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철학사'는 몇몇 유명한 철학자에 초점을 맞춘 '철학사'다. 사실 철학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신학사도 그렇다. 그리고 더 심한 경우는 그 몇몇 유명한 철학자만이 마치 그 시대의 거의 유일한 절대 진리를 이야기하는 듯이 서술하고 동시대 다른 철학자는 그와 다르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차별이 녹아든 시선으로 기억되고 스케치된다. 예를 들어, '교부'라면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기억하고 '스콜라철학'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정통이라면 흔히 동서방교회를 기준으로 기억하고 오리엔트 정교회는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의 편에서 들으면 상당히 억울한 내용으로 그들을 기억해도 이를 다시 확인하지 않는다. 그저 '이단'이란 이름 자체가 더는 자세히 기억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적절하다고 영지주의를 가장 탁월한 이론으로 사실 이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라 소리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미 영지주의만을 답으로 정하고 모든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지주의를 하나의 중심에 두어도, 동서방교회를 중심에 두어도, 결국 누군가에겐 억울한 철학사나 신학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의 언어도 막상 그 시대엔 없거나 있었다 해도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당장 '형이상학'이란 말이 그렇고 '존재론'이란 말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하는 일을 형이상학이라 부르지 않았고, 존재론은 근대에 와서야 만들어진 말이다. 즉 윌리엄 오컴의 존재론이란 말을 우린 사용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그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없던 시대의 사상가이니 말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스콜라 철학이란 말은 중세 시대 없었다. 당시 철학은 그저 신학을 위한 도구이거나 예비학이었을 뿐이다. 신학자의 신학함의 수단이란 말이다. 우리가 중세 철학자 혹은 스콜라 철학자라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스스로 신학자라 생각한 이들이다. 우리의 기억과 달리 말이다. 우린 이렇게 영웅 중심으로 기억하면서 그 시절 많은 이들을 억울하게 하거나 몇몇 그때는 있지도 많은 것으로 있는 것으로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억하며 그 시대를 만들어 낸다.
이런 철학사 이외 다른 철학사는 불가능할까? 한 시대, 철학의 다양성과 각 시대마다 달라지는 철학의 개념 규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철학사는 불가능할까? '철학'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 시대마다 철학은 달라진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철학'과 윌리엄 오컴이나 둔스 스코투스가 생각한 '철학' 그리고 데카르트가 생각한 '철학' 또 들뢰즈가 생각한 '철학' 마지막으로 유대칠이 생각한 '철학'은 서로 다르다. 말은 같아서 사실 서로 다르다. 이들 철학이 태어나고 산 공간의 조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고민의 조건이 다르다. 그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철학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전 시대의 철학은 그다음 시대 철학의 원인일 수 있지만, 원인이고자 한 원인이 아니다. 굳이 원인은 그 철학이 살던 그 시대의 조건이다. 그 조건 속에서 기존 철학을 다양하게 변형 하였다. 그러니 기준 철학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원인 같아도 사실 원인은 달라진 조건이다.
조건의 차이에 따라 철학이 다양해진다면, 철학은 다수화되어야만 한다. 여성의 조건, 유럽과 유럽 인근에서 백인이 아닌 이들의 조건 등등이 다르기에 그 다름에 따라 철학이 달라져야 한다. 다수화되어야 한다. 저마다 다른 조건에 따라 다른 지혜가 요구되고 다른 주체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몇몇 유명 철학자 중심의 철학, 그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기억하는 것, 그의 영혼은 자신의 뇌에 주입해 그의 눈으로 그 시대를 보려 하는 것, 이 모두는 당시 다양한 조건에서 다양하게 철학한 다양성에 대한 폭력이다. 그 철학자와 같은 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동일성 중심의 폭력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동일성 중심의 철학은 자기 철학의 탁월성을 과도하게 과장하기 위해 자기 아닌 이들을 '악마화'한다. 자기와 다른 이를 악마화하면 쉽게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악마가 아닌 그 유명 철학자 혹은 철학의 편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체성 확인은 사실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차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며, 동시에 과거 자신이 기억하는 그 타자의 악마화를 통한 기억법으로 타자를 무시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길이다. 악마가 되지 않고 그 시대를 기억하는 철학사는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보이는 그 철학사를 시도해야 하는 지금인 것 같다.
2023년 3월 10일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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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의 시대라니... 이렇게 저를 소개해 봅니다.
저의 책 <신성한 모독자>(추수밭, 2018)은 한겨레 신문 등에 소개되었고, 그 책을 들고 K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은 한겨레 신문, 서울신문, 교수신문 등에 이 책과 관련된 그리고 저의 철학 하는 삶과 관련된 인터뷰 기사가 소개되기도 하였고, 그 이외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많은 신문에서 저의 책 <대한민국철학사>를 소개하였고, 소설가 장정일 작가님의 서평으로 <시사인>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외 2021년 인문사회과학 추천도서에 추천되었고,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 위한 100권의 책' 가운데 인문 분야 20권에 선정되었습니다. 2019년 청주 대성초등학교 학부모 철학 강좌, 2019년 광주 시민자유대학에서 중세철학 강좌를, 2019년 경향신문의 시민대학에서 중세철학을 강의했고, 이후 여전히 중세철학을 연구하며 동시에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을'이란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가톨릭 일꾼'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또 함석헌 철학에 관한 고민을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치열하게 중세 신학과 철학을 그리고 우리 시대를 위한 철학을 위해 애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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