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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아무나 유대칠의 철학 강의록 (2023 03 08) '신'과 '사람', '신학'과 '철학'

철학은 '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모든 철학이 '신'을 이야기한 건 아니다. '신' 자체를 아예 이야기하지 않은 철학도 아주 많다. 그리고 '신'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 내용은 아주 다양했다. '신'은 많은 경우 신은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편에서 가장 이상적인 신의 모습은 죽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늙어가며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지도 않고 죽지 않아야 했다. 즉 '영원'해야 했다. 사람의 이성은 경험을 했거나 교육을 받아야 알게 되지만, 사람의 편에서 신은 그래선 안 되고 경험하지 않고 배우지 않아도 모든 걸 다 알아야 했다. 또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욕심만큼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사람의 편에서 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사람의 편에서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어야 했다. 사람의 이성이란 진리를 찾아 고생해야 하고 신은 그 자신이 있는 그래도 진리이기에 진리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었다. 쉽게 말해 신은 공부 할 필요 없다. 그냥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진리 그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린 우리 자신을 마주하고 돌아보면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몰라서 더 배우고 더 경험해야 하는 데 말이다. 또 사람은 착하게 살기 위해 착함이 무엇이고 좋음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다. 즉 사람은 항상 자기 행위가 착한 것인지 자기가 하는 것이 제대로 좋은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사람의 자유란 어떤 면에서 이미 신의 좋은 것이라거나 착한 것이라고 결정하는 그 법칙을 따를까 말까를 선택하는 자유일 수도 있다. 즉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다. 사람이 원하는 것 모두가 착함이나 좋음은 아니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 다른 이에겐 나쁜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은 이런 존재가 아니다. 신은 어느 것이 착한가 고민하거나 어느 것이 좋은지 궁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하고자 하면 그것이 그냥 착함이고 좋음이다. 예를 들어, 은영에게 "네가 늦게 결혼해서 힘들게 가진 너의 아들을 죽여 나에게 재물로 바쳐라"라고 하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순종함이 곧 착함이고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신이 원하는 바, 즉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영은 신이 명령한 그 신명(神命)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신명이 도덕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어느 것이 좋은 것이고 착한 것인지 궁리하고 살아야 하지만 신은 그가 원하고 그가 명령한 것이 그냥 착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 존재 자체, 즉 신이란 존재 자체가 가장 선하고 즉 착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눈치 따위 필요 없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이 선이고 좋은 거다. 은영이 신에게 자신의 귀한 아들을 죽여 바치고 그 괴로움에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면, 신은 그 고통마저 나쁜 것이라며 자신의 명령대로 잘 순종한 착하고 좋은 삶을 산 은영에게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 할지 모른다. 또 신은 '자존(自存)'한다. 사람은 남의 것으로 산다. 나의 밖 무언가에 의존되어 있다. 생명 자체가 부모의 덕으로 시작되었다. 공기 없이 살 수 없고 물 없이도 살 수 없다. 지구 없이도 살 수 없다. 즉 사람은 그 생명, 그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남에게 의존된 존재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부모 없고 벗이 없고, 물과 공기 그리고 지구가 없는 곳에선 생명 자체가 불가능하니 존재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생각한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은 '자존'이다. 남의 덕 없이 스스로 있는 것 말이다. 신은 그러해야 했다. 그런 신은 남의 덕에 있지 않기에 남의 명령를 따를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이 가장 참되고 좋은 존재이며 자존하는 존재이니 남의 명령이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는 존재다.

 

그런 신, 어쩌면 그 신은 사람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다. 가장 되고 싶은 사람이다. 늙어 죽을 걱정 없는 영원한 존재, 진리를 찾을 필요 없이 스스로 진리이며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착함이고 좋음인 존재, 남의 명령 없이 온전히 스스로 행위하고 존재하는 그런 존재, 이 모든 모습은 결국 죽어야 하고, 경험하고 토론하고 서로 다투며 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 그리고 남의 눈치를 보며 서로에게 좋은 좋음을 궁리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남의 명령과 남과의 공존이 편하지 못은 않지만, 스스로 자존할 수 없기에 남과 살아야만 하는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되고 싶은 모습이란 말이다.

 

그런 신을 따름으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그 모습에 조금씩 다가간다고 생각했다. 비록 신체라는 물리적 제한 속에 존재하는 지금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지만, 신의 명령에 충실하면 신만큼은 아니라도 신의 모습에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은 육체적 유혹에서 벗어난 영원한 존재인 영혼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육체가 즐기는 찰나의 기쁨이나 찰나의 진리가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고 영원한 진리다. 그것을 통하여 육체에서 벗어나 영혼에 집중해 가며 신을 향한 현생의 걸음을 시작한 거다. 육체의 명령에 고개 숙이지 말고 신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설령 그것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믿고 따라야 한다. 신을 향한 걸음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이들에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영의 눈을 가진 이에겐 참되고 올바른 길이라 믿으며 말이다. 비록 신과 같이 자존할 수 없지만 육체의 생명을 위한 건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육체의 기쁨이나 만족을 즐기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의 명령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살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사람, 그렇게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한 이들의 걸음이다.

