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Renaissance Aristotelianism) : 르네상스 시대는 15세기에서 16세기 동안 일어난 유럽의 문예부흥기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한다. 당시 종교 개혁가인 루터노선의 필립 맬랑히톤(Philipp Melanchthon)과 가톨릭에 새롭게 마련된 예수회(the Jesuits)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대학 교육의 중심에 둔다. 당시 서유럽엔 비잔틴 제국의 소멸 이후 이탈리아 등으로 유입한 많은 비잔틴의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스어와 같은 고전학의 융성하게 된다. 이들 비잔틴 학자들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새로운 장이 마련되게 된다. 이들의 영향에 의하여 그리스어 연구와 교육이 본격화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어 문헌에서 직접 주해하기 시작한다. 또 당시 지식인들은 중세의 것보다 그리스 주해가들을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가 그리스어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단일한 사상의 학파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작에 대한 주해(commentaries)와 병행 문헌(paraphrases) 그리고 본문과 그에 관한 논구들을 매우 넓게 그리고 다양하게 해석하며 읽어간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복원하고자 한다. 다양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알베르투스주의(Albertism), 토마스주의(Thomism), 그리고 스코투스주의(Scotism)와 아베로에스주의(Averroism) 등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부터 새롭게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과 주해의 결과로 아포르디시아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Aphrodisias), 테미티우스(Themistius), 심플리치우스(Simplicius), 필로포누스(John Philoponus) 등의 입장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또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태도는 ‘절충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eclectic Aristotelianism)로 불린다. 이들은 단지 문헌학적 접근으로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접근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지 문헌학적(philological) 분석을 통하여 접근하며, 철학적인 것으로 접근하진 않는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의 장에서 제외되게 하였으나, 이러한 흐름이 주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1.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문헌과 그리스 주해자 비록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여 철학자 그 자체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지만,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도 아니며, 있는 그대로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니었다. 14세기 안토니우스 안드레아스(Antonius Andreas)와 카노니쿠스(John Canonicus) 그리고 마이롱의 프란치스(Francis of Meyronnes)와 같은 철학자 혹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한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비판적 관점을 어느 정도 따랐다. 안드레아스와 카노니쿠스는 그를 ‘최악의 자연 철학자’로 프란치스는 그를 ‘좋지 않은 형이상학자’로 여겼다. 그들의 비판은 베르니아(Nicoletto Vernia)와 니포(Agostino Nifo) 그리고 지마라(Marcantonio Zimara)와 같은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 알려져있었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는 철학과 학문 일반에 대한 영향력은 르네상스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그의 저작과 그에 대한 중세와 고대의 많은 주해가들은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의 논리학과 자연 철학에 대한 조작들은 그전히 인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의 중심이 있었다. 인문학이 당시 의학, 법학, 신학의 기초 과정임을 볼 때, 당시 지식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식은 일종의 상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시학, 정치학은 인문학부 가운데 공적으로 교육되었으며, 연구되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관심이 주어졌지만, 여전히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르네상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황금기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철학자들은 유럽의 주요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 한 교육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렇게 성장한 이들이 교수가 되며 대학의 교육이 이어져갔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주해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 한 주제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예를 들어, 피에트로 폼포나치(Pietro Pomponazzi)의 『영혼 불멸에 관하여』(De immortalitate animae, 1516)가 그렇다. 또 자발레라(Jacopo Zabarella)의 『자연학의 구성에 대하여』(De naturalis scientiae constitutione, 1586년 출판)도 그렇다. 이러한 현상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또 이들은 다른 학자들을 겨냥한 저자 혹은 학자라기보다는 교육 받은 대중을 상대로 글을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꾸준한 주도적 지위는 인문주의자들의 덕이다. 그들의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과 그들이 발견시킨 새로운 문헌 비판의 방식들로 인해 그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그리스어 원문이 출판되었다. 예를 들어, 1495년에서 1498년 사이 아도 마누치오(Aldo Manuzio)에 의하여 그리스러 원문이 출판된다. 