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부의 시대
교부학에서 이야기하는 교부, 즉 연구 대상은 사도 교부 시대에서 7~8세기 대략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교부다. 이를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사도 교부 시대에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 Primum, Πρώτη Σύνοδος της Νίκαιας)’까지다. 둘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부터 451년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 Χαλκηδόνιος Σύνοδος)’까지고, 마지막 셋째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 Secundum, Δεύτερη Σύνοδος της Νίκαιας)’까지다. 사실 325년 ‘제1차 니체아 공의회’,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Primum, Σύνοδος τῆ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431년 ‘에페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 Πρώτη Σύνοδος της Εφέσου)’, 451년 ‘칼케돈 공의회’ 그리고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공의회다. 이 여정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편에선 ‘정통(doctrina orthodoxa)’이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다. 교부란 정통을 다져가던 이들이니 당연히 바로 이 공의회 기간이 곧 교부의 시간이라 할 것이다.
4.1 사도 교부 시대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까지
: 사도 교부의 시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전 그리스도교, 더 엄밀히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Ὁ Κωνσταντῖνος ὁ Μέγας, 272~337)의 313년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 이전 그리스도교는 박해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예수 이후 예수의 제자인 사도를 중심으로 각 지역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도 이후 시간이 시작된다. 바로 ‘주교(Episcopus, ἐπίσκοπος)’의 시간이다. 그리고 교부의 역사에선 사도의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인 ‘사도 교부(Patres Apostolici)’의 시간이다. 바로 사도 베드로의 제자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 Romanus, Κλήμης Ῥώμης, 30?~101)’, 사도 요한의 제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Ignatius Antiochenus, Ἰγνάτιος Ἀντιοχείας, 35?~107?)’와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Polycarpus Smyrnaeus, Πολύκαρπος ὁ Σμυρναῖος, 69~155)’ 등이다.
사도 교부에 주어진 첫 임무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유대교의 아류인가 아니면 유대교와 다른 또 다른 종교인가?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만이 신이 선택한 선민(選民)이라 여겼다. 즉 유대인만이 신의 백성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 무엇인가? 그들은 신의 백성이 아닌가? 사도 교부는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들의 답은 단호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신의 참 백성이라 했다.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이미 예언된 존재이고, 그의 존재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런 그를 따르는 자신이 신의 참된 백성이라 본 거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따르는 자신을 부정하는 유대교는 구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 보았다. 이 논의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임무, 즉 예수는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교부는 교부의 시대 내내 고민하고 고민했다. 사도 교부 역시 마찬가지다. 사도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고난 속 피를 흘렸고,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린 모두 구원의 은총을 얻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되는 건 아니고 회개가 필요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게 필요하다. 이는 그의 『클레멘스의 첫 편지(Κλήμεντος πρὸς Κορινθίους, Epistula prima Clementis)』 8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그리한 것이라 했다. 이는 그의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Ἰγνατίου πρὸς Σμυρναίους)』 7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교부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가운데 있어야 한다면, 이를 위해 ‘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들 성사로 신자는 신의 자녀가 되고 신의 자녀로 신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 세례 없이는 구원을 위한 신의 자녀로의 인호(印號)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그와 관련하여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등이 고민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사도 교부의 시대다.
사도 교부는 이런 고민을 신자에게 교육하고 설득해야 했다. 설득, 이는 이해시킴이다. 그런데 이해는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저 훈계(訓戒)로는 제대로 이해시킬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다. 제대로 된 설득을 위한 가장 탁월한 도구는 헬라스 철학이며, 부분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후 시대 교부에게 더욱 강렬하게 사용되지만, 이미 이 시기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신자를 설득하기 위해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 전승(traditio apostolica)’을 도입한 시기다.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자, 이들 이론 가운데 정통 신앙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게 되었고, 사도 전승은 정통 신앙 혹은 정통 교리의 근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예수 이후 사도가 교회를 세워 이끌고 이후 사도의 뒤를 이은 주교가 교회 공동체를 이끌며, 주교는 정통 신앙의 지키고 신도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게 정통 교리를 가르치고 설득해야 했다. 물론 신도들도 이단이 아닌 주교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다. 주교를 따른다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을 따른다는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정통 교리를 위해 애쓰고 전하는 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된다. 사도 교부는 이를 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신도를 설득함으로 사도 전승이 도입되게 하였다.
이처럼 사도 교부는 서서히 흩어진 신도를 모아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에 헌신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며 교회의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였고 이 고민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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