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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 7권의 ‘ousia’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개체와 보편의 새로운 이해 모색-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 ousia는 무엇인가?1)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난제.
그리스말 ousia는 독일어 sein 혹은 영어의 be에 준하는 그리스말인 einai의 분사에 추상명사를 위한 어미 -ia를 더한 것이다.2) 그리하여 이는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실재로 그리스말 성서에 따르면 이는 ‘있는 것’, 즉 ‘자산’(資産)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3) 성서의 구문 분석에 준하여 볼 때, 라틴어는 ‘자산’(opes) 혹은 ‘가정의 사물’(res familiaris)라고 할 수 있으며, 영어는 ‘재산’(substance, property)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니츠(H.Bonitz)의 ꡔ아리스토텔레스 색인ꡕ(Index Aristotelicus)에서도 가정의 사물, 자산 그리고 재물(res familiaris, opes, divitiae)을 ousia의 우선된 뜻이라 한다.4) 즉,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5) 이와 같은 성서에서 사용되는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ousia는 바로 ‘어느 것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ousia는 단지 누군가에게 있는 그러한 차원의 ‘있는 것’을 넘어서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ousia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주머니에 있는 그러한 것의 ‘있는 것’을 넘어선 ‘어떤 것의 본질의 문제’에로 확장된다. 보니츠는 이미 논의한 곳에서 ousia가 einai와 관련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ousia는 ‘있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6) 그러나 이는 그리 쉽게 다루어 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것은 ousia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매우 난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차차 더욱 더 분명히 소개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길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에 관하여 두 가지 이론을 가진다. 그것은 ꡔ범주론ꡕ(Categoriae)과 ꡔ형이상학ꡕ(Metaphysica)에서 소개되는 두 가지이다. 우선 전기의 것으로 소개되는 ꡔ범주론ꡕ에서 ousia는 ‘제일 ousia’와 ‘제이 ousia’로 나뉘어진다. 제일 ousia는 구체적인 기체(subatract) 가운데 논의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개별적 인간’(ein einzelner Mensch)이다. 그리고 제이 ousia는 종(種, art, eidos)인 것이며, 인간의 종(die Art 'Mensch')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정의는 제일 ousia에 의하여 서술되어지지 않으며, 제이 ousia에 의하여 서술되어진다. 즉 ‘인간’은 소크라테스의 정의로 서술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 관한 정의는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서술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主語)인 ‘소크라테스’는 제일 ousia이며, 술어(述語)인 ‘인간’은 제이 ousia이다. 이와 같은 ꡔ범주론ꡕ에 의하면, ‘인간’은 플라톤적인 스스로-실존하는 ousia이며, 이는 소크라테스에 관하여 서술되어진다.7) 그러나 일반적으로 후기의 논의인 ꡔ형이상학ꡕ에서는 제일 ousia와 제이 ousia를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면서 고유한 의미에서 제일 실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지며, 다만 eidos(Artform)의 의미에서 형상(eidos)에 관해서도 실체라고 한다고 한다.8) 이러한 관점에서 ꡔ형이상학ꡕ에서는 ꡔ범주론ꡕ과 달리 ousia를 보편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개체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프레데(M.Frede)와 팟지히(G.Patzig)의 ꡔ형이상학ꡕ 7권 주해에서 발견되어진다. 그곳에서 그들은 “보편자는 ousia일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플라톤주의의 형상이론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9) 그러면 ꡔ형이상학ꡕ에서 ousia는 보편자일 수 없는가? 잠정적으로 위의 일반적 논의에서 ousia는 보편자가 아닌 것으로 논의된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 것인가? 이러한 입장과 반대로 클래머(H. Klaemer)와 같은 이는 형이상학에 이르러 오히려 보편자가 제일 ousia로 높아진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10) 그리고 조대호는 이러한 해석들은 ꡔ형이상학ꡕ에 등장하는 다양한 의미의 ousia를 간과한 처사라고 지적한다.11) 사실 ousia와 관련된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 Z권에 관한 논의와 해석은 예거(Jaeger) 이후 꾸준히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 이해의 중심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현대의 해석가들은 이 두 시기의 차이를 통하여 ousia의 개념을 달리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거식의 이해도 이젠 그저 당연하게 받아드리기 힘든 것이 되었다. 웨딘(Wedin)은 최근의 연구서인 ꡔ실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ꡕ(Aristotle's Theory of Substance)에서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 Z권 사이 관계의 일치성을 제공하고 있다.12) 그리고 스펠만(Spellmann)은 그의 연구서에서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어떤 지속성을 도모하기도 했다.13) 또한 룩스(Loux)는 ꡔ범주론ꡕ에서는 ousia와 다른 범주와의 관계에서 우선성을 논의하며, ꡔ형이상학ꡕ에서는 ousia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우선성을 이야기한다고 논의한다. 한편 루이스(Lewis)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두 입장의 일치론자(reconciliationist)로 해석한다. 루이스가 해석하는 ꡔ형이상학ꡕ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계획은 ousia에 관한 자신의 초기 기준과 형상과 질료의 새로운 존재론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하여간 ousia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핵심개념으로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우선 ousia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의 범주(範疇) 혹은 유(類)라고 한다.15) 즉, ousia는 보편적인 것과 관련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ousia는 진정 보편자에 관하여 이야기될 수 있는가? 아니면 개체들만이 그러한 것이라고 해야하는가? 우선 이 정도의 논의를 감안하고 앞으로의 논의를 이어가도록 하자.
2. ꡔ형이상학ꡕ Z에서 ousia의 논의.
ꡔ형이상학ꡕ 7권에서 ousia는 로고스(정의)와 앎 그리고 시간 그 외 모든 의미에서 우선된 것이다.(he ousia proton kai logo kai gnosei kai krono)16) 왜냐하면 다른 범주의 것들은 분리적으로 있을 수 없지만, 오직 ousia만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17) 즉, ousia는 모든 다른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18) 그리고 이러한 ousia을 많은 이들은 질료(hyle) 없는 형상(eidos)에 국한시킨다. 이러한 것은 중세적 전통에서도 그러하고, 현대에도 그러하다.19) 중세의 철학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주해가인 토마스는 그의 사유에서 ousia를 논의한다. 다른 중세인들이 그렇듯이 이는 라틴어 substantia로 그에게 사유되었다. 그러면서 토마스는 존재자(ens)는 일차적으로 실체(substantia)이며, 이차적으로 우유(accidens)라고 한다. 그러면 의미에서 본질도 고유한 의미에서 실체 가운데 가능하다고 한다.20) 이러한 해석은 실체, 즉 ousia가 다른 모든 범주에 앞선다는 생각에서 지지되어진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기인한다. 즉, 10가지 범주 가운데 실체를 제외한 것은 실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실체만이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범주, 즉 cateroria는 곧 술어(述語)의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술어 가운데 정의가 있어야하고, 우유들이 있어야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ꡔ변증론ꡕ(Topic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대성, 유, 특수성 그리고 정의는 항상 이들 술서(카테고리아이) 중의 하나 안에 있기 때문이다.21)
여기에서 정의(definitio) 역시 술어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정의 역시 술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의 정의, 즉 어떤 사물의 무엇임을 서술하는 것은 ousia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예를 들어 우리는 ‘이것은 책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는 이것의 무엇임과 동시에 그것의 ousia 곧, 실체이다. 그것은 이것의 성질도 아니고, 수량도 아니며, 관계나 수동 그리고 능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실체, 즉 ousia이다. 그리고 만일 ‘이 책은 1권이다’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선 무엇임이 말해지고, 이어서 이에 관한 수량이 서술된 것이라고 한다.22) 여기에서 필자는 다시 ꡔ범주론ꡕ의 ousia 정의에로 올라가 보자.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무엇임에 관한 질문에 답이 ‘이 사람은 김충모이다’라고 하자. 여기에서 ‘김충모’는 이 사람의 무엇임, 즉 정의이다. 그런데 다시 ‘김충모는 사람이다’라고 말해보자. 여기에서 전자의 김충모는 10개의 범주 가운데 실체, 즉 ousia이다. 그리고 이 ousia를 서술하는 ‘사람’ 역시 ousia이다. 즉 ‘김충모’와 ‘사람’은 모두 ousia이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 즉 주어인 ousia를 제일 ousia라고 하고, 후자, 즉 술어인 ousia를 제이 ousia라고 했다. 이뿐 아니라, 다시 한번 생각하면, 전자는 개체이지만, 후자는 보편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충모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김충모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라톤...등은 모두 사람이라고 서술된다. ꡔ변증론ꡕ에서 ousia는 무엇임에 관한 것이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엇임은 정의와 관련된다.23) ‘김충모’는 무엇인가? 분명 ‘사람’이다. 그런데 무엇임은 ousia와 관련된다. 그렇기에 ‘사람’은 ousia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보편자가 ousia란 말인가? 그러나 많은 주해가들은 ꡔ형이상학ꡕ 7권에서 이러한 보편자는 더 이상 ousia의 자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풀이했다. 이는 중세 토마스에게도 그렇고 현대의 주해가인 프레데와 팟지히 그리고 그 외 예거(Jaeger)와 같은 이들도 이러한 해석에 힘을 주고 있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제일 ousia만이 ousia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2.1 ꡔ형이상학ꡕ에서 ousia는 단지 개별자일 뿐인가?
