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테네 사람 소크라테스
생애
소프로니코스와 파이나레데스의 아들 아테네 사람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70년 혹은 그 보다 이르게 태어났다. 헤겔과 같은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석공이라 하지만 현대의 테일러와 버넷과 같은 이는 이를 부인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석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라 여겨지는 작품은 현대의 예술 전문가에 의하여 소크라테스 이전의 것으로 증명되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가 완전히 중무장을 하고 세 번이나 군인으로 봉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른 것인데, 그 시기 이러한 봉사는 자신의 재산으로 행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는 세 번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참가하였으며, 동료의 생명를 구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자세히 적는다면, 그가 참전한 두 번째 전쟁은 뵈오티아의 델리온에 있는 바다와 연결된 요새에서 행해진 것인데, 이 전쟁에서 아테네군은 패전하였으며, 그런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동료인 크세노폰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의 세 번째 전쟁은 암피폴리스에 있었고,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전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또한 공직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시민을 대표하는 평의원을 지냈으며, 10인의 장군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법정에 배석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무척이나 강직하여 참주나 시민의 의사를 여기면서 자신의 뜻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에 많은 지식을 가진 이이기도 하였다. 그는 예술(시나 음악)에 대한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였고, 특히 웅변술에 능한 소피스트인 프로디코스의 강의도 청강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낙사고라스의 후계자인 아르켈라오스에게 청강하였고, 그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그는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생계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전하는 이에 의하면 아테네 사람 크리톤이 그를 돌보아 주였다고 한다. 그는 그 유명한 부인인 ‘크산티페’에게서 램프로클레스를 두었고, 그의 제자이며, 벗인 아리스테스의 딸 ‘미르토’로 부터 소프로니코스와 메넥크네누스를 두었다. 그의 생애 대하여 분명하게 전해는 것은 없으며, 단지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 청년을 타락시키고 신성을 모독하였다는 죄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하다. 그는 돈을 받고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며, 그의 대표적인 제자들은 후에 그의 학파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로는 플라톤과 파이돈 등이 있다.
사상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소피스테스는 상대주의적 사상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보편적인 것의 존재는 거부하였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 소피스테스에 의한 상대주의는 보편적 정의를 인정치 않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는 상대적 정의를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변치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였으며, 이는 특히 자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의 보편자를 추구하였다. 즉 정의가 무엇인지, 용기가 무엇인지 의문하고 탐구할 때, 이 정의와 용기는 개별적 사태가 아니라 모든 정의로운 행위를 그리 있게 하는 그런 보편적인 것이다. 그는 “산파술”이라 불리는 그의 독특한 대화법을 통하여 대화상대자에게서 무지를 이끌어낸다. 이는 대화상대자의 무지를 가지고 조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한 삶을 위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잘못된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보다 오히려 무지함을 깨닫는 사람이 더 나은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이는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오직 선에 대한 올바른 통찰만이 인간을 선에 이르게 한다고 봄으로서 덕은 지식이며, 깨달음이라 한다. 그의 대화는 인간을 잘못된 선에서 참되고 올바른 선으로 인도하는 것을 진정한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그는 윤리적 문제에 중심을 두었으며, 반면 자연계는 등한시하였다. 그리고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 보편자를 추구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에 대한 정의(Definitio)는 그로 인한 것이라 한다.1)
3. 소크라테스 주의자와 소크라테스 학파
소크라테스 주의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일련의 소크라테스 숭배자(verehrer)이며, 저술가로 활동한 이들을 부르는 말마디이다. 이들의 철학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아래 있으며,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에 대한 하나의 상(像)을 제공한다. 그 대표적 인물은 크세노폰(Xenophon)이며, 그 외에도 아이스키네스(Aischines), 파이돈(Phaidon),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등이 있다. 이들은 실제로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나눈 대화를 기초로 하여 나름의 대화편(dialog)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이스키네스의 대화편은 몇 편 전해진다. 그들은 직접적인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에 소크라테스와 같이 덕과 지식에 대한 것을 다루었고 그를 이어갔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승의 이론을 그저 답습에만 머무르지만, 또 다른 일부는 스승을 기초로 하여 발전시켜나간다.
