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주의 (영 Scholasticism) : 스콜라주의는 1100년에서 1500년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활동한 학자들에 의하여 구성된 비판적 사고 방법이다. 스콜라주의는 처음 초기 유럽 대학들에 있던 그리스도교 수도회 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에 등장한 첫 대학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11세기와 12세기 시작된다. 이들 대학은 인문학, 법학, 의학 그리고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이 당시의 대상으로는 살레르노 대학(University of Salerno), 볼로냐 대학(the University of Bologna) 그리고 파리 대학(the University of Paris) 등이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참된 대학이 언제 시작하였는지 그 확실한 시점을 규정하긴 어렵다. 비록 가톨릭교회와 여러 수도회에 의하여 작성된 당시 유럽의 고등 교육을 위한 studia generalia의 목록이 유용한 자료가 되긴 하지만, 정확한 시점을 규정하긴 쉽지 않다. 스콜라주의는 교실에서 행해진 교육 방식이기도 하며, 이는 곧 글쓰기의 방식과 맥락을 같이 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문헌과 그 문헌의 고민과 관련되어 하나의 주제가 구성되며, 그 주제와 관련된 하나의 의문(quesitio)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가 등장하고, 이 반대에 응답하는 것이 등장한다. 그리고 반대 입장과 이 반대 입장에 대하여 주어진 응답에 대하여 다시금 비판적 사고의 결실이 주어진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그 한 형태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의 방식은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고유한 교육의 방법이 되었다. 또 이는 다른 여타 학문에도 많은 연구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스콜라주의는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과 철학의 조화를 모색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후기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 철학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활용되는 과정에서 스콜라주의는 적절한 기능을 수행했다. 스콜라주의의 대표적 인물로는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아벨라르두스(Peter Abelard), 할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보나벤투라(Bonaventure)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학이란 공간에서 학문을 익히고 구성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모두가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으로 철학을 구성한 인물이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많은 경우 중세 가톨릭 사상가들에 의해서만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후대에 이르러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와 몰리나(Luis de Molina)와 같은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루터회(Lutheran) 소속의 스콜라주의가 있었으며, 그 이외 신교 스콜라주의자들도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카롤링거 왕조의 교육 개혁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낳는다. 피사의 페터(Peter of Pisa)와 요크의 알퀸(Alcuin of York)는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를 도와서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의 주목을 끈다. 샤를대제는 학교(schola)들을 설립한다. 이 학교들로부터 스콜라주의라는 명칭이 나온다. 이 학교로부터 중세 교육의 한 경우가 마련된다. 이 시기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서유럽 전체에선 사려져 있었다. 아일랜드에선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과 사용이 수도회 학교에 널리 퍼져있었다. 아일랜드 학자들은 서유럽 프랑크족의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 가운데 초기 스콜라주의의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5–877)가 있다. 에리우게나는 매우 유능한 학자였다. 그는 그리스어에 익숙했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어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 저작들에 dmlgdu 카파도키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과 그리스어 신학 전통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초기 스콜라주의의 설립자들로는 아벨라르두스와 란프랑크(Archbishop Lanfranc of Canterbury) 그리고 안셀무스가 있다.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어 저작들의 발견, 혹은 재유입이 시작되었다. 이들 그리스어 저작들은 당시 서유럽에선 읽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10세기 초에 스페인의 학자들은 번역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또 12세기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려는 레콘키스타(스페인어: Reconquista, 포르투갈어: Reconquista, 아랍어: الاسترداد 알 이스티라다드) 이후 이 지역의 학자들은 이슬람 철학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랍의 무슬림 학자들에 의하여 마련된 천문학, 수학, 의학, 철학 저작을 손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유입한 중세 무슬림 학자들의 성과는 유럽 학자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한 시기, 유럽에선 롬바르두스(Peter Lombard)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 문헌의 견해와 문장을 모아 『명제집』(Sententiae)을 내어 놓았다. 13세기는 그리스 철학의 재유입과 이에 대한 연구가 주된 흐름이었다. 번역 학교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생겼다. 