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사전>
허수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허수당 연구원)
들어가는 말.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유학의 빛나는 18현의 한 명으로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형과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모셔진 인물이다. 그는 삶의 태도나 학문에 있어서 조선 선비들의 모범이 된 인물이었다. 또한 정여창은 김굉필과 조광조 그리고 이언적과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의 한 명으로도 불린다. 그가 살아간 조선조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 연산군 시대의 혼란이 그의 삶 동안 있었던 사건들이다. 그는 점필재와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당시 역학에 달인이었던 율정 이관의의 문하에서 역학을 익히기도 하였다. 또한 지리산에 입산하여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을 익혔다. 연산군 4년(1498)년 사초 문제로 야기된 무오사화에 의하여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하고, 정여창은 장형 100대에 9년 동안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 음력 4월 1일 유배지인 종성에서 별세하였으며, 같은 해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 당하였다. 하지만 중종 원년(1506)에 중종이 연산군을 물리치고 등극하여, 김굉필과 조광조 그리고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으로 유생들과 선비들에 의하여 추대되었으며, 이는 후에 이황이 더해져 동방 오현이 된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의 신원이 복원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경영경연감춘추관사’에 봉해졌다.
사상.
그의 성리학적 사고는 그의 저서인 ?리기설?을 통하여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정여창은 주자학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리 없이 기가 있을 수 없으며 기 없이 리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리가 있는 곳에는 기 또한 모이고, 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리가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리라는 것은 개별자마다 차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한정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기는 개별자마다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리와 기가 함께 만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리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라고 정여창은 말한다. 그에게 리와 기는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이황과 같은 이원론의 입장과 정여창의 입장은 달랐다. 차라리 그의 입장은 이후 이이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정여창은 리와 기를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것도 아니며 둘인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묘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특유의 표현은 이이에게 이어져 율곡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조선 성리학의 한 흐름이 된다. 권근과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하여 사고한다. 그렇지만 정여창은 이러한 분리를 회의한다. 이에 의하여, 권근과 이황은 리를 사단과 기를 칠정과 관련하여 사고하였다. 그리고 리와 기가 분리되듯이 이것들도 분리하여 사고하였다. 그렇지만 정여창은 이러한 리와 기의 관계를 의심하였고, 율곡 이이는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계의 논의를 의심한다.
리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리가 없이 기가 모일 수 없으며, 기가 없이 리가 정착할 수 없다. 즉 보편적 원리인 리도 어떤 구체 없이는 정착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것은 리로 인하여 어떤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 둘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리와 기는 서로가 서로를 기다림으로 만물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리기론은 그의 심성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지만, 그 기질로 인하여 선악으로 구별된다고 정여창은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이루는 방법론으로 경(敬)을 중심에 두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정여창은 기보다 리가 한층 높은 가치를 가진다. 왜 정여창은 리 중심의 사고를 하였는가? 그것은 도덕적 실천과 무관하지 않는다. 리를 실천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 기이며, 리가 기질 속으로 떨어져 더려워지지 않도록 인심이 항상 도심을 따르게 하는 것이 수양함의 목적이라고 하는 그에게 리가 기보다 더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정여창의 저서는 그의 생애가 평탄하지 않았듯이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무오사화때 그의 부인이 불 속에 모두 던져 사라진 그의 저서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철학을 온전히 구현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그는 율곡 이이의 철학을 준비한 이이며, 실천 철학자임을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리와 기에 관하여 이황과 같이 이원론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며,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하면서 이 둘의 관계는 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도덕론이나 수양론을 볼 때 그는 주리론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리를 중심으로 경으로 인심이 도심을 따르게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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