우선 중세적 전통에서 토마스(Thomas Aquinas)는 이미 논의하였듯이 진정한 실체(ousia)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이며, 이는 개체(individum)라고 했다. 그러면서 개별적 제일 실체(prima substantia)는 세 가지로 구분되어지며, 이는 형상과 질료 그리고 결합체(compositum)라고 했다.24) 그리고 이러한 개별화가 가능하게 되는 개별화의 원리(individuationis principium)를 질료라고 했다.25) 그리고 형상은 본질, 즉 무엇임과 관련되는 것으로 토마스는 이해했다. 여기에서 본질은 ‘정의’를 통하여 표현되는 바의 것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즉 형상은 보편적인 것, 즉 보편자인 것이며, 오직 질료에 의하여 개별화된다.26) 그리고 실체란 우선적으로 이러한 본질 규정의 원리이며, 보편적인 형상과 개별화의 원리인 질료의 결합체로 이루어진다. 물론 질료를 가지 않는 비질료적 실체도 있지만, 이는 정신적인 것이고, 비육체적인 것이며, 비물리적인 것일 뿐이다.27) 우리가 아는 감각계의 실체, 즉 저 나무나 저 책상과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질료를 가지지 않은 비물질적 실체는 개별자이지 보편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천사에 관한 논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천사는 질료를 가지지 않지만, 천사인 미카엘과 같은 존재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이다. 토마스는 보편자는 실체일 수 없고, 실체일 수 없는 보편자는 그 스스로(per se) 존재할 수도 없다고 그의 ꡔ형이상학 주해ꡕ 정의한다.28) 이러한 보편자는 다양한 것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고, 인식의 차원에서 다른 것에 우선된 것이다. 그렇기에 보편자는 인식에서 우선된 것이며, 개별자는 다음의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류는 종보다 더 인식에서 원리인 것이다.29) 하지만 이러한 보편자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인 것만이 감각적 차원에서 실체라고 본 것이다. 이로 볼 때, 토마스에게 실체는 보편자가 아니며, 오직 개별자일 뿐이다.
현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보편은 ousia일 수 없으며, 개체이고, 우유와 달리 비(非)-의존적인 것이다.30) 만일 이러하다면, ꡔ범주론ꡕ에 등장하는 제이 ousia는 진정한 ousia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에서 ꡔ형이상학ꡕ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이 ousia가 아닌 제일 ousia를 진정한 ousia로 규정했다고 해석한다. ꡔ형이상학ꡕ Z권에 의하면 ousia는 정의(logos)에서 앎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우선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ousia는 정의 혹은 앎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는 또 형상과 관련된다. 즉 본질은 정의(logos)와 현실태에 속하며,31) 형상은 또한 정의로 드러난다.32) 그런데 ousia는 정의에서 우선적인 것이다. 그리고 정의에서 우선적인 것은 형상이다. 정의는 보편적인 것이다. “김충모는 인간이다.” 그리고 “무사이는 인간이다.” 또 “인간의 정의는 이성적 동물이다.” 즉 한국인 김충모도 아랍인 무사이도 ‘인간’이란 동일한 형상을 가지며, 동일한 형상을 가지기에 두 사람 모두 이성적 동물이 된다. 그렇기에 형상과 정의는 단지 한 사람에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 관하여 간단하게 정의하고 넘어가자.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형상은 우선적으로 그 자체로 있고, 그 자체에 의하여 있으며, 반면 감각적 실체(ousia)와 같은 것은 형상에 의하여 있는 것이다. 즉 형상은 그 자체로 가지적인 것이며, 이와 대비적으로 감각적 ousia는 형상에 의하여 가지적이다.33) 이렇게 본다면, 앎과 정의에서 우선된 것이 ousia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형상은 ousia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형상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ousia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ousia는 분명 정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34) 이미 필자는 ꡔ변증론ꡕ을 인용하면서 ousia와 정의 그리고 본질의 관계를 논의했다. 분명 정의와 본질은 ousia에 속하는 것이다.35) 그러면 ousia는 그 자체가 정의인가 아니면, 정의를 가지는 것인가? 만일 개별자만이 ousia라면 ousia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충모는 인간의 정의를 가지지 그 자신이 정의가 아니다. 즉 김충모와 같은 개별자는 본질을 가지지 그 스스로 본질이 아니다. 김충모는 형상과 질료의 합성체이다. 그런데 그의 질료는 그의 본질이나 형상의 부분이 아니다. 형상이 그의 정의이며, 이는 합성체 가운데 앎 혹은 정의에 우선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 만일 이러하다면, ousia는 정의와 앎에서 우선적이어야하는데, 형상은 정의와 본질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상은 ousia이지만, ousia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어야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ousia에 관한 이해의 어려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을 인간에 적용해보자. 김충모는 ousia이다. 그런데 김충모는 형상을 가지지만, 그 자신이 정의인 것은 아니다. 김충모는 형상에 의하여 정의되어진다. 형상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상은 ‘인간 형상’이며, 이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고, 이로 인하여 정의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ousia는 김충모를 앎에서 우선된 것이다. 그렇기에 김충모에 관한 앎은 ‘인간 형상’인 영혼에 의하여 전해진다. 이렇게 된다면, ousia는 개별자에게 한정되기 어렵게 보인다. 왜냐하면, 정의와 앎에서 우선적인 형상이 보편적이고, 형상인 ousia는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의문과 함께 필자가 다루어야할 것이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작인 ꡔ범주론ꡕ에서 보편적인 것은 제이 ousia이며, 개별자는 제일 ousia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ꡔ형이상학ꡕ 시기의 ousia는 단지 제일 ousia에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당장 우리는 위의 논의에서 ꡔ형이상학ꡕ에서 ousia의 논의도 단지 개별자에만 묻어두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과연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ousia의 참모습은 어떤 것이며, 이는 또 초기 ꡔ범주론ꡕ의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제일 ousia는 개별자이며, 이것이 진정한 ousia로 여겨졌다. 하지만 ousia가 정의이고, 정의가 형상과 관련된다면, 당연히 ousia는 보편적일 수 있어야한다. 웨딘은 ꡔ형이상학ꡕ Z권의 ousia(이를 필자는 앞으로 m-ousia로 표기)과 ꡔ범주론ꡕ의 ousia(이를 필자는 앞으로 c-ousia로 표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한다. ꡔ범주론ꡕ은 개별자의 세계와 관련되며, 궁극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창백하다”라고 하는 진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개별자와 창백함이라는 개별적인 것의 부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c-ousia는 분석되어지지 않은 근원적인 것이며, 이는 아직 형상질료설(hylomorphism)이 온전히 마련되지 못한 형태의 ousia이다. 그렇기에 ꡔ범주론ꡕ의 c-ousia는 형상과 질료라는 근본존재자의 구조 가운데 드러나는 흥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는 그 구조가 다루어진다. 