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1 호교 교부의 일반적 특징
호교 교부의 일반적 특징을 정리해보자. 우선 ‘구약 해석’과 그 ‘해석 방법’을 두고 깊이 궁리하였다. 호교 교부의 시대는 아직 지금의 신약 성서의 정경화가 완성되어 확정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논쟁해야 하는 이들은 구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니 호교 교부들이 연구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규명하고 논쟁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성서는 구약뿐 이었다.
호교 교부가 구약을 해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우의적 해석(allegoria)’과 ‘예형론적 해석(tipologia)’이다. ‘우의적 해석’은 이미 유대교에서도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유대교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Φίλων ὁ Ἀλεξανδρεύς, Philo Judaeus, 전 30?~50?)이 활발하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호교 교부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의적 해석’이 유대교로부터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형론적 해석’은 그리스도교만의 것이었다. ‘예형론적 해석’이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등이 신약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을 예시한다거나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해석 방식이다. 호교 교부인 순교자 유스티누스(Ιουστίνος ο Μάρτυρας, Iustinus Martyr, 100?~165?)는 창조 이전 로고스(λόγος)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가 바로 예수이며, 그는 신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임이 모세가 쓴 구약 성서 가운데 명백하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흐름 속에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런 성서 이해가 예형론적 해석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으로 유대교와 자신의 신앙을 구분하고 자신을 향한 유대교와의 논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또 호교 교부는 말 그대로 호교적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변호사였다. 유대교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리스도교의 호교 교부에게 많은 영향을 주웠다. 필로는 성서 해석이란 단순히 그 내용을 해석하여 신도에 전달하기 위함 이상이라고 했다. 성서 해석이란 그 종교의 밖, 이교도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호교 교부는 자신이 성서 해석으로 얻은 걸 바탕으로 자기 종교 밖에서 자기 종교를 향하여 제기되는 오해와 의문에 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호교 교부 당시로 돌아가 적용하면, 그리스도교가 당시 도덕 기준에서 문란하였다는 오해, 로마제국에 이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 방해된다는 오해, 그리고 유대교에서 자신을 향한 종교적 의문과 비판에 답해야 했다. 그게 호교 교부의 일이었고, 어쩌면 성서 해석에 깊이 더한 그들의 속 사정이었을 거다. 바로 이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호교 교부는 그리스도교 밖의 철학을 이해해야 했고, 그것을 응용해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
성서 연구에 집중하고 호교적이란 특징 이외 또 하나의 특징은 헬라스 철학의 활용이다. 당시 헬라스 철학은 지중해 연안 사상적 공용 수단이었다. 헬라스 철학으로 자기 종교를 합리화하여 자기 밖의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 안의 신자에게 자기 교리(敎理, doctrina)를 더욱 합리적으로 교육하였다. 유대교 신학자 필론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호교 교부도 마찬가지다. 호교 교부 중 일부는 자신의 신앙이 ‘참된 철학(vera philosophia)’이라 믿었다. 자신의 신앙이 ‘참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단 말이다. 철학이 깨우치고자 하는 건 진리이고, 참된 진리는 영원한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것이라 확신했고, 예수 그리스도 이전 고대 헬라스 철학은 바로 그 참된 진리의 단편, 예비하는 단계, 씨앗 단계일 뿐이라 봤다. 호교 교부 순교자 유스티아누스도 이런 맥락 속에서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대 헬라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 전 470?~전 399)와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 Heraclitus, 전 535~전 475)를 그리스도교인이라 말한다. 단지 로고스, 즉 진리의 일부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며, 온전한 진리 그 자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봤다. 즉 온전한 진리의 전단계일 뿐, 그들을 그리스도교의 폭 밖으로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호교 교부 일부는 헬라스 철학도 남으로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합리적으로 신자에게 설득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리스도교 밖에서 주어지는 오해에 맞서 답하고 논쟁할 수 있었다. 헬라스 철학을 수용함으로 말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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