그리고 결국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바트의 아벨라르두스(Adelard of Bath)와 같은 학자들은 시칠리아와 아랍지방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저작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대한 첫 완전한 라틴어 번역이었다. 강력한 노르만의 왕들은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식을 가진 이들을 이들의 궁정으로 모았다. 모에르베케의 윌리엄(William of Moerbeke)은 많은 그리스 철학 저작들을 13세기 중반에 라틴어로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의 움직임은 그리스 철학에 대하여 당시 서유럽의 학자들이 보다 더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였다. 또 아비첸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 등 중세 이슬람의 무슬림 철학자들의 성과들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의 문헌과 중세 무슬림의 문헌이 각각 그리스어에서 그리고 아랍어와 히브리어 등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의 성과의 거름이 되었다. 대학은 13세기 동안 유럽의 거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경쟁하는 두 수도회가 대학 내부에서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 두 수도회가 바로 ‘도미니코회’(the Dominicans)와 ‘프란치스코회’(the Franciscans)이다.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아시시의 프란치스(Francis of Assisi)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3세기 중엽 그들의 리더는 보나벤투라였다.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신학과 플라톤스러운 철학에 친근한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신플라톤주의에 더 친근했다. 안셀무스와 같이 보나벤투라는 이성은 오직 철학이 종교적 신앙에 의하여 철학에 조명이 주어질 때, 진리를 발견할 뿐이라고 한다. 보나벤투라 이후 대표적 인물인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철학자는 둔스 스코투스와 아우레올리(Peter Auriol) 그리고 오캄 등이 있다. 반대로 도미니코회는 1215년 성 도미니코(St Dominic)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도미니코회의 철학자로는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이들은 ‘친 아리스토텔레스’스럽다. 스페인을 걸쳐 유입된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등에 의하여 주어진 것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신앙’과 새롭게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합리성’이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이성과 논증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저술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활용하여 작업한 첫 철학자들의 하나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용인 신플라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기존의 보나벤투라 등과는 조금 다른 입장과 활용으로 이어졌다. 적극적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무슬림 철학의 활용은 대학 가운데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보다 인문학부 교수들 사이에 더 강화되어 있었다. 인문학부 교수들은 스스로 분명한 신앙인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의 연구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긍정하며 인간 합리성에 충실한 철학적 담론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적 결실은 교회 권력과 충돌하게 되고 1277년의 큰 금지령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시제 브라당(Siger of Brabant)과 다치아의 보에티우스(Boethius of Dacia)와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금지된다. 후기 중세의 이와 같은 다양한 스콜라주의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16세기 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는 다시금 부활한다. 이렇게 다시 등장한 스콜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주류는 1540년 이냐시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가 있다. 당시 활동한 예수회 소속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프란치스코 수아레즈, 가브리엘 바스케스(Gabriel Vásquez) 등이다. 예수회에 이어서 강력한 스콜라주의는 스코투스주의자들(Scotists)이다. 당시의 스코투스주의자는 우선 이탈리아의 안토니우스 트롬베타(Antonius Trombetta), 바르토로메오(Bartolomeo Mastri), 보나벤투라 벨루토(Bonaventura Belluto)가 있고, 프랑스인으로는 프라센(Claude Frassen), 아일렌드인으로는 와딩(Luke Wadding), 존 펀치(John Punch) 그리고 후고 코트웰(Hugh Caughwell), 마지막으로 독일인으로는 베른하르트 산니히(Bernhard Sannig), 크리스퍼(Crescentius Krisper)가 있었다. 세 번째는 토마스주의자들(the Thomists)이다. 도미니코회 소속 학자들과 갈멜수도회 소속 학자이 토마스주의자였다. 이 가운데 바네스(Domingo Báñez), 포인샷(João Poinsot) 그리고 16세기 이후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며,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코임브라의 학자들(Conimbricenses)이 있었다. 또 이러한 노선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사상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아베르사(Raffael Aversa)와 같은 인물들이다. 새롭게 시작된 스콜라주의, 즉 근대의 스콜라주의는 17세기 초반에 활짝 피게 된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이르러 계몽(Enlightenment)이 우선시 되면서 스콜라주의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수아레즈와 같은 이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학들 가운데 스콜라 문화는 다시 생생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19세기 신-스콜라주의의 배경이 된다.