웨딘에 의하면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는 ꡔ범주론ꡕ과 달리 형상질료설을 분석한다.36) 이를 고려한다면,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ousia에 관한 질문은 곧 c-ousia의 ousia에 관한 질문과 동일한 것이 된다. c-ousia는 아직 형상과 질료로 분석되지 않은 ousia이다. 그러나 m-ousia는 형상과 질료로 구분되며, 그렇기에 ousia에 관한 질문은 곧 c-ousia의 ousia에 관한 질문이 된다. 여기에서 c-ousia의 ousia는 형상이 될 것이다. ꡔ형이상학ꡕ Z권에 의하면, 합성체를 구성하는 질료은 형상에 의하여 드러난다. 즉 구체적 실체는 본질적 형상에 의하여 규정되며, 형상에 의하여 정의된다.37) 그런데 이러한 형상질료설에 의한 분석이 없는 c-ousia는 ꡔ형이상학ꡕ에 이르러 c-ousia의 본질, 즉 ousia가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형상이다. 그런데 형상이란 보편자이다. 그러면 ousia가 형상이라면 결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충모와 무사이는 둘 다 인간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ꡔ형이상학ꡕ에서 서로 다른 두 인간이 다른 것은 질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각의 두 사람 김충모와 무사이는 동일한 형상을 가지는데 이 형상은 또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다.38) 김충모와 무사이 각각이 가지는 형상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이 형상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서술되어지는 것이지만, 각각의 개별자가 가지는 형상은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즉, 김충모의 형상은 다른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화의 원리’에 관한 상을 그려 볼 수 있다. 김충모와 무사이는 질료에 의하여 서로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형상에 의하여 김충모는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김충모로 동일성을 유지하며, 무사이도 그러하다. 즉 질료는 개별화에서 시공간적 본질임이 필연적이라는 것으로 보여준다. 이는 질료가 다름으로 김충모와 무사이는 서로 시공간적으로 다른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누어질 수 없는 형상은 각각의 개별자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즉 형상에 의하여 동일화(Identifizieren)가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개별자에 관한 논의는 형상과 질료에 의하여 분명해진다. 그리고 ousia 역시 그러하다. ousia는 정의이며, 이 정의는 형상과 관련되며, 본질로 드러난다. ꡔ형이상학ꡕ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왜냐하면 어떤 사물들은 당연하게 개별적 질료 가운데 개별적 형상이며, 혹은 개별적 질료는 개별적 상태 가운데 있다.(a particular form in a particular matter, or particular thing in a particular state-Ross 옮김; diese Form an diesem Stoff oder dieser Stoff in Socher Beschaffenheit-Bonitz 옮김)39)
여기에서 사실 로스(Ross)의 해법과 보니츠(Bonitz)의 해법은 서로 다르다. 로스에 의하면 “개별적 질료 가운데 개별적 형상 혹은 개별적 상태 가운데 개별적 사물”이라고 옮겨져 있다. 그러나 보니츠에 의하면, “이 질료에 이 형상 혹은 이(어떤) 상태 가운데 이 질료”라고 옮겨진다. 사실 이 모두 의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상이한 해법에서 야기되는 의역(意譯)이다. 사실 필자에게는 “바로 그러한 것 가운데 바로 그러한 것 혹은 그러한 상태 가운데 바로 그러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렇기에 ‘개별적 질료’라거나 ‘개별적 사물’이라고 옮기는 것은 의역에 의한 것이다. 필자는 보니츠의 해석을 따랐다. 사실 로스를 따른다고 해도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지만 말이다. 개별적 질료 가운데 개별적 형상이 있고, 또한 개별적 상황에서는 개별적 질료가 있다. 어떤 시공간적 상황 속에 있는 개별적 질료는 김충모를 다른 인간들과 구분되는 것으로 되게 하며, 또한 그러한 개별적 질료 가운데 개별적 형상은 김충모를 김충모이게 한다. 이러한 개별적 형상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김충모의 형상은 더 이상 다른 형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 개별적 형상, 즉 이것이 개별적 질료와 함께 김충모라는 실체가 되는 것이다. ꡔ범주론ꡕ에서 김충모라는 c-ousia는 개별자이며, 반면 제이 ousia인 ‘인간’은 보편자 혹은 류(genera) 혹은 종(species)과 같은 것이다.40) 그리고 이 김충모라는 c-ousia는 ꡔ형이상학ꡕ에 이르러 질료형상설에 입각하여 분석된다. 여기에서 c-ousia의 ousia, 즉 c-ousia의 본질은 형상이 된다. ousia는 정의에서 앎에서 앞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의와 같은 의미이며, 정의는 형상과 분명 함께 있다. 그렇게 형상은 정의에서 앎에서 앞선 것이며, 정의이고, ousia이다. ꡔ형이상학ꡕ에 이르러 이 형상은 c-ousia의 ousia가 된다. 그러나 이 형상은 “나누어질 수 없는 형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상은 모든 것에 공통된 보편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면 형상의 진위에 관한 논의에서 ousia의 진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2 아리스토텔레스의 ousia 논의에서 형상(Forma)이론
이곳에서 진행할 형상에 관한 논의는 ousia에 관한 논의와의 연관선 상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일군의 전문가에 의하면, 형상 혹은 본질은 보편자도 개별자도 아니라고 한다. 햄퍼(Hamper)에 의하면, 형상은 보편자이기에 특정의 시공을 점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한편 형상은 보편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성적 개별자에 관하여 서술되지 않기 때문이다.41) 개별자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고, 보편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형상은 보편자가 아니다. 하지만 형상은 정의(logos) 가운데 하나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이지만, 합성적 개별자의 수적 단일성에 근거한다면 점에서 형상은 보편자가 아니다. 형상이란, 라틴말로 forma이며, 그리스말로 eidos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eidos란 우리말로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우선 ‘형상’이고, 또한 ‘종’이다. 이는 각각 라틴말로 forma와 species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ꡔ범주론ꡕ의 현대어 번역에서 eidos는 때로는 form으로 그리고 때로는 species로 옮겨짐을 볼 수 있다.42) 그러면 ‘종’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별자를 포함하는 하나의 보편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 형상이란 것은 형상을 당연하게 보편자이게 한다. 즉 이러한 종 혹은 형상은 다양한 것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43) 그리고 그렇게 형상과 종이 보편적인 것은 정의의 보편성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은 제이 ousia이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ꡔ범주론ꡕ에서 제이 ousia는 류와 형상(혹은 종) 그리고 보편자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즉, 이는 제일 ousia가 개별자인 것에 비하여 보편자인 것이다.44) 그런데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서 필자는 어윈(Irwin)의 견해를 살펴보려 한다. 어윈은 제일 ousia는 가장 적당한 ousia이며, 그것은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이 ousia는 단지 그 다음에 적당하기 때문이다.45) 그리고 실재로 필자는 그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읽을 수 있다고 여긴다.