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다. 그리스어와 새롭게 번역된 라틴어, 즉 2개국을 병용하여 볼 수 있는 판으로 출판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주해가들의 저작들이 1520년대와 1530년대에 출판되며, 번역되어 소개된다. 1483년 니콜레또 베르니아(Nicoletto Vernia)는 주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저작들을 편집한다. 그뿐 아니라, 중세 스콜라 시기의 주해들, 예를 들어,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도 출판된다. 같은 시기에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본이었다. 의심스롭고 가짜인 것들이 1600년까지 제외되어진다. 또 중세기 동안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시학』이 문학 비평에서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비록 진본은 아니지만, 위-아리스토텔레스의 『기계론』도 큰 관심을 받게 된다. 2. 논리학과 방법론 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분석론 후서』와 『자연학』에 등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론 후서』에서 원인을 통한 논증(propter quid)과 결과를 통한 논증(quia)으로 논증을 구분한다. 전자의 논증은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간다. 반면 후자의 논증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나아가는 귀납적 논증이다. 이러한 논증의 방식은 이미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더 잘 알려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에게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더 잘 알려지고 가지적인 것(intelligible)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일부 사상가들은 이를 겔렌(Galen)의 것과 같이 둔다. 겔렌은 그의 의학에 관한 논의에서 분석(resolution)의 방법를 이야기한다. 이는 대상을 작은 요소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조합(composition)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이는 분석으로 나누어진 요소를 하나 고유한 자리로 돌린다. 이미 중세 후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인 피에르 다바노(Pietro d'Abano (1257-1315))는 그의 저서 『철학자와 특히 의사 사이의 차이를 조정자』(Conciliator differentiarum philosophorum et praecipue medicorum)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논증, 즉 원인을 통한 논증과 결과를 통한 논증을 겔렌의 분석과 조합과 융합시킨다. 논리학에서 옥스퍼드에서 수학(受學)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베네치아의 파울루스(Paul of Venice)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그리고 다시 결과로 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학의 증명은 수학의 확실성과 필연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연학은 증명 학문(demonstrative science)이며, 항상 일어나는 것에 대한 학문이기도 하다. 수학은 자연학과 논증의 방식이 다르다. 그와 동시대 철학자인 시에나의 후고(Hugo of Siena)와 야코포 다 포르리(Jacopo da Forli)는 분석의 방법을 두고 논쟁하였다. 『분석론 후서』를 강의하던 니콜레토 베르니아는 논증은 순환적이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결과를 통한 논증의 방식으로 결과로부터의 논의가 먼저 시작되어야하고, 자연학이 더 완전해지기 위해선 그 다음에 결과에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즉 결과에 대한 분석(resolutio), 즉 감각을 통해 경험된 이후에 본성적인 보편적 지식을 향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원인을 통한 논증은 빠져있다. 베르니아는 지성의 움직임이 결과의 참된 원인을 식별하게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베르니아의 제자인 아고스티노 니포(Agostino Nifo)는 분석 혹은 후행하는(regressus) 방법을 논의한다. 엄밀한 논증이 가능하기 위해 지성의 활동이 결과의 참된 원인을 식별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스승과 같이 인정한다. 그러나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와 테미스티우스 등의 후대 그리스 주해가들의 연구 이후, 그는 지성의 이러한 특별한 활동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학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은 가정의 삼단논법(hypothetical syllogism)과 가정의 논증(hypothetical demonstration)이라고 한다. 학문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동시대 철학자인 지마라(Marcantonio Zimara)와 토미타누스(Bernardinus Tomitanus) 등에게서도 보인다. 그리고 이 논의는 토미타누스의 제자인 자라렐라(Jacopo Zabarella)에게서 종결되어간다. 그는 『후행에 관하여』(De regressu)에서 자연학의 학문적 탐구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한다. 그 가운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겔렌 사이의 근본적인 연결지점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결과를 통한 논증은 우리에게 결과로부터 원인으로의 추론 방법을 제시하지만, 우리에게 결과로 인한 고유한 근거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결과에 대한 가까운 원인에 대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원인을 통한 논증을 줌으로 원인을 충분히 드러내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3. 자연 철학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논의된 이슈 가운데 하나는 르네상스 시기에도 꾸준히 논의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 철학의 대상이다. 과연 자연 철학은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가? 이 논제는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이상학과 자연 철학의 관계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 이외에도 비물질적 피조물인 존재자, 예를 들어, 천사와 같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그 위치가 어떻게 되는가도 논의의 대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 이외의 모든 존재자들은 움직이는 존재자(ens mobile)라고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존재자가 자연 철학의 고유한 대상이라고 한다. 