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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생존기

철학 1 왜 지금 우린 철학이 필요 없는가?

처음 철학이란 말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한 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다. 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특별히 신앙심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가야 했는데, 그냥 철학과에서 철학 공부를 하고 신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연히 읽은 불교 경전도 매력적이고, 니체나 쇼펜하우어와 같은 이들의 글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에 관한 연구도 하고 싶었다. 하여간 이런저런 종합되지 않는 여러 이유로 나는 철학과에 들어갔다. 철학과는 크게 재미가 없었다. 배우는 것도 재미가 없고 주변 사람들과도 그렇게 친해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내가 철학을 더 진지하게 된 이유인 것 같다. 시간도 돈도 아까운 마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철학의 책들은 정말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그냥 다 읽었다. 칸트의 책이든 헤겔의 책이든 가리지 않고 그냥 막 읽어 갔다. 그러다 마르크스와 영국 경험론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런 고민이 하나둘씩 늘면서 독서는 더 재미있어졌다. 

 
이 사람 저 사람 저마다 철학을 정의하고 철학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맑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철학이 아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도 마르크스의 철학에선 철학이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 혹은 학문도 아닌 것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정의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일구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서로 다른 철학들 사이 철학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냥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건 무엇일까? 그런데 이 조차도 사람마다 다른 서로 답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리고 저마다의 답은 저마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답은 저마다의 그 자리에선 정답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나의 자리에서 철학에 관한 나의 정의를 내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철학은 잘 사는 방법을 궁리함이다. 잘 살기 위해 우선 내가 사는 곳을 알아야했다. 그러니 철학의 시작은 자연철학이었을 거다. 나를 비롯한 내가 사는 바로 이곳, 이곳은 분명 무질서의 공간이 아닌 질서의 공간, 즉 코스모스로의 우주일 것이고, 그 질서에 나 역시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나는 잘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탈레스니 아낙사고라스니 하는 이들이 자연을 두고 그렇게 고민한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우주의 질서, 바로 그 질서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플라톤과 같은 이도 나의 눈엔 어떻게 살아야 잘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다르지 않다. 그의 형이상학도 결국은 잘 살기 위한 고민의 수단이라 생각한다. 싯다르타의 철학이나 공자 그리고 노자의 철학도 나의 눈엔 다르지 않았다. 

 

21세기의 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브뤼노 라투르도 그렇고 도나 헤러웨이도 그렇고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혹은 있어야 잘 살고 잘 있는지 궁리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들 철학자를 아주 자세히 전문가 수준으로 아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아는 한에서 말이다. 이들에 대한 나의 지식이 틀렸다 해도 문제 될 건 아니다. 이들이 무엇이라 하든 나에게 철학은 그러한 거다. 어찌하면 잘 것인가에 관한 궁리함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스스로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궁리함이다. 남의 답을 요약하고 암기하여 그에 따라 사는 게 철학이 아니라, 결국 자기 답을 만들어감이다. 그 답은 자기 아닌 답과의 만남 속에서, 그 더불어 있음 속에서 쉼 없이 진화하며 이루어져 가지만, 만남과 더불어 있음 자체도 자기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철학을 한다는 건, 철학사를 달달 암기함도 아니고, 유명한 강사의 말에 감동함도 아니다. 힘들어도 자신의 답을 가짐이며, 그 답은 매 순간 나를 부수고 나를 새롭게 하는 만남과 더불어 있음을 통하여 진화해야 한다.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한다는 말이다. 독서도 나를 진화하게 한다. 강의도 나를 진화하게 한다.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나의 강의를 들을 이들과의 순간들이 나를 다르게 하고 진화하게 한다. 나를 흐르게 한다. 나를 고여 있지 않게 한다. 

 

종종 남의 답으로 살아감이 좋은 이들이 있다. 유명한 철학자가 자기개발서의 이야기에 빠져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종종 남들이 정한 답을 정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돈이 답이고 권력이 답이고 교리가 말하는 구원이 답이다. 이런 이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남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은 만남, 즉 더불어 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은 철학을 할 수 없다. 종종 신학을 위한 철학이라며 진행되는 철학 수업이 달달 암기 철학사 수업인 경우가 있다. 그들은 사실 철학이 교양이지 삶에 큰 힘이 없다. 교양이란 것이 없어도 그만 아닌가 말이다. 그들도 철학은 없어도 된다. 교리가 답을 알려주는데 왜 철학이 필요한가? 철학사에서 요약정리해 암기한 철학, 그것이 그들의 삶에 무엇인가? 그냥 교양상식 정도다. 몰라도 그만이다. 돈과 권력이 답인 이들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이 답인데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된다.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된다. 철학,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앞을 막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피하거나 부수면 된다. 여기에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겨우 어느 정도 가진 이들의 삶, 그 삶의 여유 속 철학 고전은 소소한 취미 정도가 될 순 있겠다. 

 

철학과가 하나둘 사라진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원래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야하나... 철학을 연구해도 결국은 연구비에 목숨 걸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정해진 답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지금 철학 연구도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오늘 철학 이야기는여기까지다.

 

2022년 12월 13일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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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의 시대라니... 이렇게 저를 소개해 봅니다.

저의 책 <신성한 모독자>(추수밭, 2018)은 한겨레 신문 등에 소개되었고, 그 책을 들고 K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철학사>(이상북스, 2020)은 한겨레 신문, 서울신문, 교수신문 등에 이 책과 관련된 그리고 저의 철학 하는 삶과 관련된 인터뷰 기사가 소개되기도 하였고, 그 이외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많은 신문에서 저의 책 <대한민국철학사>를 소개하였고, 소설가 장정일 작가님의 서평으로 <시사인>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외 2021년 인문사회과학 추천도서에 추천되었고,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청년 위한 100권의 책' 가운데 인문 분야 20권에 선정되었습니다. 2019년 청주 대성초등학교 학부모 철학 강좌, 2019년 광주 시민자유대학에서 중세철학 강좌를, 2019년 경향신문의 시민대학에서 중세철학을 강의했고, 이후 여전히 중세철학을 연구하며 동시에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을'이란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가톨릭 일꾼'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또 함석헌 철학에 관한 고민을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치열하게 중세 신학과 철학을 그리고 우리 시대를 위한 철학을 위해 애쓰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