메가라 사람 에우클레이데스(유클레이데스, Eukleidis)의 메가라 학파 그리고 파이돈의 엘리스 학파, 안티스테네스의 퀴니코스 학파 마지막으로 아리스티포스의 퀴레네 학파가 있으며, 이들은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함에 따라 퀴레네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로 이어지고, 퀴니코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로 이어진다.
3.1. 소크라테스의 제자
a. 크세노폰(Xenophon)
Platon과 함께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인 『회상』(Memorabilia)의 저자인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거의 동년배로서 그들의 생애는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의 군인이며 역사가로서, 또한 문장가로서 높이 평가받으며, 철학사가 Diogenes에 따르면 매우 뛰어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좁은 골목길에서 소크라테스와 크세노폰은 처음 만났는데, 소크라테스가 지팡이로 길을 막았다. 그리고는 음식이 어디 파는지를 물었고 크세노폰은 대답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사람은 어디에서 선하고 현명하게 되는지 물었다. 어린 크세노폰은 답을 하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는 어린 크세노폰에게 따라와서 배우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알고 지냈고, 생의 중대사를 그와 의논 할 만큼 그를 믿었다. 그는 후에 스파르타의 편을 들었기에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으나, 그의 공을 인정한 스파르타인들에 의하여 생의 마지막을 저술과 독서로 보내었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 역사』,『아나바시스』,『소크라테스의 회상』(Memorabilia)등이 있으며, 단연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작은 『회상』(memorabilia)이다. 사실 이밖에도 『이코노미스트』,『소크라테스의 변명』,『심포지움』등의 철학적 저술이 있는데, 『이코노미스트』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식으로 가정학에 대한 크세노폰의 이론이 나오며,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심포지움』은 플라톤의 것과 이름이 같으며, 플라톤의 것에 대한 모작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상』인데, 이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지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후 그의 고발내용을 접하고 이 글을 씀으로서 소크라테스가 고발내용의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논하고자 했다. 이런 동기에 쓰여진 『회상』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의 부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그의 행적과 언행을 우리에게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b. 아이스키네스(Arschines)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이스키네스 역시 몇 편의 대화편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순수하 소크라테스적 특징을 가지는 이들 대화편은 7편으로서 Miltiades, Kalllias, Axiochos, Aspasia, Alkibiades, Telauges, Rhinon 등이다. 아이스키네스의 이 대화편들은 특히나 소크라테스적 윤리(에토스 ηθος)의 표현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자신의 대화편인 Kallias에서 프로디코스(Prodikos)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를 비판하며,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그는 프로디코스와 아낙사고라스를 소피스트로 통칭한다,
<아낙사고라스는 소크라테스 주의자에게나 소피스트에게나 같은 기초이다.>
c. 메가라 학파
메가라 학파는 다른 소크라테스 학파인 퀴레나 학파나 퀴니코스 학파가 실천적인 면에 치중한데 반해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그들은 메가라사람 에우클레이데스를 그 시작으로 하는데, 그는 엘레아학파의 일자에 대한 이론과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원리를 기초로 하였다. 이를 기초로 한 이들 학파는 “선을 하나(일자)”라 한다. 이들은 선이 여러 형태를 취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그러한 기초가운데 변증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엘레아학파나 소피스트에 견줄만하다. 하지만 엘레아학파는 존재(esse)에 관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면 메가라학파는 선(bonum)에 관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소피스트는 가치를 유동시킨데 반해 메가라학파는 다시 보편성이란형식으로 고정시켰다.
이런 이들의 주된 과업은 변증법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또한 이들은 매우 뛰어난 고양을 가진 이로써 논쟁 시에는 격정에 휘말리어 험담을 듣기까지 했다.
d.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메가라 사람 에우클레이데스는 그의 조국 메가라(Megara)가 아테네와 대립중인 상황에서 오직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아테네로 여장을 하고 잠입하였다.
그는 일찍이 소크라테스의 초창기 제자가 되었으며,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과 메가라로 피신하였다.
