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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철학사

유 암브로시오의 나만의 철학사 - 샤드, 사상을 위한 폭판 테러~

샤드, 사상을 위한 폭탄 테러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씀


샤드는 이질적 존재다. 문제아이며, 철학자인가를 의심스러운 인물로 여겨진다. 많은 철학사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즉 철학자가 아니다. 일부에겐 변태성욕자 정도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샤드를 철학자로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철학을 통하여 그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통하여 근대 철학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왜 그는 이란 문제를 두고 고민한 것인가? ‘이란 일종의 도덕이다. 성의식에 대한 도전은 곧 강력한 도덕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 도덕에 대한 도전은 항상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며, 이 전통이란 하나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일종의 교조주의적 입장과 관련되기도 한다. 샤드가 파괴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샤드는 근대가 만든 괴물이다. 근대는 세르베투스와 같은 이방인들, 즉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제거한다. 용납하지 않는다. 고대 지중해 연안의 철학은 삶의 방식이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용인되었고, 그 삶의 방식이 근거하는 나름의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히파르키아(Hipparchia)와 크라테스(Crates)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성행위를 하였다. 근대인들에게 이는 곧 광기 어린 행위이며, 격리되어야할 행위였다. 근대는 하나의 기존을 제시한다. 그 기존은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각자의 욕망을 감시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근대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합리화되지 못한 미개인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근대 유럽은 스스로 이성이 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리화하려 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잔혹한 선행, 즉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려 했다. 이들이 얼마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미개인으로 보았는지, 그리고 그들만이 인간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간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는가는 20세기 초 까지 박람회장에 아프리카인과 조선인 등을 진열한 것으로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20세기 초반 피그미족의 청년 오타벵가는 박람회장과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 생활을 했다. 많은 인권 단체가 비판을 하여, 그는 풀려났지만, 오타벵가는 굴뚝 청소부를 하며 모은 돈으로 권총을 사 자살을 한다. 오타벵가를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 가두는 근대 유럽과 미국 등의 수구적이고 교조적인 독단! 결국 세르베투스와 오타벵가는 서구의 획일화된 합리성의 잔혹한 살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는 다양성 보다는 통일성을 추구한다. 통일성은 다수의 욕망을 거부하고, 하나의 욕망만을 인정하게 한다. 그 하나의 욕망은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다수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보자. ‘보지자지라는 말은 금지어. 이 말은 성기를 지시하는 언어, 즉 성욕과 관련된 언어, 다르게 이야기하면 개인적 욕구와 관련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금기시 된다. 그런데 사실 보지’(寶池)란 말의 어원은 보배로운 연못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본다. 남성의 자지와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는 의미와 소중한 생명이 등장하는 공간이란 의미 혹은 한 우주를 만들어내는 통로라는 의미를 가진 아름다운 곳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남성의 자지’(子枝) 역시 자식을 낳는 가지라는 뜻이다.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내는 줄기라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욕설이나 경멸의 의미를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표현은 욕이 되었다. 즉 거부되어야할 금지어가 되었다. 성의 순수성을 부정하고, 이를 금지어로 만든 것은 인간이 가진 궁극적 욕구에 대한 사회의 입장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듯이 보인다. 보지나 자지가 금지어가 된 것은 이들 개인의 욕구가 금지 대상이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욕구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며, 이는 절대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지 않아야할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근대는 획일화의 시대다. 개인의 욕구들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다수성의 욕구를 인정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근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의 이성과 하나의 욕구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세르베투스는 생각의 획일화에 의하여 죽어졌고, 오타벵가는 백인들의 잔혹한 우월주의에 의하여 죽어졌고, 샤드는 욕구의 획일화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물론 이 셋은 모두가 생각과 욕구의 획일화하는 하나의 서로 다른 드러남이다. 샤드는 바로 이러한 시대에 도전했다.

 

샤드가 이야기하는 기괴한 성행위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성이란 가장 은밀한 인간의 고유한 도덕성과 관련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을 이해하는 주요한 핵심 요소다. 바로 이 성과 관련된 욕구를 샤드는 자유로이 두라고 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폭발하라고 한다. 물론 여기에서 샤드에 동의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 샤드를 통하여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근대의 모습이다. 근대는 획일화의 시대다.