제이 ousia의 형상(eidos, 종)은 류보다 더 ousia이다. 이는 제일 ousia에 더 가까운 것이며, 한편 류는 그것에서 더 먼 것이다.46)
여기에서 종이 제이 ousia인 것은 제일 ousia와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류는 종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더 멀고 종은 더 가깝다. 그렇기에 제이 ousia인 종 혹은 형상은 류보다 더 참된 ousia이다.47) 이리 본다면, 가장 근원적인 것이 가장 우선된 의미의 ousia이며, 이것이 제일 ousia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ousia는 개별자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48) 실재로 많은 이들이 제일 ousia는 종이니 류니 하는 제이 ousia보다 더 참된 ousia라고 여겼다. 개별자인 제일 ousia와 다른 것과의 관계는 종과 류의 관계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일 ousia가 종에 의하여 서술되듯이 그렇게 종은 류에 의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49) 그렇기에 류에 비하여 종이 그리고 종에 비하여 개별자가 더 적당한 ousia인 것이며, 더 고유한 의미에서 ousia인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ousia는 개별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일 ousia는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보편자나 보편개념과 달리 다수와 관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수적으로 단일자, 즉 ‘개별자’이기 때문이다.50)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과 류는 ousia와 관련하여 질을 결정한다. 그것들은 ousia의 어떤 종을 당신에게 말한다. 류의 경우에 그러한 질의 규정은 종의 경우에서 보다 더 넓은 편이다.”51) 여기에서 제이 ousia는 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제이 ousia는 어떤 질(qualitas)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는 ꡔ형이상학ꡕ에서 찾을 수 있다. ꡔ형이상학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의 차이와 질은 관계지어 설명하고 있다. 즉 “ousia의 차이, 즉 인간은 어떤 질의 동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발을 가졌기 때문이고, 말도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네 발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은 개별적 질의 형태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각(角)이 없기 때문이다.”52) 여기에서 질은 종과 종류 그리고 특성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류의 경우에 규정되는 질은 종의 경우에 질 보다 더 넓은 면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보편자란 어떤 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인 것은 그것의 질이 다른 것과 달리 그러나있기 때문이다. 원이 삼각형이 아닌 것은 그것의 질로 인한 것이다. 그렇게 다른 질, 즉 ousia의 차이로 인하여 그 형상 혹은 종 혹은 류가 암시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보편자는 그저 유사한 질의 공통 명칭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명론자 혹은 개념론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보편자란 단지 개념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본다면, 제일 ousia만이 진정한 ousia이고, 다른 보편적 개념은 단지 그에 비하여 덜 근원적이며, 유사한 질의 집합이란 의미에서 ousia일 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상’이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며, 김충모가 무사이와 다른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질료적인 차이에서 그러하고, 동일한 것은 같은 질을 가진 종 혹은 형상이란 차원에서 동일한 것으로 묶여지며, 단지 이를 제이 ousia라고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ousia와의 관계에서 매우 난해한 입장을 드러낸다.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으로 ousia는 본질과 보편자 그리고 류와 기체(substratum)라고 한다. 그런데 기체는 질료와 형상 그리고 구체적 개별자이며, 질료와 구체적 개별자는 제일 ousia일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감각적 사물들 가운데 가장 우선된 것은 형상이기 때문이다.53) 하지만 이미 우리는 형상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형상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아야한다.54) 하지만 김충모와 무사이는 동일한 종에 속하지만, 그 형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종은 유사한 질을 모은 보편 개념이다. 필자의 눈에 ꡔ범주론ꡕ의 eidos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종(species)으로 보인다. 하지만 ꡔ형이상학ꡕ Z권에서 eidos는 질료형상설에 의한 형상(forma)으로 보인다. 김충모의 형상은 김충모를 김충모이게 하며, 김충모라는 감각적 ousia는 이러한 형상에 의하여 자신을 드러내며, 그 형상은 그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형상은 동일성 유지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은 질료에 의하여 시공간에 다른 것과 구별되는 부정적 기능이 가능하게 된다. 즉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김충모는 형상과 질료 양자에 의하여 설명되어진다는 의미에서 ousia는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형상인 김충모를 김충모이게 하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지만, 질료는 이를 다른 인간종의 구성원과 구분하여주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가진다는 것’이나 ‘네 다리를 가진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는 보편 개념, 즉 류 개념 가운데 구분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료 혹은 질에 의하여 류개념 가운데 ‘인간’이나 ‘말’등이 정의된다. 즉 여기에서 ‘동물’이라는 류개념, 즉 보편 개념과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질적 차이 혹은 질료적 차이가 어떤 것의 정의 혹은 무엇임을 야기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재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류와 종과 같은 것은 정의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나 과학철학의 근간이 된다.55) 그런데 정의와 본질에서 가장 우선된 것이 ousia이며, 그렇기에 ousia는 질료와 형상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ousia는 우선적으로 형상이라 할 수 있지만, 형상에만 그칠 수는 없다. 그것은 질료에 의하여 다른 것과의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ousia, 즉 정의에서 가장 우선된 ousia는 개별자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 그 자체는 정의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것에 의하여 과학적 지식 혹은 정의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 형상,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은 형상에 의하여 과학적 지식과 정의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56) 개별자들에 의하여 하나의 보편개념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만들어진 보편개념은 개별자의 정의를 위하여 다시 요청되며, 그렇기에 개별자만큼은 아니지만, 정의와 본질에 있어서 후차적으로 근원적인 제이 ousia가 된다고 보여진다. 형상은 곧 어떤 것의 정의와 관련된다. 즉 형상은 정의와 본질에서 다른 것을 앞선다. 왜냐하면 형상은 이것임(haecceitas)의 동일성을 유지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질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를 정의할 때, 그 신체 부분의 상태에 관한 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57) 그리고 질료와 관련되는 ‘질’은 ousia의 차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이미 보았다. 프레데와 팟지히는 ꡔ형이상학ꡕ Z권의 주해에서 인간의 정의는 오직 영혼만으로 가능하다고 한다.58) 그러나 사실 이는 새롭게 생각되어야한다. 생물들에게 질의 차이는 본질적 차이이며, 이는 이미 ꡔ형이상학ꡕ에서 확인했었다.59) 이렇게 개별자로 있는 ousia는 형상과 질료에 의하여 하나의 개별자로 드러나게 되며, 이것이 정의와 본질 그리고 앎에서 개별자가 모든 것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이로 인하여 개별자가 가장 참된 ousia인 것이다. 가장 참된 본질이며, 가장 참된 존재자, 바로 ousia는 개별자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저 ousia를 개별자라고 하고 논의를 마친다면, ꡔ형이상학ꡕ의 많은 구절이 난제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자로 ousia가 논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3 보편자로 ousia의 가능성
ꡔ형이상학ꡕ Z권 13장의 첫 구절에 필자의 눈길이 멈춘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가 어떤 것인지를 다룬다.
우리의 연구 대상은 ousia이며, 이로 돌리자. ousia라고 불리는 것은 (i)기체, (ii)본질 그리고 (iii)이러한 것의 합성체 또한 (iv)보편자이다.60)
여기 ousia의 후배들 가운데 보편자는 진정 ousia인가? ousia가 개별자이고, 질료와 형상의 합성체란 것은 이미 보았다. 그리고 그 보다 앞서서 ousia가 본질임도 보았다. 그러면 보편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개별자의 ousia는 개별적인 것에 고유한 것이며, 보편적인 것은 이와 달리 다양한 사물에 서술되어지는 것이다.61) 그리고 이러한 보편자, 즉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것은 개별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것에 관해 서술되어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는 대상 혹은 주체에 관하여 서술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보편자는 항상 어떤 대상 혹은 주체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자와 ousia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62)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동물’과 같은 보편자는 동물 개개의 개별자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63) 만일 ‘인간’과 같은 보편자가 하나의 ousia라면, ousia로 여겨지는 ‘인간’은 개별적 인간의 ousia이며, 그 가운데 보편자는 현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의 결론이 따라나온다. 즉 어떤 것이 고유한 것과처럼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 가운데 보편자는 ousia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인가? 위의 논의와 연관하여 살피자면, 이는 성립할 수 없다. 보편자 역시 ousia라면, 개별자인 ‘이 인간’은 보편자인 ‘인간’이란 ousia가 개별자에 있어서 개별자를 인간이라고 서술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ousia는 다른 것 가운데 있지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보편자가 ousia라면, ‘이것임’과 같은 개별자인 ousia은 그 가운데 있는 보편적 ousia와 함께 구성된다고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개별자 가운데 그와 함께 구성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각각의 개별자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ousia도 보편자로 구성되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보편자란 ‘이것’이 아니라 ‘그러그러한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ousia는 비혼합적인 것이다.
하지만 보편자 역시 후차적인 의미에서 ousia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동물들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동물’이란 것은 우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동물’이란 것을 가지는 것은 그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인한 것이며, 우유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많은 토끼나 말 그리고 인간...등은 ‘동물 그 자체’인 것과 관련되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종 가운데 ‘동물’이란 류 개념이 종의 ousia로 있기 때문이다.64) ꡔ범주론ꡕ에서 제이 ousia는 제일 ousia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되었다. 김충모에게 ‘인간’이란 종은 ‘동물’에 비하여 더 ousia인데, 그것은 개별자인 김충모를 제외한 것으로 다름으로 근원적인 것이기에 제이 ousia이다. 그렇기에 보편자와 같은 제이 ousia는 우선된 의미에서 ousia는 아니라도 정의와 본질의 의미에서 후차적인 ousia라 할 수 있다. 그렇게 ousia는 우선적으로 개별자이며, 이차적으로 보편자라고 할 수 있다.
3. ‘개별자=(본질)ousia’ 그리고 ‘개별자의 (본질)ousia≠(본질)ousia’?