그는 엘레아학파의 하나(일자 εν)에 대한 학설에 익숙했으며,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원리에도 익숙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두 사상을 연결하였고 그리하여 선은 하나(일자 εν)이며, 그것은 많은 이름으로 칭해지지만 또한 시 혹은 이성이라 한다. 그리고 선에 대립되는 것의 존재원리를 부정하였다. 즉 선에 대립되는 것은 비존재자라 했다. 에우클레이데스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엘레아학파의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분명 그는 단지 엘레아학파만은 아니다. 엘레아학파는 그저 존재의 변증법이라면, 그는 선(bonum)을 중시한 변증법자이기 때문이다.
e. 밀레토스 사람 에우블리데스(eublides)
밀레토스 사람인 에우블리데스는 에우클리데스의 제자로서 직접적 후계자이다. 이는 언어를 먹고 개념을 호흡한다고 할 정도로 논쟁가로써 이름이 높았다. 그를 유명케 한 것은 함정추리로써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가 거짓말쟁이로서 또한 거짓을 말하고 있다한다면 너는 거짓을 말하며 동시에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엘렉트라는 그녀의 오라비 오레스테스를 알고 있다. 하지만 엘렉트라는 가면으로 가리워진 오라비를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엘렉트라는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많은 희극을 적었으며, 그리스 최대의 웅변가이며 정치가인 아테네사람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그에게 배웠다고 한다.
f. 이아소스 사람 디오도로스 크로노스(Diodoros kronos)
BC. 300년경 활동한 메가라 학파의 최대 변증론자이다. 그는 이아소스(Iasos)출신이며 아폴로니오스 크로노스(Apollonios Kronos)의 제자이다. 그는 스틸폰(Stilpon)과 함께 메가라 학파의 학설을 극단화하였다. 그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이 주장한 운동부정론을 검토하고 운동과 소멸은 물론이고 가능성의 개념마저 부정했다. 그는 가능성을 현실성과 동일시하였다. 즉 단지 현실성만이 가능하다한다.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실제로 실현되면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전에 가증했었다면, 그 불가능한 것은 가능한 것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에 가능하지 않았으며 단지 실제적인 것만이 가능하다.
g. 메가라 사람 스틸폰(Stilpon)
가장 유명한 논쟁가인 메가라 출신의 스틸폰은 당시에도 무척이나 유명한 모양이다.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그의 논변은 예리하여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리스 전체가 그로 인해 메가라학파로 물들 지경이라 했다. 그는 일원론을 주장하고 이원론을 주장하는 이데아론의 플라톤을 비판하였다. 그는 BC320년경 아테네에서 가르쳤으나 그후 사라졌다. 그는 주로 윤리학에 치중하였으며, 자기 충족성의 논점을 초연(apatheia)의 이론 속에서 다듬었다. 그의 제자로는 스토아 학파의 사람인 제논이 있다.
h. 엘리스-에레트릭 학파
엘리스 사람 파이돈에 의하여 기초가 형성된 학파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파이돈이 스승의 죽음 이후 자신의 조국에 형성한 철학적 학파로서 메가라 학파와는 친근한 성격을 가진다. 그후 시틸폰의 제자, 파이돈의 제자인 에레트리아사람 메네데모스와 아스크레피아데스는 자신의 조국인 에레트리아에 엘리스학파를 전하였다. 파이돈은 변증술을 사용함에 있어 메가라학파와 유사했고, 에레트라아의 메네데모스는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덕과 앎의 일치를 주장했다.
i. 엘리스 사람 파이돈(Phaidon)
엘리스 학파의 창시자인 파이돈은 플라톤의 대화편으로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밤을 엮은 『파이돈』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그의 친구와 함께 에게크라데스에게 전해주는 이 이다. 그의 저서들을 가리켜 겔리우스(Gellius)는 우아한 권고라 한다. 파이돈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은 매우 한정적이고 빈약하다. 티몬(Timon)은 그를 수다쟁이로서 에우클레이데스와 함께 놓여지며, 본질적으로는 변증술가(Dialiktiker)로서 나타냈다.
j. 에레트리아 사람 메네데모스와 아스크레피아데스(Menedemos und asklepiades)
에레트리아 출신인 메네데모스와 그의 친구 아스크레피아데스는 메가라학파의 스티론과 파이돈의 제자 안키퓌로스(anchipylos)와 모스코스(moscos)를 따랐다고 하며 혹자는 우선 플라톤학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플라톤 자체 연대기적으로 볼 때 불가능 할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에레트릭 학파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단지 메네데모스에 대하여 약간의 것으로 그의 철학적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는 강하게 에레트릭적 변증법안에 머물렀으며,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윤리학에 대한 실제적 명제를 내세웠다. 그는 메가라 학파의 사람들과 같이 그도 역시 모든 덕은 하나(일자 ἕν)로서 가치가 있다 했고, 단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질 뿐이라 했다. 왜냐하면 이성적 관점에 따라서 말이다.
