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호교 교부
사도 교부 이후, ‘호교 교부(Patres Apologetici, Ἀπολογηταί)’의 시대가 열린다. 그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오는 오해에 대해 정통 이론을 고민하고 변호한 인물들이다. 이제 막 시작했지만, 그리스도교는 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분열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 위기가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us, γνωστικός)’와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 Μοντανισμός)’다. 이와 같은 내적 분열을 막음과 동시에 외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에 대한 오해에 맞서 변론해야 했다. 순교자 유스티노스(Ἰουστῖνος ὁ Μάρτυρ, Iustinus Martyr, 100?~165?),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 ὁ Ἀντιοχεύς, Theophilus Antiochenus, ?~183?), 리옹의 이레네오스(Ειρηναίος Λουγδούνου, Irenaeus, 130?~202?) 등이 바로 이러한 시대 대표 호교 교부다.
사도와 사도 교부 이후 지역 교회가 등장하고 서서히 호교 교부에 의해 각 지역 신학 전통이 마련되어가기도 했다. 로마제국 동쪽 교회는 고대 헬라스 철학의 풍부한 유산을 가진 곳에서 신학 전통을 세워갔다. 그래서 그들의 신학엔 헬라스 철학의 도움이 가득하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Κλήμης ὁ Ἀλεξανδρεύς, Clemens Alexandrinus, 150?~215?)와 오리게네스(Ὠριγένης, Origenes, 185?~254?)의 신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장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쓴 『스트로마테이스(Στρωματεῖς, Stromata)』만 봐도 알 수 있고, 오리게네스의 『원리에 관하여(Περὶ Ἀρχῶν, De Principiis)』와 『켈수스에 맞서(Κατὰ Κέλσου, Contra Celsum)』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또 이들에게 구원이란 영적으로 완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둘은 ‘보편 구원설’을 믿었다. 물론 그 방식과 엄밀함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모든 이의 구원 가능성을 이 둘은 모두 열어두었고, 신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가능하다고 봤다. 마치 플로티노스(Πλωτῖνος, Plotinus, 205?~270?)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하는 건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도 없는 내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하나(ἕν)’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와 유사하다. 엄밀히 존재의 순간부터 어찌 보면 이미 하나와 함께 있지만 이를 깨우치지 못해, 방황하듯이 동방의 교부들은 신에게 나와 신에게 돌아가는 여정에서도 이미 신의 사랑 가운데 하나로 있음을 우리 사람이 깨우치지 못한 것으로 본 듯하다. 그러니 신의 가르침과 교육으로 깨우쳐 온전히 신과 하나가 된다고 봤다. 그리고 신과 하나되는 존재는 정해진 몇몇이 아닌 모두로 보았다. 이런 제국 동쪽 교회와 달리 서쪽은 동쪽의 교회만큼이나 고대 헬라스 철학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당장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40?)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인가?(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 아카데미아와 교회는 무슨 관계이며, 이단자와 그리스도교인은 무슨 관계인가?” 따져 묻는다. 한마디로 헬라스의 철학이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무슨 사이인지 따져 묻는 거다. 이 물음 자체가 그가 고대 헬라스 철학을 향한 부정적인 마음을 확인시켜준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Κυπριανός Καρχηδόνος, 200?~258)는 오리게네스와 클레멘스가 믿었던 보편 구원설을 부정했다. 그는 구원에 있어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록 보편 구원성을 주장한 오리게네스 역시 교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강조와 방식은 키프리아누스와 다르다. 오리게네스는 보편 구원설에 의해 결국 모두가 구원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의 절대적인 사랑, 그 은혜에 강조점이 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이단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가운데 구원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니 그 중요성은 같다고 해도, 그 강도와 방식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키프리아누스의 입장은 “왜냐하면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Quia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라는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국 서쪽 교회는 교회의 위계와 구조에 관하여 고민하였다. 교부이며 동시에 첫 대립교황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Ἱππόλυτος, 170?~235)도 그 시기 서쪽 교회의 특징을 보여 준다. 히폴리투스는 『그리스 사람에 맞서 혹은 우주 원인에 관해 플라톤에 반대하며(πρὸς Ἓλληνας καὶ Πρὸς Πλάτωνα ἥ καὶ περὶ τοῦ παντός, Adversus Graecos, seu contra Platonem de causa universi)』에서 고대 헬라스 철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보였으며, 신학적으로도 『노에투스에 맞서(Κατὰ Νοήτου, Contra Noetum)』와 『모든 이단을 거절함(Φιλοσοφούμενα ἢ κατὰ πασῶν αἱρέσεων ἔλεγχος, Refutatio omnium haeresium)』에서 마찬가지로 자가 신학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교황 갈리스투스 1세(Callistus I, 154?~222)와 대립하여 대립교황으로 있었으며, 이후 교황 폰티아누스(Pontianus, ?~235)와 화해하였고, 둘 다 순교자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대립교황이 되어 교회 분열에 한몫했지만, 신학적으로 이단에 맞선 『모든 이단을 거절함』을 남겼으며, 헬라스 철학의 과도한 영향에 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립 교황이 되는 이유에서도 갈리스투스 1세가 가진 참회와 죄의 용서와 관련된 유연한 태도에 한몫을 했다. 그는 죄의 용서와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 엄격함을 유지하였고, 유연한 태도에 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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