 

어느 것이 진짜 신을 향한 걸음인지 힘들 때, 사람들은 자신보다 신에게 더 가까운 이를 찾는다. 바로 '종교 전문가'다. 사제, 목사, 무속인, 수도자 등등등 말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몇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처음에는 설교문을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 그 설교문들의 내용들이 하나의 틀 속에서 정리되면서 서서히 '이론'이 되어갔다. 처음엔 자기 삶이나 공동체 삶의 이런저런 문제점을 그들에게 묻고 그들은 그 물음에 신의 명령이나 신의 계시에 근거하여 이렇게 사는 것이 신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라 설교문을 만들다가 이런 구체적인 다수의 사례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 이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때 설교문을 이론서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철학'의 도움을 받는다. 철학의 도움을 받은 이론은 신학이 되고 그 신학은 교리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 그 교리와 그 교리의 전문가이며 교리에 따른 신을 향한 길 안내 전문가가 신의 명령을 민중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영원하고 참되며 선한 자기 존재를 이루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 거다.

 

사람이 이루고 싶은 가장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한 신, 그 신의 속성은 곧 가장 강력한 사람, 즉 권력자의 속성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신의 권능은 권력자의 권능이 되었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권능은 자신이 지배하는 곳에 법을 규정하는 권력자이 권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신의 권능을 대리 집행하는 그 권력자, 이 땅의 권력자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로 다투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존재인 신, 그 신의 대리자로 이 세상에 가장 이상적인 존재인 신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그 권력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두고 다투었단 말이다. 이제 개인은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이 이루고 싶은 가장 이상적 존재인 신에 이를 수 없고, 신의 대리자, 그가 국가 권력자든 종교 권력자든 그의 명령대로 살아가며 이루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바로 이런 틀을 부정하고 등장하는 것이 신비주의다. 신비주의는 이런 종교의 위계적 틀 없이 신과의 하나 됨, 즉 신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보편 이론 속 개체로 나란 존재가 아니라, 신 앞에 나를 이야기한다. 오히려 보편 이론 속 나, 위계 속 나, 이런 복잡한 나를 향한 술어를 모두 버리는 존재론적 가난에서 나는 신 앞에 서고 결국 신의 존재 자체를 경험하는 '나'가 된다. 신을 향한 걸음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단 말이다. 이루고자 하는 이상의 모습을 향한 자기 걸음,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 명령에 의한 걸음이 아닌 자기 처한 상황에서의 자기 결단, 이런 것들이 자신을 '주체'로 만든다.

 

이런저런 주체의 결단은 당시 대학이란 공간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학의 철학은 여전히 신은 절대적 자존이며 스스로 진리이고, 스스로 선함이며, 그런 존재를 향한 위계의 질서 속 순종을 이야기했다. 순종의 밖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없었다. 철학이란 신학의 수단으로만 있었기에 말이다. 오캄의 윌리엄과 단테도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할 수 없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여성들, 성직자가 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삶에게 철학이나 신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깨우침을 이룬 이들, 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철학의 고전에서 철학을 시작하지 않은 그 무지한 이들이다. 라틴어를 알지 못했고,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몽골의 침략을 경험하고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경험했다. 또 오랜 시간 신학과 철학이 이룬 그 보편의 구조가 얼마나 그 고난 앞에서 무력한 지 경험했다. 이제 아픈 이들이 아픔의 주체로 깨우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고난의 주체', '억울함의 주체', '그들의 주체성'이 등장한 거다.

 

2023년 3월 8일

유대칠 강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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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의 시대라니... 이렇게 저를 소개해 봅니다.

저의 책 <신성한 모독자>(추수밭, 2018)은 한겨레 신문 등에 소개되었고, 그 책을 들고 K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은 한겨레 신문, 서울신문, 교수신문 등에 이 책과 관련된 그리고 저의 철학 하는 삶과 관련된 인터뷰 기사가 소개되기도 하였고, 그 이외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많은 신문에서 저의 책 <대한민국철학사>를 소개하였고, 소설가 장정일 작가님의 서평으로 <시사인>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외 2021년 인문사회과학 추천도서에 추천되었고,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 위한 100권의 책' 가운데 인문 분야 20권에 선정되었습니다. 2019년 청주 대성초등학교 학부모 철학 강좌, 2019년 광주 시민자유대학에서 중세철학 강좌를, 2019년 경향신문의 시민대학에서 중세철학을 강의했고, 이후 여전히 중세철학을 연구하며 동시에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을'이란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가톨릭 일꾼'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또 함석헌 철학에 관한 고민을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치열하게 중세 신학과 철학을 그리고 우리 시대를 위한 철학을 위해 애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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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에서 유대칠. 사진 유은결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