k. 퀴니코스 학파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를 창시자로 하는 이 학파는 퀴노사르게스(Kynosarges)라는 이름의 체육관(Gymansium)에서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개와 같은 생활, 즉 비재래적 생활양식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일부분 극단으로 몰고 간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보다 많은 지혜를 위해 세속적 부와 명예에 초연하였다면, 이들은 초연 혹은 자족성 그 자체를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덕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등한시하고 실제적 덕을 수양하는데 집중하였으며, 이들은 덕을 자족이라 한다. 즉 덕은 욕심을 억제하는 실천적 능력이며 무욕(無慾)이다. 욕심, 욕망을 제한할수록 번뇌가 사라진다고 주장하고, 덕은 덕 자체로 최고의 선이라 한다. 또한 그들은 인식에 있어서 소피스트적 감각주의를 받아들인다. 뮈니코스의 이론은 시노페사람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서 확연해지며, 디오게네스의 제자로는 모니모스(monimos), 오네스크리토스(Onesikritos), 필리스코스(Philiskos) 그리고 테베사람 크라테스(Krates)가 있다. 헤겔의 그의 철학사에서 이들 학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재계나 학문을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며, 스토아학파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2)
1.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enes)
아테네 사람인 아버지와 트라키아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테네 사람 안티스테네스는 퀴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순수한 아테네인이 아니라, 트라키아사람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순수 아테네인이 아닌사람을 위한 “퀴노사르게스”라는 곳에서 가르쳤다. 그곳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곳이며, 그리고 퀴니코스주의자들은 헤라클레스를 수호자로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안티스테네스의 작품중 하나는 그 이름을 헤라클레스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한다.
그는 먼저 소피스트의 고르기아스의 제자로 있다가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가르침은 매우 독특하게 소피스트적이며 소크라테스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가진다. 즉 그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것을 연결시킨다. 그 자신의 주된 관심은 변증술과 윤리학에 본질적으로 머물렀다.
윤리학에 있어서 그는 “덕”을 강조한다. 덕이란 세속적인 것에대해 초연해하는 것으로 금욕적 성향을 가졌다. 즉 덕은 욕망의 부재였다. 윤리적 지식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과학적 공부나 기술에 대한 경멸로 바뀌었고, 소크라테스가 더 많은 지혜를 위해 세속적 명예와 부에 대해 가진 초연이 안티스테네스에게는 초연 그 차제가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적 인식이론을 받아들여서 단지 개별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리 말한다.
“오! 플라톤! 내가 보는 것은 한 마리의 말(horse)일뿐 마성(horseness)이 아니네”
헤겔은 안티스테네스를 적어도 퀴니코스학파의 일원중에는 고귀하고 교양을 가진 이라고 한다.3)
2. 시노페 사람 디오게네스(Diogenes)
헤겔의 비평을 참조한다면, 퀴니코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며, 필자 역시 그리 믿는다. 그러나 그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적 원류를 추정해볼수있을게다. 안티스테네스에 이어 살펴볼만한 퀴니코스 학파의 일원은 시노페사람 디오게네스 이다. 그는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의 이론에 근거하여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안티스테네스를 왕의 “개”라고 비난하지만 스스로도 “개”로 불리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 상이했다. 안티스테네스가 왕의 주변을 맴도는 이었다면, 이오게네스는 길거리를 떠돌아다녔기에 얻어진 별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의 거리, 시장을 보금자리로 하고 술통에서 잠을 잤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한 여러 일화가 있다.