루터회 스콜라주의(Lutheran scholasticism)는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의 스콜라주의다.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활용하였다. 이는 이미 당시 학계에 흔한 일이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구사한 용어는 삼위일체와 여러 신학 담론의 용어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교부 시대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 사상에 깊이 녹아 있었다. 루터회 스콜라주의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이들이 강의를 하거나 글을 적을 때 이미 그들이 선배 수많은 스콜라주의 학자들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 나름의 자리에서 그들 나름의 스콜라주의를 구성하였다. 루터회 스콜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신학적으로 그들과 다른 길을 가는 이들과 대립하고 논쟁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신학적 논리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비록 루터 자신이 그 이전 선배 신학자들의 스콜라주의를 비판하였다고 하지만, 반면 동시대 루터회 학자인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과 같은 이는 이미 루터회 스콜라주의의 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17세기에 이르러 루터회 스콜라주의가 등장한다. 이미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이 문헌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가운데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루터회 소속 신학자들의 논의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수회와 논쟁을 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성과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루터회는 루터의 반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여러 논의에서 선배 스콜라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그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자인 오캄과 가브리엘 비일(Gabriel Biel)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터의 스승인 트루트페터(Jodocus Trutfetter)와 바톨로메우스 아르놀디 폰 우시엔(Bartholomaeus Arnoldi von Usingen) 역시 스콜라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콜라주의가 절대적으로 이성을 중시하고 신앙 이상으로 이성을 높이 본다는 평가는 잘못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오캄도 이성만으로 신으로 인간을 이끈다고 보진 않는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많은 스콜라주의 학자들 역시 인간은 계시에 의하여 신을 보다 더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이성만으로 신을 온전히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스콜라주의자들이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근거한 철학적 흐름이 시작되었고, 이는 파두아(Padua) 대학과 쿠임브라(Coimbra) 대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독일로 16세기 말 경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가톨릭교회를 넘어 결과적으로 인본주의와 연결되는 루터회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 형이상학 체계를 야기한다.
루터회 이외에도 개신교 가운데 스콜라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Reformed scholasticism) 학자들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칼빈(John Calvin)은 체계적으로 신학을 교육받지 못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초기 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같이 그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인본주의들의 영향과 여러 영향으로 그 역시 루터와 같이 스콜라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지금에 와 차근히 분석하면 그가 스콜라주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공된 많은 구분들과 개념을 사용한다고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스콜라주의에 대하여 편향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도 그렇지만 칼빈 역시 그들이 마주하는 스콜라주의는 그들 시대에 마주하는 전문적인 신학자에 의하여 주어진 중세 스콜라 신학 정도일 것이다. 이들이 비록 이성만을 강조하고 이성을 신앙보다 더 우위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어쩌면 인본주의 시대, 인간이 중심인 시대에 대학 공간에 한정된 전문화된 담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을 수 있으며, 그 거부감이 곡해(曲解)를 낳았을지 모른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결실이 설교자와 일반 대중에 의하여 읽혀지고 사용되길 원했다. 그는 순수한 사변적 스콜라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학교 혹은 대학 내부에서 전문적인 신학적 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유용한 것이 되고 활용 접근이 용이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에 발현으로 보인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이미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예를 들어, 버미글리(Vermigli)가 있다. 또 일정 부분 칼빈에게도 보인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항상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예수회 추기경인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와 같은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 학자들로 부터의 신학적 공격은 전통적인 스콜라주의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그리고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와 잔키(Girolamo Zanchi)와 같은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개신교 신학자들은 스콜라주의의 방법론인 의문(quaestio) 방법론을 자신들의 스콜라신학의 수단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개신교 신앙 고백을 엄격하게 풀이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앞서 있었고, 이후 예수회 등에 의하여 이어지며, 동시에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공존하였다. 그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신-스콜라주의가 등장한다. 신-토마스주의가 중심이 되어 등장한다.
유대칠 씀
(토마스철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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