 

근대는 유럽만이 지구를 다스려야 하고, 그 유럽 가운데 그리스도교적 가치만이 인정을 받고 그 기준으로 모든 것이 획일화한 시대였다. 지금도 이 근대화의 잔혹한 모습은 우리에게 남아있다. 미국이나 서구가 더 근사해 보이는 것은 바로 세상의 중심은 유럽으로 보려는 2-3백 년 전 유럽의 잔혹한 행위의 잔재다. 샤드는 하나의 획일화를 벗어난 다양화를 지향한다. 즉 폭탄을 들고 기존의 획일화된 가치를 공격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공격은 스스로 불사르는 일종의 자살 폭탄 테러다.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자신은 자신의 철학에 따라 정신만은 자유로운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비록 오랜 구금의 삶을 살았지만 말이다. 분명 그 자신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서 격물궁리의 결실에 따라 살았다. 이러한 철학자, 즉 자신이 우주의 이치를 궁리하고, 이에 따라 살았지만, 결국 그는 철학사에 편입되지 못했다. 즉 철학의 외부로 버려졌다. 일부에선 그를 포르노적 인물로 다룰 뿐이다. 그는 폭탄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결국 그의 산화는 그를 향한 오해과 당시의 획일화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그저 포르노물의 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과거 히파르키아와 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성행위를 했지만, 이들은 철학자로 여겨졌다. 샤드와 다른 시대를 살았다. 샤드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 즉 철학을 가지고 행위했다. 그냥 이유 없이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다. 분명한 자기 이해가운데 고유한 삶에 대한 방식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 행위 한 것이다. 히파르키아와 크라테스 그리고 샤드는 모두 철학자다.

 

중세를 보자. 앞서 보았듯이 중세는 생각보다 다양성의 공간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사회이기에 성관계를 자유로이 허락한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생각의 차이에 대하여 죽여 사라지게 할 그러한 사회는 아니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유대인 신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도 거부의 대상이 아닌 긍정적 혹은 부정적 수용의 대상이었다. 그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합리적 사유, 즉 철학과 신학에 발전에 사용하였다. 즉 신앙이 다른 이의 철학과 신학과 대화하여 활용하였다. 마이모니데스의 철학은 화형의 대상이 될 정도가 아니었다. 동방정교회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요하네스 다마스쿠스(Jahannes Damascus) 역시 그렇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거물 철학자와 신학자에게 다마스쿠스는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신학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부의 대상이 아니며, 그의 이성에 따른 철학은 분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앞서 말한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와 같은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도 수용되었다.

 

중세는 신에 대한 하나의 신앙이었지만, 그 신앙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했다. 즉 신학과 철학의 다양하게 복수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란 시기를 지나면서 신학자들은 하나의 신앙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노선을 만들고, 이 노선은 결국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이에 따라 유럽의 두 흐름, 즉 구교와 신교는 저마다 다양성 보다는 교과서를 만드는 시대로 접어든다. 다양성보다는 서서히 획일화의 시대를 나아가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제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 즉 오캄,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등 서로 생각이 다른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의 흐름이 조금 둔화된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개신교는 저마다 다른 생각에 따라서 분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 분화된 각각의 조각들은 서서히 자기중심으로 응집되어 버린다. 자기 가운데 외부의 문을 닫고 철저하게 자기 내부 획일화에 힘을 쓴다. 샤드, 그가 싸운 것은 바로 이러한 획일화에 대한 도전이다. 정리하며 생각해보자. 세르베투스는 종교의 획일성, 하나의 신앙관에 의하여 죽게 되고, 오타벵가는 하나의 피부색만이 인간이란 획일성에 의하여 죽게 되었고, 샤드는 하나의 허락된 욕구만이 욕구되어야한다는 욕구의 획일성에 의하여 감금(監禁)되고 탄압을 당했다. 결국 이들은 획일화된 사회의 잔혹한 선행의 희생자들이다.

 

이제 세르베투스와 오타벵가가 죽게 되고, 샤드가 무시되는 그 근대의 넘어 있는 다양성의 중세를 다루고자 한다. 그 중세의 다양성을 확인해 보려고 한다. 다양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진지들이 서로 어떻게 싸우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앞으로 우리의 논의는 바로 그 다양한 진지들이 서로 논박하는 전쟁 관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