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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교부

평신도 교부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주님의 기도에 관하여 강론 3> (유대칠의 슬기네집)

Tertulliani

Liber De Oratione

테르툴리아누스

주님의 기도에 관하여

 

테르툴리아누스 씀

유대칠 옮김

 

III. [1]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를 물었던 모세조차도 다른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드님 가운데 드러난 겁니다. 이미 아드님께서 아버지의 새로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기 왔습니다.” (요한의 복음서 5장 43절) 그리고 다시 이르시되, “아버지, 당신의 이름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한의 복음서 12장 28절) 그리고 또 이르시되 “제가 더 분명히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요한의 복음서, 17장 6절)

[2]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잘되기 위해 또 다른 어떤 신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혹은 우리가 바라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마치 고난 받으실 것처럼 우리 사람이 하느님께서 잘 있으시길 바란다면 이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모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게 보편적인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축복으로의 전환이 되기도 합니다.

[3] 더욱이 하느님의 이름이 그 자체로 성스럽고 거룩하지 않은 때가 있습니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은 그분으로 인해 거룩히 되는 겁니다.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이 그분에게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말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사야 6장 3절; 요한의 묵시록 4장 8절) 그러므로 우리도 천사들의 후보가 될 자격이 있다면, 이제부터 여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하늘나라의 그 말과 미래 영광의 직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4] 이제까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청함을 위해 ‘당신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할 때,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가운데 거룩히 되기를 청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이와 동시에 아직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다른 이들 가운데 거룩히 되기를 청하는 겁니다. (이사야 30절 18절) 그리고 이는 ‘모든 이를 위하여’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절), 심지어 ‘우리의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44절) 그러니 말을 마치며 ‘우리 가운데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모두 가운데’라고 말하는 겁니다.

 

유대칠 옮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대략 255년~249년)는 평신도 신학자이며 교부입니다. 그의 주님의 기도에 관한 글을 번역해 봅니다. 라틴어 원문에서 번역하였고 초역이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나 이 번역을 사용하시면 출처를 분명히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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