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7년 파리대학에서의 금지령에 대한 어설픈 단상 1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오캄연구소)
1277년 3월 7일이다. 파리의 주교 스테판 텅피에르는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219년의 명제가 파리대학에서 교육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금지령은 당시까지 대학의 중심에서 대학의 기초 학문을 책임지던 인문학부 교수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제한 조치였다. 사실 인문학부는 문법, 변증술, 수사학, 산술, 기하, 천문 그리고 음악 등의 자유 학예(artes liberals)라 불리는 지식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파리대학을 비롯한 많은 중세 대학의 인문학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롯하여 중세 이슬람 철학의 성과를 제법 자유로이 연구하고 그 결실을 만들어 내던 공간이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중세의 인문학부는 일종의 철학과다.
교회 권력이 파리대학의 인문학 내부의 문제에 개입하려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210년, 1215년 1231년 그리고 1270년의 일들이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 교회는 인문학 내부에서 연구되고 가르쳐지는 것을 통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1277년 텅피에르는 드디어 광범위한 내용의 219개의 명제를 들고와 이를 인문학부에서 교육되고 연구되는 것은 금지한 셈이다.
나는 텅피에르가 들고 온 그 명제들을 번역 소개하려 한다. 이를 통하여 중세 대학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려 한다.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 부터 자유롭고자 한 중세의 대학을 보면서 현재 우리 대학 문화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고민과의 관련이 아니라도 중세 철학과 신학의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나름 좋은 자유가 될 것이라 생각해본다.
들어가는 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1277년의 금지령과 무관하지 않다. 1277년 이전 1130년 경부터 시작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배한 라틴어 번역으로 이미 널리 퍼진 번역사는 서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둘러싼 다양한 고민을 만들어냈다. 지성단일성을 비롯한 여러 고민들은 서유럽 철학계에 새로운 고민의 바람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큰 역할 것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유럽에 유입된 중세 이슬람 철학자들의 철학적 성과물과 그 번역이다.
그 가운데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여겨졌던 신플라톤주의 노선의 소저작인 <원인에 대하여>(Liber de causis)도 있다. 이 저작도 당시 파리대학에서 교육되었다. 이 저작의 내용들도 물론 이후 스테판 텅피에르의 금지령에 포함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의 철학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속에서 주해하던 철학자들 모두가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Andreas Capellanus)의 <사랑에 대하여>(De amore) 역시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에도 인문학부를 중심으로 철학자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펴져갔다. 1277년 이전의 금지는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1130년에서 1277년 거의 130년 동안 금지를 조롱하면서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스는 유럽으로 스며 들며 회귀하였다. 그냥 회귀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주장들은 성서의 진리로 조화될 수 없었다. 당연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 이전의 철학자이며, 신자로 살아간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아니었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기에 그 철학이 온전히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일치한다면 그것이 기이한 일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논리, 그 이성적인 논리를 가지고 신앙의 기적들을 이해하려 하면 당장 여러 가지가 충돌하였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앙의 빛으로 신에 의한 행복을 이야기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는 인간 이성으로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이것도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인간 행위의 목표는 이성적 행복일 수 있으며, 그것은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 가능하다면, 신앙의 행복, 그 구원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위상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뿐인간? 우주 영원성에 대한 것도 충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 이론을 주장한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였다. 그리스도교란 것은 알지도 못한 그런 철학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창조와 같은 시간의 시작이란 없었다. 그의 합리적 구조 속에선 창조와 같은 시간의 시작도 종말의 시간이란 시간의 끝도 없었다. 이렇게 그는 우주 영원성을 주장하는 것이 그의 존재론에 있어 또 그의 합리성에 있어 더욱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개체화의 원리에서 질료를 개체화의 원리로 둠으로 사후 인간 지성의 개체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닸다. 사후 인간 영원이 개별적 영혼으로 남아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없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철학 그 자체로 여겨지며 대학의 지성을 장악해가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 없었다. 비-그리스도교의 이론이 다루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금지령을 내린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시 교회 권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장을 두려완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이유의 전부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의 주도적 역할을 인문학부였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철학의 자발성이다. 철학의 자발성, 철학의 독자적인 진리 획득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정치존재론적 입장이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겐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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