한 개별자는 곧 ousia이다. 하지만 개별자의 ousia에 관한 물음은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ꡔ형이상학ꡕ Z권 17장에서 ousia를 본질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의 ousia’라는 표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65) 하지만 ousia는 곧 개별자라고 한다면, 한 사물의 ousia라는 물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실상 이는 ꡔ형이상학ꡕ이란 책이 가진 다양한 난제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66) 우리가 하나의 존재자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 존재자의 본질이 그 존재자와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연구는 공허하기 쉬울 것이다. 또한 한 존재자의 ousia 혹은 본질을 발견하면, 개별자와 그것의 본질 사이에 성립하는 동음이의성도 통찰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 논의가 철학적 깊이가 더할 것이다.67) 하지만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인 김충모의 본질은 인간이다. 즉 그는 인간이다. 김충모의 ousia는 곧 인간이다. 그러면 김충모와 인간은 동일한 것인가?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김충모와 같은 개별자와 그것의 본질은 동일성(同一性)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동음이의(同音異義)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김충모의 본질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김충모와 인간은 동음이의라는 것이다.68) 여기에서 개별자와 본질이 단지 동음이의라면, 개별자와 본질의 동일성이 제거되어야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개별자를 논하는 것은 분명 그 개별자와 본질의 동일성을 전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명 그 개별자와 본질은 동일성이며, 동시에 동음이의여야만 한다. 이 애매한 문제도 실상 모순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화 이론과 보편에 관한 논의로 다가가려고 한다. 이미 위에서 ousia는 일차적으로 개별자이며, 그 개별자는 형상에 의하여 동일성이 유지되며, 질료와 질에 의하여 다른 것과 구별된다고 하였다. ‘질’이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질의 차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진 존재라는 특정의 질에서 동물이다. 그리고 원(圓)은 개별적 질에서 그런 모양이며, 이는 각(角)을 가지지 않음이다. 이 질은 본질의 차이를 야기하는 것으로 개별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69) 그런 의미에서 질와 질료 등과 같은 것은 단지 우유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즉 인간에 관한 정의에서도 그 인간의 형상인 영혼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게 하는 질적인 것도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두 다리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질은 본질의 차이, 즉 하나의 본질을 다른 본질과 구별되게 하는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질료와 질 등과 같은 것이 동일한 보편개념 가운데 개별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형상은 이와 달리 그것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사물을 ‘정의’하기 위하여 형상과 질료가 모두 요청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ousia 역시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 것이라 논의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ousia는 항상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per se)에 관한 논의에서 우선된 의미에서 그 자체로 있는 것을 “형상”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있다.70) 개별적 ousia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졌으며, 형상에 의하여 그 동일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형상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것이다. 그 형상은 본질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다른 것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은 영혼이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렇게 그 인간의 본질은 그 본질과 동일성을 가진다. 하지만 개별적 인간은 그 본질과 동일하지 않다. 그 이유는 전자의 본질과 형상 혹은 ousia는 개별적 형상이지만, 후자의 것은 보편자로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보편자로 형상은 이미 필자가 논한바 제일 ousia에 비하여 제이 ousia이다. 왜냐하면 보편자인 제이 ousia는 ꡔ범주론ꡕ의 제일 ousia인 c-ousia에 비하여 덜 ousia인 것이다. 그것은 개별자의 ousia에 비하여 보다 덜 ousia라는 것이다. 비록 보편자가 ousia이지만, 그것은 단지 우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후차적인 의미에서이다. 보편자는 c-ousia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한에서 후차적인 ousia일 뿐인 것이다. 즉 여기에서 보편자로 형상은 c-ousia에 관하여 서술되어지는 서술어로 이차적인 ousia이며, 개별자와 동일성을 가지는 형상 혹은 본질 혹은 ousia는 c-ousia이다. 즉 제일 ousia인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형상은 그 자체로 가지적인 그러한 것이다.71) 보편자는 개별자의 정의를 위해 사용되는 이차적인 ousia 혹은 본질이며, 진정한 본질 혹은 ousia는 곧 개별적 형상 혹은 개별자이다. 그렇기에 필자의 눈에는 ‘개별자=(본질)ousia’ 그리고 ‘개별자의 (본질)ousia≠(본질)ousia’이 모순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자의 ousia 혹은 본질은 c-ousia, 즉 제일 ousia이며, 후자의 ousia는 보편자로 후차적 의미에서 ousia 혹은 제이 ousia이다.
4. ꡔ형이상학ꡕ에서 ousia와 개별화의 원리.
이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며, ousia이론과 그를 보다 더 잘 드러내기 위하여 개별화의 원리를 다루어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중세 많은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토대로 개별화의 원리를 고민했었다.72) 김충모도 무사이도 ‘인간’이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보편자 가운데 각각의 개별자는 무엇으로 개별화되는가? 이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그리고 개별화의 원리에 관한 중세 학자들의 태도는 크게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73) 그러면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실상 필자가 이 4장에서 행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명론에 의하면 ‘인간’은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바람의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실재론에 있어서 ‘인간’이란 보편은 실재한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필자는 앞선 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의 실재성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는 유명론자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김충모가 인간인 것은 인간이란 형상으로 그러한 것이다. 즉 김충모는 그의 형상으로 인간 김충모이다. 그것은 그와 그의 ousia(본질)인 그의 형상 사이의 동일성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김충모가 인간은 아니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전자의 김충모와 동일성을 유지하는 ousia는 김충모라는 동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러한 ousia이며, 후자의 것은 단지 이러한 개별자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우선적이지 않고 이차적인 의미에서 ousia인 것이다. 그렇기에 후자의 보편자는 우선적인 의미에서 ousia가 아니다. 왜냐하면 ousia란 보편자들 가운데 가장 덜 보편자인 것, 즉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자란 단지 나누어질 수 없는 개별자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다.74)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인 것은 ‘이것’(tode ti)이 아니라, 그러한 것(toionde)이다. 그리고 오직 ousia만이 ‘이것’이고, 보편자는 ‘이것’이 아니다.75) 다음의 구절을 읽어보자.
보편자는 ousia가 아니다. 그러나 요소 혹은 원리는 보편자이다. 그리고 요소 혹은 원리는 사물에 앞서며, 그 가운데 원리 혹은 요소가 있다.76)
그것들이 보편자라면, 그것들은 ousia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모든 것은 ‘이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ousia는 ‘이것’이기 때문이다.77)
분명 ousia는 ‘이것’이며, 보편자는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란 보편자는 단지 이차적으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이것은 어떤 것이다”라는 진술에서와 같은 이는 ‘이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러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것’은 바로 ‘개별자’일 뿐이다. 그 이 ‘이것’은 우선적으로 ‘형상’이다. 왜냐하면, 김충모를 김충모로 만드는 것은 바로 김충모의 형상이라는 바로 ‘이 형상’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형상’은 김충모를 김충모이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지 김충모를 이해할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동일성은 논리상 다른 것과의 차이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 존재를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바로 ‘질’과 같은 것이다. 질이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질의 차이이다. 즉 질에 의하여 각각의 본질이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 역시 동일한 보편자를 가지는 것이 개별화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질료로 인하여 김충모와 무사이가 구별되는 것이다. 시공적 사물에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질료는 분명 서로가 서로가 아닌 것이 되게 하는 부정의 기능(enie negative Funktion)을 가질 것이다. 즉 김충모의 형상과 무사이의 형상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질료에 차이가 없이는 각각의 개별자를 차이를 유지한 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료와 질은 자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형상에 의하여 어떤 것의 질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78) 그리고 질은 어떤 형상을 가진 것에 본질적인 요소이지, 그것이 그것을 가진 ousia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의 질인 두 개의 다리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인간의 본질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질은 하나의 형상과 또 다른 하나의 형상의 차이를 야기하는 것에 관한 서술어(범주)일 뿐, 그것이 이들 형상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단지 이러한 동일성 유지의 양상일 뿐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주어진 질인 두 다리는 단지 다른 동물과의 구별을 위한 인간이란 형상의 동일성을 서술하기 위한 다른 것과의 차이를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의 ousia, 즉 참된 존재 혹은 무엇임(본질)은 형상에 의하여 ‘이것’으로 유지되기에, 하나의 ousia는 곧 형상에 의한 ‘이것’이며, ‘이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방식을 가지는데, 이 차이를 서술하는 것이 본질의 차이 곧 질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각각의 질을 가진 ousia는 또한 시공간에서 질료로 인하여 다른 것과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질과 질료도 그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자발성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개별자의 ‘개별적 형상’만이 자발성을 가지며, 이것을 다른 것이 아닌 ‘이것’으로 있게 한다. 그리고 이 형상은 제이 ousia가 아니라, 바로 제일 ousia의 의미에서 형상이다. 즉 개별자와 동일성을 유지하는 형상이란 말이다. 이 말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사물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이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형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만으로 ‘이것’의 본질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설명이란 차이, 즉 종차(differantia)의 제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차이를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질료이며 질과 같은 것이다. 