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원을 그리며 나를 벗어나간다.
모든 이들은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다. 살아있다는 말은 죽을 거란 말이다. 죽었다는 말은 살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이것만큼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진리’다. 이제까지 죽지 않은 생명은 없고, 살지 않았던 죽음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태어났다는 말은 죽어감의 시작이다. 이게 사실이고, 이건 부정한다고 부정되는 게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보다 더 참된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살아있고, 나는 죽을 거다.”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다. 그렇게 나는 사라지고, 그 죽음의 자리에 또 누군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는다. 그렇게 그는 사라지고 또 그 죽음의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 죽는다. 그렇게 원을 드리지만, 나는 그 원의 밖으로 사라진다. 생명과 죽음은 원을 그리며 돌지만 나는 단 한 번 그 원을 그리고 사라지는 ‘찰나의 숨’이다.
매해 가을이 찾아오고 낙엽이 지지만 작년의 낙엽이 올해의 낙엽이 아니듯이, 생명은 계속 태어나고 죽지만, 나의 태어남과 나의 죽음 이전과 이후, 나는 없다. 나의 숨은 지금 바로 이 순간뿐이다.
나는 곧 사라진다.
그렇다고 슬퍼하지 마라. 죽을 존재에게 매번 찾아오는 지금은 즐길 수 있는 마지막일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을 포기하지 마라. 죽어 사라질 존재가 지금을 포기하는 건 살아서도 죽어 있는 거다. 지금을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않은 지금이 모이고 모여 나의 존재를 이루는 층이 된다. 그 층은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주의 기운이 되어 우주의 숨이 되어 영원할 것이다. 오히려 내 작은 숨이 저 큰 우주의 숨이 된단 말이다.
지금을 포기하지 않는 이는 매 순간 자신을 부수며 진화한다. 지금을 포기하는 이는 매 순간 자신을 고정하며 진화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죽어간다. 공룡은 공룡으로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결국 다 죽었다. 그런데 작디작은 공룡은 더는 공룡이 아니라 새로 살겠다며 진화의 길을 갔다. 비록 더는 지구의 제왕도 아니고 때론 작디작은 몸의 약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자신의 존재를 지켜냈다. 이게 생명이다. 더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강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는 지금도 자유로이 하늘을 날며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과연 누가 강자인가? 지금을 포기하지 않는 이는 그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진화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참 기쁨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진화하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진화시키지 못한다. 그저 있으라는 것으로 있으며, 자신을 향한 그 독한 명령에 안주할 뿐이다. 진화의 길에 들어가지 말라는 그 죽음의 명령에 충실할 뿐이다. 나는 무엇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구속하고, 그 무엇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 자기 안에 그 뜨거운 진화의 숨을 죽여가며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역동한다는 바로 그것 아닌가! 역동한다는 것은 변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변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건 매 순간 자신을 그 작은 존재의 공간에 구속하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는 그 무엇을 매 순간 넘어간다는 말이 아닌가! 매 순간 탈옥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길이 길이면 더는 길이 아니다. 이름이 이름이면 더는 이름이 아니다.”
『도덕경』의 말이다. 씨앗이 씨앗으로만 있다면, 그 씨앗은 씨앗이 아니다. 죽은 씨앗이다. 모양은 씨앗이지만 씨앗이 아니다. 정자(精子)가 남성의 몸에서 그저 정자로만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정자가 아니다. 그냥 모양이 정자일 뿐 정자가 아니다. 살아도 죽은 정자다. 씨앗이 자신의 살을 가르고 싹을 낼 때, 씨앗은 생명의 환희 가득한 첫 시작을 하는 것이다. 정자도 다르지 않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자리 그렇게 있는 건 죽은 거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름은 그냥 사람 이름이 아니다. 나는 누구의 애인이라 불리지만 나는 누구의 애인이 아니다. 그런 이름으로 자신을 구속하지 마라. 구속하는 바로 그 순간 ‘애인’은 자기 본질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누구의 애인으로만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존재로 존재하는 게 생명이다. 그게 존재다. 거기 저 큰 나무는 우리에겐 나무이지만, 새에겐 둥지의 자리인 집이고, 어느 벌레와 작은 새들에겐 먹을 것을 주는 존재이며, 어느 존재에겐 그늘을 주는 존재다. 나무의 단단한 뿌리는 산사태를 막은 힘으로 산을 지탱하는 산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저기 저 나무도 이처럼 다양한데, 그 나무를 두고 그냥 새의 집이라고만 규정하거나 그늘을 주는 존재로만 규정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규정인가! 아니다. 그건 나무를 죽이는 규정이다. 그대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다양한 무엇이 모인 하나의 덩어리이고, 그 덩어리 속 다양한 무엇이 진화의 힘으로 앞으로 진화하며 미래 무엇으로 진화할지 모를 그런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다. 그런데 그 가능성의 덩어리는 무엇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혹은 하나의 길로 규정한다면 그건 ‘존재론적 자살’이다.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길에! 자기 자신을 가두지 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진화의 기운을 따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그 파괴된 자신의 과거, 이젠 사라져야 할 그 모든 걸을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거름으로 삼아 앞으로 진화해 가라!
그렇다고 지금 모든 사회적 위치와 관계를 파괴하란 말은 아니다. 철저하게! 누구보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란 말이다. 자기 자신의 숨구멍을 막지 말란 말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 자리를 마련하란 말이다. 그대는 그 자리에서 진정 그대가 되고 진정 그대 존재의 주인이 될 거다. 진짜 자기가 된단 말이다. 그 자리를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살아서 죽어 있지 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대의 숨은 결코 진화의 길을 멈추지 마라! 자기를 파괴하고 나아가는 걸음은 두려움의 걸음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걸음이 큰 만큼 그대 그 숨의 기운이 그대를 더 크게 할 것이다. 그대가 얼마나 위대하고 찬란한 존재인지 느끼게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곧 사라진다. 더는 무서워 산 송장으로 살지 마라. 지금이 바로 그대가 새롭게 시작될 바로 그 시간이다.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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