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암브로시오의 유라시아의 철학들 2
유대칠 암브로시오 (토마스철학학교) 적음
유라시아에 무엇인가 변화가 생겼다!
기원전 6세기를 보자. 너무 오랜 과거이기에 정확하게 살필 순 없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무엇인가 유라시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스엔 탈레스(Thales)와 같은 철학자가 등장한다. 이 역시 정확하지 않지만, 인도 부근에선 석가모니(Sakymuni)가 등장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무렵 중국에선 공자가 등장한다. 이렇게 유라시아의 대표하는 사상계의 큰 횟이 기원전 6세기에 그어진다. 탈레스가 누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석가모니와 공자는 아직도 아시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강력한 사상 체계의 씨앗을 내린 인물이 아닌가? 이들 사상계의 거장들이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났고, 활동 하였다. 왜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날 무렵 기원전 6세기경의 인도 사상계는 매우 복잡했다.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좀 극단적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사회는 조금씩 풍요로워지고 그에 따라서 사회는 조직화된다. 이러한 조직화 가운데 신분제가 등장하기 시작하다. 사제, 왕족, 서민, 노예라는 네 가지 신분제가 서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사상적으로 기존의 바라문사상에 대하여 사문(沙門)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도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도전 가운데 하나의 싯다르타가 되겠다. 당시 바라문들은 베다교를 중심으로 종교적 사회의 중심에 섰다. 이들 바라문들은 태초에 브라만이란 신이 있었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라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며, 그 자체가 우주의 본질이며 실체로 보았다. 이들은 브라만들은 베다 경전을 체계화하고, 종교적 행위를 독점해가기 시작했다. 이에 사문들은 새로운 세계관과 우주관 그리고 존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걸식을 하기도 하며 당시 시대의 기존과 다른 삶과 생각의 체계를 보였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라문의 브라만교의 경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체계의 외부로 나아갔다. 반면 이러한하 걸식을 하며 수도 생활하는 사문에 비하여 바라문은 왕족과 귀족의 경제적 원조 속에서 활동하였다. 물론 이들은 베다 경전의 권위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권위 근거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시 인도의 사상계는 복잡했다. 일부는 흙, 물, 불, 바람만으로 이 세계는 이루어지며 영혼 따위는 없다는 유물론을 주장하였고, 또 일부는 도덕에 대하여 회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인간 행복과 불행이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며, 우연과 필연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21세기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완전히 욕심을 버리고 살기 위하여 나체로 엄격한 계율과 고행으로 육체적 욕망으로 부터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문들의 사상들과 전통적 바라문의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에 싯다르타가 등장한다.
혼란 속에서 당시 인도인들은 고민한다. 과연 무엇이 참으로 잘 존재하는 것인가? 다르게 이야기하면 어찌 하면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어찌 살야지 잘 사는 것인가? 다양한 철학과 존재론이 가득한 그곳에서 고민하고 고민한다. 싯다르타가 거기에 등장한다. 그의 존재론적 입장은 잔혹하다. 그는 어찌 보면 유물론자들의 성과도 가져온다.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있다. 어떤 의미에서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자에 대한 결실도 가져온다. 그리고 베다 경전에 대한 거부라는 입장도 가져온다. 이러한 고유한 다양한 사고들이 싯다르타 가운데 공유되고 교류하며 융합된다. 그리고 새로운 고유함이 탄생한다. 그의 존재론이다. 그는 모든 것이 지수화풍의 결합이라면, 그것이 우연에 의하여 합하고 떨어진다면,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탐할 것인가 묻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공'하다. 있기는 하지만 비워져 있다. 있는 모든 것을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며, 하나의 인연 그렇게 사라지도 또 다른 것이 또 다르게 태어난다.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에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욕심을 낼 것인가? 결국 사라질 것에 대한 욕심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신분제 사회에 대하여 거부하며, 신분제를 벗어난 이념 속에서 수도자관을 제시한다. 수도자는 비록 세상에서 바라문이고 왕족이라 하여도, 수도자인 한에서 그는 그저 한 명의 수도자일 뿐이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그저 덧없는 것들일 뿐이다. 욕심 가득하여 혼란한 세상에 대하여 싯다르타는 욕심을 버리라고 하고, 신분제 사회에 대해선 신분제가 덧없는 허상이라고 한다. 지금 스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지 모른다. 산 속에 숨어 들어 수행하는 인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싯다르타의 사상은 매우 진보적이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도발이다. 머리를 깍는다는 것, 당시 머리 모양으로 신분을 구분하던 시기! 머리를 깍는다는 것도 일종의 도발이다. 싯다르타는 도발라는 존재였다. 싯다르타는 신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우주, 즉 신의 뜻에 따라 살아야하는 인간, 그리고 그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종교인인 바라문의 권력을 거부한다. 그에게 우주는 신의 우주가 아니며, 진정한 진리는 종교인 사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거부한다. 인간의 실존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스스로 구성해 가야 한다. 수행은 신이나 사제의 손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종교적으로도 싯다르타는 매우 진보적이다. 그는 틀을 부순다.