즉 이런 이유에서 진정한 개별자의 ousia 곧 본질과 그것의 존재양식을 위해 그것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형상과 이를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질료와 같은 것이 요청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론자인가 유명론자인가? 실상 ‘인간’이란 보편자는 어떤 실재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즉 플라톤적 보편자가 아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플라톤의 형상과 달리 실재성 혹은 존재성을 가지지 않으며, 정의 대상으로 요청되는 것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ꡔ형이상학ꡕ Z권 13장에서 플라톤적 형상에 반대하며 어떤 ousia도 보편자가 아니다. 여기에서 보편자는 플라톤적 보편자이다(플라톤적 보편자는 보편자p라고 표기). 보편자p는 그것을 분유(分有)받아 있는 각각의 개별자와 달리 하나의 원형이며, 참되게 있는 존재자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보편자p와 다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정의 고유한 대상인 본질이며 형상이지만, 이는 보편자p와 다르단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그리스어 katholou는 부사적으로 사용되며, 우리말로 ‘일반적으로’ 그리고 영어로 ‘in general’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각각에 관한 집합을 위한 용어이며, 개별자의 구성원에 제공되는 서술어와 부분을 이루는 전체를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79) 하지만 이는 보편자p와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상은 ‘이것임’의 근거인 것이다. 이미 논의하였듯이, ‘우선적으로’ ousia는 개별자이며, 형상이다. 그리고 이때 형상은 그 자체로 형상, 즉 이것임이지만, 개별자는 그 자체로 ‘이것임’이 아니라, 그 형상으로 무엇으로 있는 ‘이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상은 개별적 형상이다. 김충모의 형상은 영혼이지만, 그 영혼이 무사이의 영혼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물론 질료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지만, 실재로 김충모의 영혼과 무사이의 영혼은 그 자체로 구별되어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질료에 의하여 김충모와 무사이 각각의 ousia는 더욱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본질에서 우선하는 ousia는 네 가지로 드러난다. ‘본질’, ‘보편자’, 각각의 사물의 ousia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류’와 ‘기체’(‘대상’ 혹은 ‘근저(根柢)하는 것’)이다.80) 즉 김충모의 ousia는 김충모의 본질이며, 보편자이고, 그의 류인 동물과 그 기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는 김충모의 ousia와 관련되며, 각각은 진정 김충모의 ousia, 즉 김충모의 정의와 본질 등에 우선하는 것으로 이들 네 가지를 드는 것이다. 하지만 질료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질료에 의하여 ousia가 이해되기 때문이다.81) 하지만 질료는 그 자체로 개체도 아니고 보편자도 아니다. 그것은 형상과의 관련 속에서 서술되어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료는 우리가 ousia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형상과 질료의 결합이 진정 ousia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형상은 보편자p가 아니다. 질료와 함께 하는 형상은 종이 아니라, 개별적 형상이며, 이 형상이 동일한 종 가운데 동일하다고 서술되는 것은 동일해서가 아니라, 단지 유사한 질에 의하여 모여진 집합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되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보편자는 단지 집단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편자는 아니지만 ‘형상’은 존재한다. ‘이것임’의 근거로 말이다. 김충모의 형상인 영혼은 모든 인간이 인간이기에 관련되는 것이지만, 각각의 영혼은 서로가 서로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일반적으로’ ‘영혼’이라 부른다. 김충모의 영혼과 무사이의 영혼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일한 ‘영혼’, 즉 ‘이성혼’과 관련되어 이야기되는 김충모와 무사이의 영혼은 스스로 ‘이것’으로 존재하지만, 질료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이것’으로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영혼이 서로 다른 몸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영혼은 단지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되는 것이며, 실재로는 김충모의 이 용혼은 스스로 이것이면서 동시에 무사이의 영혼과 다른 질료를 가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김충모에 관하여 진정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형상과 질료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ousia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보편자p가 아니며, c-ousia라고 할 것이다.
eidos는 ‘종’과 ‘형상’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종과 같은 보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재성을 가지지 않으며, 이는 단지 우선 된 의미에서 ousia인 개별자, 즉 c-ousia를 이해하기 위한 이차적 의미에서 ousia인 제이 ousia일 뿐이다. 그리고 ꡔ범주론ꡕ의 제이 ousia를 보편자p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고 이미 필자는 논하였다. ꡔ범주론ꡕ은 어떤 것으로부터 X라고 불리는 X의 모든 상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에 중요하게 다루어진 작품이다.82) 그리고 실상 이러한 ꡔ범주론ꡕ의 존재론적 논의가 플라톤적인 잔재가 있다는 것은 쉽게 수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W.Mann)은 ꡔ범주론ꡕ과 ꡔ변증론ꡕ 이전에는 진정 사물들에 관하여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때 사물은 플라톤적 의미에서 이야기하는 초월적인 것에 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저작은 적기 전까지 사물은 사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83) 필자 역시 ꡔ범주론ꡕ이 플라톤적 잔재가 남은 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며, 더 플라톤적인 저작으로 보지 않는다.84) ‘김충모는 인간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실재론자들의 이야기와 같이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동일한 류라는 것이다. ‘무사이는 인간이다’라고 할 때 인간이라는 제이 ousia는 김충모에 관하여 서술되어진 인간과 같은 종이지만, 김충모의 형상과 무사이는 형상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동음이의적으로 동일한 형상이라 불리는 것으로 보인다. “김충모의 ousia는 인간이다.” 여기에서 김충모의 ousia은 보편자가 아니며, 이때 서술되어지는 인간은 보편자이다. 그래서 김충모의 본질인 김충모의 ousia와 인간은 동일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보편자는 보편자p가 아니며, 단지 유사한 것의 집합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별자 김충모는 김충모의 본질과 동일하며, 그의 형상과 동일하다. 이때 형상은 김충모를 김충모로 ‘이것’으로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개별적 형상이다.85)
실재론은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의 실재를 거부한다. 그러나 개별적 형상의 존재는 긍정하며, 이러한 형상은 ‘종’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것에 함께 서술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형상과 종 모두로 옮겨지는 그리스말 eidos는 보편자도 개별자도 아니다. 보편자는 단지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물에서 추상한 총체적 상이며, 그리고 이러한 상은 정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개별자의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그 개별적 형상은 어떤 질료를 가진 하나의 물리적 사물은 아니다. 여기에서 필자가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위치를 점유하는가? 투르네의 오도(Odo Turonesis)와 같은 이는 한 아이의 탄생은 하나의 실체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하나의 실체, 즉 ousia의 새로운 한 ‘질’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86) ‘인간’이란 보편자는 실재하는 ousia이며, 모든 개별적 인간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ousia의 상이하고 다양한 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자는 분명하게 ousia이다. 그리고 이는 ‘보편실재론’이다. 하지만 요아네스(Joannes Salesberiensis)는 유와 종과 같은 보편자는 사물(res)가 아니라, 정신이 사물들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만든 ‘정신의 구성물’(figurata rationis)이라고 한다.87) 그리고 이는 보편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보편자를 정신의 구성물이라고 한다. 이어서 스코투스는 각각의 개별자들은 개별적 형상, 즉 그 개별자를 이것으로 있게 하는 ‘이것임’이 주어져 있으며, 이 ‘개별적 형상’은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인식되어지는 그러한 것이다. 이런 스코투스는 질료에 의한 ousia의 개별화(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개별적 형상이 개별화의 원리라고 한다.88)
필자에 눈에 보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의 실재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말 eidos는 종과 형상으로 읽을 수 있는데, 보편자의 의미에선 종이며, 개별적 질료와 합성되어지는 형상은 종과 같은 보편자가 아니라, 바로 이 형상이다. ꡔ범주론ꡕ에 등장하는 kategoria는 가장 보편적 할당(einteilung)이며, 이를 통해 서술어는 자리잡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kategoria는 선험(a priori)적이지 않다.89) 그렇기에 서술되어지는 제이 ousia는 선험적이지 않을 것이다. 제일 ousia는 스스로 다른 것을 위해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이 그것을 위해 서술되어지는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상 일반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제일 ousia’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 대상(das letzte Subject)이라 할 것이다.90) 그리고 이 최종적 대상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다른 것에 의하여 무엇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임이 되는 이것임, 즉 개별적 형상이다. 이미 논의했지만, 질료 역시 ousia를 이해하는 하나의 노선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김충모의 형상과 무사이의 형상이 서로 다르지만, 어떤 우유적 차이 혹은 질료적 차이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두 개별자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우선 그는 질료가 개체화의 원리라고 했다. 그에게 ‘정의함’은 곧 개별화의 원리인 질료를 제한하거나 이를 제공함으로 가능하다.91) 하지만 이는 하나의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와 다르게 인식되게 하는 논리적 차원의 원리라고 여겨지며, 존재론적으로 질료로 인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개별적 형상이 그 자체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형상, 즉 ‘이것임’은 그 자체로 가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정의되어지지는 못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김충모는 그 자체로 가지적인 것이지만, 정의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김충모의 ousia, 즉 김충모를 김충모이게 하는 그 개별적 형상이며 본질은 곧 김충모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욱 더 분명히 할 것은 김충모의 ousia와 김충모의 개별적 형상 그리고 김충모의 본질은 바로 개별자 김충모와 같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ꡔ범주론ꡕ에서 그리고 후에 ꡔ형이상학ꡕ에서 더욱 더 첨예하게 반-플라톤적 노선을 전개한다.92) 그리고 그는 중세 학자와 달리 신의 정신 가운데 보편자를 상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그의 진정한 모습을 중세 어느 위치에 세우기 위해선 더욱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분명한 것은 보편자는 인간이 어떤 것을 분류하고 이러한 분류를 통한 정의함에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별화의 원리는 존재론적인 차원이라기 보다 차라리 논리적 차원이며, 여기에서 질료가 답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한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의 차이는 그 두 형상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개별적 형상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개별자는 그 자체로 각각 ‘이것’이기 때문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ousia... 나가는 말.