그가 아테네에서 지낼 때 아리스티포스(Aristippos)가 권력에 기대에 철학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더러운 발로 플라톤의 거실에 들어가 플라톤의 거만함을 짓밟는다고 했다 한다. 그는 안티스테네스의 물질적 초연함에 만족치 못하고 더 적극적인 금욕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모니모스, 오미시크리토스, 필리스코스, 그리고 테베사람 크라테스가 있으며 크라테스는 많은 재산을 도시에 내어놓고 퀴니코스식의 거지생활―헤겔의 말을 참고한다면, 막대기 하나에 속옷도 없이 너덜너덜한 겉옷만을 입고 동냥보따리에는 물컵과 생필품을 넣어다니는 생활4)―을 따랐으며, 그의 아내 히파르키아(Hipparchia)도 그리했다.
l. 퀴레네 학파
아프리카 퀴레네 사람 아리스팁포스(Aristippos)에 의하여 기초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덕은 행복”이라는 명제에서 쾌락이 선임을 이끌어내고, 선은 쾌락이라 한다. 그리고 행복은 욕망을 충족하는 기쁨이라 한다. 이들은 소피스트적이며 소크라테스적인 가르침을 내포한다. 이들은 감각주의를 근거로 하여 향락(쾌락)주의를 이룬다. 개인의 감각과 감정이 진리의 기준이 외며, 행위의 목적이다. 향락의 대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그로 인해 쾌감의 강도가 문제된다고 주장한다. 쾌락을 선이라 한 점에서 퀴레나의 사상은 퀴니코스와 상당히 구별되지만, 둘 다 개인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철학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1. 퀴레네 사람 아리스팁포스(Aristoppos)
아프라카 퀴레네 출신인 아리스팁포스는 퀴레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을 접하고, 후에 소크라테스와 관계를 가진 듯 하다. 프로타고라스의 가르침은 그가 확실한 지식은 감각뿐 이라 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주관적 감각이 실제 행위의 근거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 행위가 주관적 감각에 기인한다면 당연히 행위의 목적은 좋은 감각 즉 즐거운 감각이라 생각했다. 그의 윤리적 목적은 쾌락이다. 시실 소크라테스는 덕이 행복의 길이라 했지만, 쾌락이 인생의 목표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의 한 부분을 극단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소크라테스의 남은 부분은 무시했다. 그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것과도 구별된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이 정신적이라면, 아리스팁포스는 육체적 쾌락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소크라테스학파중 맨 먼저 수업료를 받았으며, 이렇게 거둔 돈을 소크라테스에게 건네었고, 소크라테스는 거부했다 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중심 원리는 감각이며 이것은 진과 선의 기준이다. 이러한 감각에 대한 이론은 후에 테오도로스와 헤게지아스 및 안니케리스에게 이어지며 학문적으로 발전된다.
2. 테오도로스 아테오스(Theodoros atheos)
그가 유명한 것은 그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기 때문 일게다. 그러나 이는 헤겔의 말처럼 그리 철학적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5) 그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과 슬픔을 궁극 목적으로 규정하여 전자는 오성으로 그리고 후자는 오성의 결핍으로 여긴 것’에 있다. 그에게 단지 느껴지는 대로의 감각이나 순간적 직접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감각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개별적 감각 작용은 일반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적 능력과 정의로서 향락되어질 소재일 뿐이다. 즉 지적 능력과 정의로서 우리는 어디서 만족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3. 헤게시아스(Hegesias)
헤게시아스는 즐거운 개별적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 한다. 그는 삶을 고통스러운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쾌락과 불쾌는 뚜렷한 기준이 없으며 만족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라 하고 만족이라 아무런 의미 내용이 없는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한 행복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삶의 목표를 고통과 슬픔의 부재에 강조점을 두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한 무관심의 상태에 몰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당시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강의를 금지 당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삶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무력해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 한다.
4. 안니케리스(Anniceris)
안니케리스는 적극적인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음으로서, 퀴레네 학파의 적극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안니케리스와 그의 추종자에 이르면서 일상 생활에서 우정이나 고마움, 그리고 효도나 애국심...등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쾌락을 누리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서 안니케리스는 테오도로스와 우정에 대해서 달리 본다. 안니케리스는 우정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테오도로스는 현자는 스스로 자족하기에 친구가 필요 없으며, 고로 우정도 필요 없다 한다.
1) Met. 987b4
2) Hegel, 철학사, 임석진역, 지식 산업사, 624쪽 참조
3) 같은 책, 627
4) 같은 책, 628쪽
5) 같은 책,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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