이러한 도발은 그리스에도 있었다. 머리가 아프면 우리는 사제와 같은 종교인에게 찾아가지 않고, 병원의 의사사 찾는다. 일식이나 월식이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통증은 신의 저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 원인을 연구하여 제거하면 통증을 덜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일식이나 월식도 예견한다. 만일 신의 저주, 즉 신의 심리에 의한 것이라면 신의 변덕스러움에 의하여 병이 생기고 일식 등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우주의 미래를 예견할 수도 없고, 병을 치유할 수도 없다. 신에게 기도를 하고 정성을 다하여 치유해주길 기도할 뿐이다. 사실 과거 고대의 인간은 그러했다.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면 왕을 재물 삼아 죽이기도 했다. 나라 자체의 원인보다는 신의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주를 인간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신의 관점으로 보았다. 우주는 신의 것이고, 인간은 그저 잠시 그곳에 머물 뿐이라 생각했다. 우주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관점으로 생각되고 파악되었다.
탈레스는 인간의 관점으로 우주를 보자고 한다. 탈레스는 우주를 '물'이라는 원리(arche)로 구성된다고 한다. 신의 의지나 뜻에 의하여 우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 가운데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이제 우주는 인간이 논의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지성으로 우주를 고민하고 그 원인을 탐구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우주를 네 가지 원인으로 우주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원인에 대한 탐구와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은 서양 학문의 근간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확인하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 치유하는 결과를 낳는다. 탈레스는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우주를 논하기 시작한다. 우주 내부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 원리를 통하여 우주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신의 도움 없이 말이다. 이러한 탈레스의 노력은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공유되고, 그 공유 가운데 고대 그리스 철학이란 고유한 체계만 만들어진다.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짜 참된 민낯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흔히 하는 말로, 우주의 생얼을 탐구한다. 싯다르타는 공허함이라고 했다. 그리스인 그 가운데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고 한다. 싯다르타가 생각한 우주의 생얼은 공허함, 즉 고정되이 있지 않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현실이며, 그 현실은 영원하지 않으며 공허하다고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현실의 감각적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이데아, 즉 이상향이라고 한다. 이상향은 현실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다. 현실이 향할 지향점이며 목표다. 플라톤은 바로 그러한 이상향이 참된 존재, 즉 진짜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의 감각적 기쁨은 덧없는 것이지만, 플라톤은 우리의 이성에 고유하게 녹아 들어있는 그 이상향은 참된 존재이며, 그 참된 존재를 향하여 나아가 살아가라고 한다. 현실과 달리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으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현실을 넘어선 바로 그 이상향! 그것이 플라톤에겐 인간이 향해 살아야할 이상향이며, 참된 존재다. 그리고 그 참된 존재를 대상으로 살 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도발이다. 우주의 중심이 아닌 인간이 신으로 설명되던 우주를 스스로의 이성으로 사유하기 시작하였다. 원인을 궁리하고, 그 궁리의 결실에 의하여 참된 존재를 파악하고, 그 참된 존재에 따라서 참된 행복을 누린다는 생각, 이것은 당시 일종의 도발이었다. 인간의 세상이 열렸다. 신으로 부터 그저 말을 듣던 존재에서 인간은 대화의 한 편이 되어간 셈이다.
중국 역사에서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는 황금기다. 바로 제자백가의 시대다. 당시 중국은 씨족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고, 예문화 마저도 무너지면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요청되었다. 현실 삶의 변화는 그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요구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어찌 살아야지 이 세상에서 의미있게 살수 있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도 자체적인 정치 배경과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궁리하는 가운데 고대 철학이 등장하게 되었고, 인도 역시 그와 같다. 중국도 다르지 않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나이, 스파트라, 코린토스 등 여러 도시들이 지배적인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폴리스, 즉 도시국가는 주변 농촌과 작은 마을을 흡수 강악하고 주요 해상 무역과 상업을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그리스 외부에서 그리스 내부로 많은 지식인들이 유입된다. 소피스트들 가운데 상당 수가 외부에서 온 인물들이다. 이들이 유입되고, 또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정치 체계를 두고 이런 저런 고민을 다가 보면, 인간은 참 행복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인생 그 자체에 대하여 고민하게도 된다. 중국도 다르지 않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이후 동주 시대 전체적인 지배권이 약해지자 제후들 사이에 세력을 추구하며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참담한 시대가 열린다. 이 약육강식의 시대는 사회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대 변혁기였다. 주나라의 봉건 제도가 무너지자, 당시 중국인은 이 혼란기를 해결할 새로운 지도적 이념 혹은 사고의 방식을 궁리하게 된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저마다 진단하고 처방한다. 공자, 노자, 묵자 등은 모두 이러한 시대의 인물들이다. 공자는 '인'을 강조한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함이며, 이는 부자지간에서 시작하여 민중과 국가 사이로 확대되어 간다. 그는 '인'으로 이러한 당시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인'의 마음은 인간 고유의 본성 인도이며, 이것을 구현될 때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신을 강조하는 종교인들의 사유와 달리 그의 고민 자체는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어찌 이 혼란기에 조화롭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기원전 6세기의 어느 날이라고 확정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렵이다. 유라시아에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사회 경제적 변화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유라시아의 사람들은 그 변화 가운데 새로운 사고의 체계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새롭게 시작된 체계화된 사회 속에서 참된 행복은 무엇이고, 진정 나로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고민에 대하여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의 방식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방식으로, 공자와 노자 등은 또 그들의 방식으로 답을 한다. 불가의 <유마경>, <대열반경>, <화엄경> 등은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니코마코스윤리학> 등과 다르지만 유사한 질문에 대하여 고민하고 답을 한다. 자세히 보면 공유하는 무엇이 있고, 그 공유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 다른 고유한 답을 제시한다. 이들은 하나 같이 고민한다. 무엇이 참된 존재이며, 어찌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나의 존재 방식에 일치하는 바른 삶의 방식인가? 그리고 이들 질문에 대하여 서로 다른 고유한 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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