예거(Jaeger)는 ousia에 관한 제일 ousia과 제이 ousia 사이의 모순을 연대기적 연구로 해소했다. ꡔ형이상학ꡕ 7,8,9권에 등장하는 개별자에 관한 제일 ousia에 관한 논의와 ꡔ범주론ꡕ에 보편자를 ousia라고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전자는 후기의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초기 플라톤주의자 시대의 것이라 예거를 해석한다.93) 그리고 이러한 연대기적 차이를 통한 설명은 이 어려운 난제를 위한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최근에 들어 웨딘과 같은 이들은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 사이의 일치점을 모색하였다.94) 그리고 만과 같은 이는 ꡔ범주론ꡕ에 관한 연구에서 이 저작이 쓰여지기 전과 그 후를 구분하며, 이를 단지 플라톤적 잔재로 보지 않는다. 즉 그 이전에는 사물이 사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실상 ousia에 관한 개념과 정의는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모든 고전철학의 체계는 그러한 나름의 ousia 정의를 가진다. 그리고 이는 단일한 의미와 정의를 가지지 않는다.95) 필자는 ousia를 개별적 형상, 즉 ‘이것임’으로 보고 이를 통하여 ꡔ범주론ꡕ과 ꡔ형이상학ꡕ의 논의를 하나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중세 보편자 문제 그리고 개별화의 원리의 문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고려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둘러싼 문제에 다가가 보았다.
ousia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 즉 개별자이며, 이차적인 의미에서는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 ousia에 비하여 더 보편적인 것, 즉 종과 류가 ousia일 것이다. 그리고 일차적 의미에서 ousia, 즉 제일 ousia는 개별자이며, 이러한 개별자는 질료에 의하여 다른 것과 다르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지만 이러한 질료만으로 개별화를 다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질료란 자발적 원리일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 즉 개별적 형상으로 각각의 개별자는 이것임으로 유지되고 있다. 형상은 그 자체적으로 이것으로 있지만, 그러한 형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질료가 요청된다. 왜냐하면 같은 종을 가진 김충모와 무사이의 형상인 각자의 영혼은 그 자체로 각각 이것임으로 다르지만, 질료의 차이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와 본질 그리고 실체로 ousia는 형상만이 아니라, 질료와 함께 다루어져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논의는 습작이다. 앞으로 더욱 더 읽어야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그 과정의 작은 산물이며, 부산물이다.
1) 여기에서 필자는 ousia를 실체나 본질과 같은 것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라틴 문자화하여 ousia라고 적는다. 그것은 그것이 본 논의에 더 유익할 것이라는 의도된 이유에서이다.
2) 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 본질론의 생물학적 측면 -Metaphysica VII권을 중심으로-」, ꡔ철학연구ꡕ 56집 (2002), 197쪽.
3) 고영민, ꡔ신약성서 헬라어사전ꡕ (서울:기독교문사, 1973), 300쪽.
4) Zerwick, M., Analysis Philologica Novi Testamenti Graeci (Roma: Sumptibus Potificii Instituti Biblici, 1966), p.181; Zerwick, M., Grosvenor, M., A Grammatical Analysis of the Greek New Testament Vol.1 (Roma: Biblical Institute Press, 1974), p.243; Bonitz, H., Index Aristotelicus (Dae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55), p.544.
5) 조요한, ꡔ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ꡕ (서울:경문사, 1988), 87쪽.
6) Meta., VII, c.1, 1028a; Bonitz, H., Index Aristotelicus, p.544.
7) Brennana, Sh., "Subatance and Definition: Metaphysics ZH" The New Scholasticism LIX (1985), p.30.
8) Rapp, Ch., "Einleitung: Die Substanzbuecher der Metaphysik" In Metaphysik- Die Substanzbuecher (Ζ, Η, Θ), Hrsg. Ch. Rapp (Berlin: Akademie Verlag, 1996), SS.20-21.
9) Frede, M., Patzig, G., Aristoteles "Metaphysik Z - Text, Uebersetzung und Kommentar" Bd. 2. (Muenchen: Verlag C.H. Beck, 1988), S.241.
10) Kraemer, H., "Aristoteles und die akademische Eidoslehre" Archiv fu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55 (1973).
11) 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 본질론의 생물학적 측면 -Metaphysica VII권을 중심으로-」, 199쪽.
12) Wedin, M., Aristotle's Theory of Substance - The Categories and Metaphysics Zet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3) Spellmann, L., Substance and Separation in Aristotl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45.
14) Ibid., p.44; Loux, M., OUSIA. An Essay on Aristotle's Metaphysics Z and H (Ithaca, 1991); Lewis, F., Substance and Predication in Aristotl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15) De Anima III, c.1, 412a 6; Analysis Postetior I, c.32, 88b1-2; Physica I, c.5, 89a 14, b 23.
16) Meta., VII, c.3, 1028a 33.
17) Ibid., VII, c.3, 1028a 34-35.
18) Frede, M., Patzig, G., Aristoteles "Metaphysik Z - Text, Uebersetzung und Kommentar" Bd. 2., S.22.
19) Raff, Ch., "Substanz als Vorrangig Seiendes(Z 1)" In Metaphysik - Die Substanzbuecher (Ζ, Η, Θ), p.38. 또한 중세적 이해는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서 확일할 수 있다. 그는 ꡔ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ꡕ(De sente et essentia)에서 실체(substantia)를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라고 단언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ꡔ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ꡕ, 김진, 정달용 옮김 (서울: 서광사, 1995), 2장, 19-35쪽.
20) 토마스 아퀴나스, ꡔ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ꡕ, 1장, 16쪽.
21) Topica I, c.9, 103b 25. 이에 관한 우리말 번역서는 다음의 것을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ꡔ변증론ꡕ, 김재홍 옮김 (서울:까치, 1998).
22) Ibid., 103b 30-35.
23) Ibid. I, c.5, 102a.
24) Thomas Aquinas, Expositio in metaphysicorum L.7, l.2, n.1273. 토마스는 오직 형상에 의한 실체인 ‘단순 실체’(영혼, 천사, 신과 같은 비물질적 존재)와 형상과 질료에 의한 ‘복합 실체’를 이야기했다. 이에 관한 토마스의 입장은 ꡔ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ꡕ에 잘 설명되어 있다.
25) Ibid. L.7, l.10, n.1496.
26) 요셉 드 프리스, ꡔ스콜라 철학의 기본개념ꡕ, 신창석 옮김 (왜관: 분도, 1997), 227-228쪽.
27) Thomas Aquinas, Expositio in metaphysicorum L.3, l.9, n.445; L.11, l.2, nn.2175-2176.