또 그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움직이는 물체(corpus mobile)만이 자연 철학의 고유한 대상이라 안다. 또 이후 베네치아의 파울루스는 자연 철학의 대상을 자연 물체(corpus naturale)라고 했으며, 그의 제자 티에네의 카에타노(Gaetano da Thiene) (1387-1485))는 감각적 실체(substantia sensibilis)가 자연 철학의 고유 대상이라 했다. 이러한 논의는 카에타노의 제자인 니콜레또 베르니아가 자연 철학의 대상은 움직이는 존재자인지의 여부를 다루면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베르니아는 움직이는 존재자가 자연 철학의 고유한 대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아베로에스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세운다. 베르니아의 제자인 아고스티노 니포는 자연 철학의 대상을 그의 『자연학 주해』에서 소개한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개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둘을 화해하여 하나가 되게 하여고 한다. 자발레라는 자연 철학의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남긴다. 그러면서 그는 보편적으로 취해지는 모든 물체들이 자연 철학의 대상이라고 한다. 천상에 물체이건 지상의 자연적 물체이건 모든 자연 철학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뜻이라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에서 대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생명을 가진 동물(corpus animatum)이다. 자연 철학에 있어 또 다른 이슈는 리차드 스윈스헤드(Richard Swineshead)와 14세기 옥스퍼드 사상가(Oxford Calculators)의 도전과 관련된다. 형상의 강화(intension)와 완화(remission), 즉 자연학적 속성과 관련된다. 베네치아의 파울루스는 자연 철학을 하는 이러한 방식을 이탈리아에 도입한 인물이다. 또 자신의 저술과 강의로 이를 더욱 더 자극한다. 마르리아니의 저작이나 사상을 파비아(Pavia)에서 가르쳤다. 베르니아는 스윈스헤드의 주요 저작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사상가들의 입장을 공부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입장이 참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니포는 옥스퍼드 사상가의 입장을 거부한다. 4. 심리 철학 심리학에 대한 논의의 배경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근거하며, 특히 『영혼에 대하여』에 근거한다. 그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영혼은 3 부분으로 구분한다. 성장혼(vegetative)과 감각혼(sensitive) 그리고 이성혼(intellective)이다. 또 이성을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으로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에서 이 두 요소는 능동지성(agent intellect)과 가능지성 혹은 수동지성(possible)으로 불렸다. 이러한 논의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인간 영혼 가운데 이 세 부분은 구분되는가의 문제와 지성과 의지(voluntas)는 구분되는가의 문제 그리고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은 각각 구분되며 인간 존재로와도 구분되는가의 문제 등이 다루어졌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는 신을 능동 지성과 동일시한다. 아비첸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의 능동 지성이 있다고 한다. 각각의 개별자 즉 개인들이 수동적 지성을 가진다고 한다. 아베로에스는 단지 하나의 분리된 지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아베로에스에 영감을 받은 잔던의 요한(John of Jandun)은 만일 감각이 일어난다면 감각의 대상은 능동적 작용(sensus agens)에 의하여 영적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능동적 작용은 내적이며, 각각의 인간 가운데 대수화된다고 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에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와 같은 이들은 그것이 분리된 실체라고 한다. 능동적 작용은 14세기 동안 뷔리당(Buridanus)와 니꼴 오렘(Nicole Oresme), 잉겐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Inghen), 파르마의 타데오(Taddeo of Parma) 등에 의하여 논의되었다. 또 이후에 파르마의 브라시우스(Blasius of Parma)와 베네치아의 파울로스 그리고 티에네의 카에타노 등에 의하여 논의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 문제는 아고스티노 니포와 추기경 카에타노(Cardinal Cajetan), 또 폼포나치, 프란치스코 실베스트리(Francesco Silvestri), 그 이외 예수회 소속 철학자들 등에 의해 논의되었다. 1590년에 출판된 『능동적 작용에 대한 책』(Liber de sensu agente)에서 자발레라는 니포의 이론에 관심을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가지상(intelligible species)의 필요 여부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이미 중세 많은 철학자들이 다룬 문제다. 잔둔의 요한은 아베로에스를 연구하며 자기 입장을 형성한다. 그는 가지상은 가능 지성 혹은 수동 지성 가운데 놓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아베로에스를 두고 일어난 논쟁은 안토니오 트롬베타(Antonio Trombetta (1436-1517))와 마르칸토니오 지마라(Marcantonio Zimara)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또 이들은 아칠리니(Alessandro Achillini (1463-1512))와 니포와 같이 잔둔에 동의한다. 이들은 아베로에스가 가지상을 주장했다는 것을 거부한다. 가지상에 관한 초기 논고에서 폼포나치는 아베로에스는 사실 그러한 상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아칠리니와 니포의 견해를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하여』(De immortalitate animae)와 『지성에 관하여』(De intellectu)에서 읽을 수 있다. 자바렐라는 가지상은 사고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죽음 이후에 남아지 않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회 스콜라 철학자들은 가지상은 사고 행위와 다르며, 그것은 인간 사고를 위해 필요한 유사상(similitudo)라고 한다. 