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서술되어지는 것을 일의적이라고 이애한다. 그러나 하클레이는 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다. 일의성과 유비성이 근본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하클레이뿐 아니라, 옥캄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일의성은 단지 존재자의 등급을 허락하는 것이고, 유비성은 단지 그것의 더 약한 혹은 더 낮은 수준의 형태인 것이다. 그렇게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일의적이다.
 하클레이는 신과 피조물의 일의성뿐 아니라, 실체와 우유의 일의성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그것이 실체인지 우유인지에 대한 앎 없이도 그것이 존재자라는 것은 알 수 있다고 한다. 알-가찰리가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그것이 능동인지 수동인지 아는 것 없이도 그것이 존재자인지 알 수 있다고 하듯이 말ㄷ다. 만일 존재자가 일의적 개념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의적이게 된다. 그리고 그렇다면, 연계사 EST는 다의적이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그 연계사를 가진 모든 명제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하클레이는 이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존재자는 단지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일의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는존재자가 모든 이름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또한 이는 가장 일의적이라고 한다.  이렇게 실체에 대해서도 우유에 대해서는 일의적인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에 대한 존재의 진술이 일의적이라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코투스의 영향력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론적 입장을 구축하여 갔지만, 스코투스주의자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사유공간은 스코투스를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사유공간은 옥캄의 공간에 다다르지만, 그의 공간에 일부가 되기는 거부하였다. 이는 옥캄이 그의 보편자에 관한 이론을 논박한 것으로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외에도 존재자에 대한 견해에서도 하클레이와 옥캄은 서로 구분되어진다. 하클레이는 존재자의 개념은 항상 일의적으로 서술되어지며, 결코 다의적일 수 없다고 한다. 옥캄은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르다. 옥캄은 개념이 일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일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만 엄밀하지 않은 의미에서 존재자의 개념을 일의적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즉 옥캄은 하클레이와 달리 엄밀한 의미에서 개념보다 단어의 수준에서 일의성을 수용한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복잡하다.
 위의 논의를 통하여 하클레이가 생각한 존재자의 일의성에 관한 개괄적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만 줄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