28) Ibid., L.7, l.13, nn.1584-1585; L.10, l.3, n.1963; L.12, l.4, n.2482.
29) Ibid. L.5, l.3, n.785; L.11, l.1, n.2172.
30) 조나단 반즈, ꡔ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ꡕ, 문계석 옮김 (서울: 서광사, 1989), 87쪽.
31) Meta., VIII, c.3, 1043b 1.
32) Ibid., 1044b 12.
33) Brennana, Sh., "Subatance and Definition: Metaphysics ZH", p.35.
34) Meta., VII, c.5, 1031a 1-2.
35) Ibid., VII, c.4, 1030b 4-6.
36) Wedin, M., Aristotle's Theory of Substance, pp.2-5.
37) Liske, M., Aristoteles und der aristotelische Essentialismus (Freiburg-Muenchen: Verlag Karl Alber, 19985), S.305.
38) Meta., VII, c.8, 1034a 5-8.
39) Ibid. VII, c.11, 1036b 22-25. 여기에서 필자는 다음의 현대어를 참고하였다. The Metaphysics of Aristotle, trans. W. Ross (Oxford: Clarendon Press, 1966); Metaphysik, trans. H. Bonitz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95).
40) Cat., V, 2a 10 이하. ꡔ범주론ꡕ에 관하여 필자는 다음의 현대어 역본을 사용한다. The Categories, on Interpretation, Prior Analytics, trans. H. Cooke & H.Tredennick (London, 1973); Kategorien, trans. K.Oehler (Berlin:Akademie Verlag, 1986); Die Kategorien, trans. I. Rath (Stuttgart: Reclam, 1998).
41) Brodie, S., "Problems of Aristotle's Concept of Form" The Journal of Philosophy LXXXIV (1987), p.680.
42) Rath의 독일어 번역에서는 eidos를 우리말 ‘형상’에 준하는 독일어 form으로 옮기지만, Cooke는 species로 옮기고 있다.
43) Averroes, Middle Commentary on Porphyry's Isagoge and Aristotle's Categoriae, trans. H. Davidson (Berkeley-Los Angeles: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9), pp.9-13.
44) Cat., V, 2.a 11-16.
45) Irwin, T., Aristotle's First Principles (Oxford: Clarendon, 1988), p.58.
46) Cat., V, 2b 7.
47) Ibid., 2b 20이하.
48) Ibid., 3b 10이하; Averroes, Middle Commentary on Porphyry's Isagoge and Aristotle's Categoriae, p.39.
49) Oehler, K., "Anmerkungen" In Kategorien, S.262.
50) Ibid., p.267.
51) Cat., V, 3b 20-24.
52) Meta., V, c.14, 1019b 34이하.
53) Cf. Meta., VII, c.3.
54) Meta., VII, c.8, 1034a 5-8.
55) Ibid., V, c.24, 1024b 4-6; Top., 24, 141b 25.
56) Irwin, T., Aristotle's First Principles, p.263.
57) Meta., VII, c.11, 1036b 22이하.
58) Frede, M., Patzig, G., Aristoteles "Metaphysik Z - Text, Uebersetzung und Kommentar" Bd. 2, S.209, S.219.
59) Meta., V, c.14, 1020a 34-1020b 1.
60) Ibid., VII, c.13, 1038b 13.
61) Ibid., VII, c.13, 1038b 10.
62) Ibid., VII, c.13, 1038b 15.
63) Ibid., VII, c.13, 1038b 30이하.
64) Ibid., VII, c.14, 1039b 5-10이하.
65) 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 본질론의 생물학적 측면 -Metaphysica VII권을 중심으로-」, 215쪽.
66) 강상진,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사물과 본질-동일성과 동음이의 사이」, ꡔ철학연구ꡕ 60 (2003), 45-62쪽.
67) 같은 책, 61쪽.
68) 같은 책, 59쪽.
69) Meta., V, c.14, 1020a 33-1020b 1.
70) Ibid., V, c.18, 1022a 15-20.
71) Cf. Tweedale, M., "Aristotle's Realism" In Aristotle Critical Assessments Vol.1, ed. L.Gers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9), p.409.
72) 중세 개체화 원리에 관한 논의는 다음의 타월한 저서를 참고해야만 할 것이다. 조지 그라시아, ꡔ스콜라철학에서의 개체화ꡕ, 이재룡, 이재경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그 외에도 다음의 연구서들이 있다. 박우석, 「공통본성의 귀환: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한 스코투스의 현묘한 논변들」, ꡔ서양 고대철학의 세계ꡕ, 한국 서양 고전 철학회 편 (서울: 서광사, 1995), 331-354쪽; 이재룡,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체화 원리」, ꡔ가톨릭 신학과 사상ꡕ 45 (2003/가을), 102-140쪽.
73) 여기에서 필자는 개념론의 논의는 크게 유명론에 포함하는 모험을 했음을 밝혀둔다. 개념론은 ‘인간’과 같은 것을 그저 바람의 소리나 이름만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즉 보편은 정신 가운데 일종의 개념(intentio)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옥캄과 같은 이들이 이러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유명론과 마찬가지로 보편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하였기에 크게 유명론에 포함하여본다. D.햄린, ꡔ인식론의 역사ꡕ, 이태하 옮김 (서울: 소나무, 1991), 33-39쪽.
74) Bostock, D., Aristotle Metaphysics Book Z and H (Oxford: Clarendon, 1994), pp.189-190.
75) Madigan, D., Aristotle Metaphysics Book B and K 1-2 (Oxford: Clarendon Press, 1999), p.143.
76) Meta., XIII, c.10, 1087a 2.
77) Ibid., III, c.6, 1003a 7-8.
78) Ibid., VII, c.3, 1029a 20-24.
79) Modrak, D., Aristotle's Theory of Language and Mean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 2001), pp.200-202.
80) Meta., VII, c.3, 1028b 28이하.
81) Ibid., VII, c.3, 1029a 10-20.
82) Mann, W., The Discovery of Things - Aristotle's Categories and their Context (Prinston: Prinston University Press, 2000), p.44.
83) Ibid., p.4.
84) 조요한, ꡔ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ꡕ, 229쪽.
85) Kirwan, Ch., Aristotle Mataphysics Γ, Δ and Ε (Oxford: Clarendon, 1998), p.149.
86)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박영도 옮김 (서울: 서광사, 1988), 194쪽; 유대칠, 「중세 개체화 이론의 성립과 전개 그리고 그 철학적 의의」(http://wissen.com.ne.kr/).
87) 같은 책, 209쪽.
88) 막스 밀러 외, ꡔ철학 소사전ꡕ, 강 성위 옮김 (대구: 이문출판사, 1988), 68쪽; 알랜 볼터, 「둔스 스코투스」, ꡔ스콜라철학에서의 개체화ꡕ, 459-510쪽; 요셉 드 프리스, ꡔ스콜라 철학의 기본개념ꡕ, 신창석 옮김 (왜관:분도출판사, 1997), 35-42쪽; 박우석, 「공통본성의 귀환: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한 스코투스의 현묘한 논변」.
89) Mansion, S., "Die erste Theorie der Substanz: die Substanz nach Aristoteles" In Metaphysik und Theologie des Aristoteles, ed. F.Hager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79), S.121.
90) An. Post., I 4, 73b 5-8; I 22, 83a 24-28; Phys. I 2, 185a 31-32; I 7, 190a 36-37; III 5, 204a 23-24.
91) Kirwan, Ch., Aristotle Mataphysics Γ, Δ and Ε, p.148.
92) Cf. Annas, J., Aristotle Metaphysics M and N (Oxford: Clarendon, 1999(2ed)), p.190.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에 의하면, 근본적 개별자는 형상을 가지지만 이것은 개별자로부터 분리된 그러한 형상, 즉 보편자p는 아니다.
93) 조요한, ꡔ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ꡕ, 229쪽.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이의 문제와 발전론적 관계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G.E.L.Owen, "The Platonism of Aristotle", (Dawes Hicks Lecture on Philosophy British Academy 1965); ed. W.Wians, Aristotle's Philosophical Development Probleme and Prospects, (London: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996).
94) Wedin, M., Aristotle's Theory of Substance, pp.2-5.
95) Mansion, S., "Die erste Theorie der Substanz: die Substanz nach Aristoteles", S.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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