톨레투스(Franciscus Toletus)와 수아레즈(Francisco Suarez)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가지상과 공통 본성에 반대하는 것으로 개별자의 개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성혼과 신체의 관계 문제이다. 이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고, 현대 심리 철학에서도 꾸준히 논의되는 오랜 철학의 화두다. 아베로에스를 해석하며 자기 입장을 만들어가던 이들은 개별적 인간 영혼은 개별적 감각혼과 내적 감각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각각의 개별자마다 수적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반대로 전체 인류는 하나의 지성만을 가진다. 그 지성은 지성혼으로 기능한다. 르네상스 철학자인 베네치아의 파울로스와 아폴리나리스 오프레디(Apollinaris Offredi), 요한네스 아르기로포울로스(Johannes Argyropoulos (c.1415-87)), 아칠리니, 니포, 베르니아, 짐마라(Marcantonio Zimara), 피에트로 트라폴린(Pietro Trapolin(1451-1506)), 마르칸토니오 게누아(Marcantonio Genua (d. 1563)), 자바렐라 등의 철학자들이 아베로에스의 글을 연구하였고, 영혼과 지성에 대한 논의를 궁리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전히 중세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시제 브라방(Siger of Brabant), 잔둔의 요한, 요한 바콩도르트(John Baconthorpe), 에지디우스 등의 철학자들의 글과 입장들도 함께 두고 고민하였다. 그리고 이들 선배들의 입장을 논박하고 동의하며 자기 철학적 입장을 일구어갔다. 이 문제에서 르네상스에서 가장 뚜렷한 성과는 폼포나치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는 초기에 아베로에스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영혼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 여기고 이를 깊이 궁리하였다. 또 후대엔 지성의 단일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는 영혼의 불사 혹은 영원성은 자연 이성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온전히 파악하거나 논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는 하나의 신앙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가 르네상스 철학의 핫이슈였다. 블라시우스는 인간 영혼이 신체로 부터 독립된 작용을 가지지 않는 한에서 인간 영혼이 신체의 죽음 후에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근거가 없다고 논증한다. 그는 파비아의 주교로부터 1396년 비판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입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티에네의 카에타노는 지성 단일성이 사실은 인간 지성에 의하여 논박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부한 요하네스 아르기로포울로스는 개인의 불멸성을 주장한다. 반대로 베르니아는 지성적 혼에 대한 대한 초기 논고에서 아베로에스의 노선을 따른다. 그 가운데 그는 개인 영혼의 불멸성이 논증된다는 것을 거부한다. 베르니아의 제자인 니포는 그의 초기 저작에서 아베로에스는 영혼과 지성 그리고 개인의 불멸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의 가장 정확한 해석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의 불멸성은 논증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니포와 베르니아의 입장은 이후 바뀌게 되며 개인의 불멸성은 논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1481년 테미스티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대하여』에 대한 병행 문헌등이 에르몰라오 바르바로(Ermolao Barbaro)에 의하여 새로운 라틴어 번역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1495년 도나토(Girolamo Donato)에 의하여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의 저작도 새롭게 라틴어로 번역된다. 베르니아와 니포는 이렇게 새로운 번역이 등장하며 새롭게 연구하게 되고, 그 가운데 서서히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베로에스와 멀어지게 된다. 포르지오(Simone Porzio (1496-1554))는 인간의 생성과 소멸은 동물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지성은 신체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다. 또 자바렐라는 인간 영혼은 신체로부터 분리적이고 불사멸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톨레투스와 수아레즈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이성적 논증을 제공한다. 폼포나치는 영혼의 불사 혹은 영원성은 자연 이성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온전히 파악하거나 논증할 수 없다고 한다. 5 형이상학 다양한 형이상학적 주제는 중세 철학 시기에 논쟁되었다. 그리고 그 흥미는 르네상승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에 대한 구분의 문제가 있다. 또한 존재자의 일의성과 유비성의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는 르네상스 철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파올로 바르보 손치나스(Paolo Barbo Soncinas (d. 1494))는 유비성과 본질과 존재의 구분을 논의했다. 또 트롬베타와 오피엘리(Maurice O'Fihely (1463-1514))와 같은 프린치스코 수도회 출신들은 스코투스를 옹호하며 형상적 구분(formal distinction)을 주장하고,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한다. 추기경 카에타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르고자 했다. 아칠리니와 니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옹호한 자벨리(Crisostomo Javelli (1470-1538)) 처럼 초월자(the transcendentals)를 논의하였다. 이러한 논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인간 이성이 신의 권능이 무한함을 증명할 수 있는가를 다루었고, 신과 관련된 인과성을 궁리하였다. 또 이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오랜 시간 논의되었다. (유지승 씀)
<아직 초본이란 많이 부족하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걸쳐 보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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