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를 향한 열망!
- 보편자를 궁리하기 시작하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씀
아픔은 기쁨을 알려준다. 2009년 교통사고로 나는 생애 첫 입원을 했다. 수술도 했다. 내려앉은 왼쪽 얼굴을 올리기 위해 수술을 하고, 부러진 발목도 수술을 했다. 얼굴 수술은 10여일 후에 다시 이루어졌다. 매일 얼굴에서 고름을 싸내었다. 죽을 듯 이 아팠다. 뇌출혈 때문인지 귀속에 물이 들어간 듯이 소리가 울렸다. 손과 발이 간혹 맘대로 움직이며 통제가 되지 않았다. 잔혹한 시간이었다. 이제 진짜 나인가! 답답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아파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꿈일까? 뇌출혈 이후 나의 뇌는 정상으로 기능할까? 발은 어떨까? 제대로 걸어 다닐까? 간혹 통제되지 않고 움직이는 손발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이렇게 남은 삶도 살게 될까 두려웠다. 이 현실이 가짜이길 바랬다. 아프고 힘든 이 현실이 가짜이긴 바랬다. 그냥 꿈이거나 환상이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짜였다. 가짜가 아니었다. 병실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지내는 이 사람이 나였다. 진짜 나였다. 휠체어를 스스로 타곤 좋아하며 혼자 화장실을 가는 것으로 기쁨으로 여긴 그 나약한 존재가 나였다. 진짜 나였다. 진짜로 가짜이길 원한 그 약하고 아프고 시리고 상처를 가진 그가 진짜 나였다. 수긍해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서유럽의 중세를 보자. 서유럽의 중세는 잔혹했다. 잔혹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배고픔은 일상(日常)이며, 페스트가 수많은 이를 죽이고, 가난 속에 허덕이며 고통 속에 살아가다 대부분 30세가 되면 죽어버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希望)도 현재에 대한 기쁨도 구하기 힘든 고통의 시공간이었다. 나누어 먹을 것이 없어 살아있는 부모가 새롭게 태어난 생명을 다리 밑에 던져 죽이는 잔혹한 시공간이었다. 지금은 무척이나 깔끔하고 정리된 유럽이지만, 중세의 유럽은 청결과 거리가 멀었다. 기다란 천을 한 장 몸에 두르고 살던 유럽인들이 있었다. 굳이 의복이란 이름을 부여하기도 힘든 그러한 차림으로 살던 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가 바로 중세다. 아기를 키울 여유가 없어 부모가 아기를 다리 아래로 던져버리던 시대, 몸도 맘도 힘든 시대, 정말 비극 그 자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이 지금 유럽의 과거였다. 그곳이 바로 지중해 연안 서유럽 중세다. 잔혹하고 혹독한 이러한 현실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이 현실은 그리스도교가 이야기하는 원죄(原罪)를 진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힘겨움의 공간이었다. 죄의 대가(代價)로 살아가야하는 지옥과 같은 공간이었다. 현실에서의 행복이란 생각하기도 힘들며, 사후의 행복이 어쩌면 유일하게 주어지는 희망과 같이 들리던 그러한 시대였다. 가끔 ‘관념’(觀念)의 현실은 ‘감각’(感覺)의 현실을 지배한다. 서유럽의 중세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이 현실은 배고픔과 가난 그리고 질병의 공간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가짜이길 바라는 그런 현실이다. 이것이 중세 유럽의 ‘감각’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죄인인 인간’의 통탄할 ‘죗값’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했다. 중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며 스테디셀러인 교황 이노첸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인간 상태의 비참함에 대하여』(De Miseria Humanae Conditionis)는 당시 민중이 생각한 인간 존재에 대한 한 면을 보여준다. 구역질나는 정자(精子)와 불온한 육욕(肉慾)인 성욕(性慾)으로 탄생하여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비참한 현실 속에서 죄인으로 살다가 결국 죽게 되는 인간, 결국 죽음을 위해 태어난 비참한 존재일 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관은 단지 인간뿐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이어진다. 세상 역시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이미 4-5세기 리옹의 에우케리우스(Eucherius Arelatus)가 적은 『세상의 경멸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라는 제목의 참담함과 이후 12세기 클루니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Morlanensis)가 동명(同名)의 저작을 저술한 것을 통하여 중세인의 세상에 관한 슬픈 생각을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감각의 현실은 가짜로 여겨졌다. 감각의 배후로 사람들을 향했다. 눈에 보이는 이 지상은 진짜가 아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존재를 향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예쁜 여인의 미모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로마(Roma)와 같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강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황제의 권력 역시 인간의 이기심 속에 죽이고 죽는 과정 속에 사라져간다. 배불리 먹어도 곧 배고프고 태어난 살아가지면 이는 곧 죽음이란 이미 확실히 정해진 결과로 향하는 여정일 뿐이다. 모든 것이 지독하게 싫은 것들뿐이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든 좋은 것이 허무해 보였다. 서유럽의 민중들 사이엔 어쩌면 서서히 ‘보편실재론’이 들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하나의 개별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 아무리 좋은 건물도 어느 순간 폐허(廢墟)가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아예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현실이다. 감각되는 개별자의 세계다. 개별자는 태어나면 사라진다. 그러면 보편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수많은 책들이 만들어지고 소멸되었지만, 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 종이책이건 전자책이건 모양과 형태는 상이해도 책 그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몇 권이 태워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만일 ‘책’이란 보편자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 ‘책’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사라져야 한다.
‘개별자’와 ‘보편자’는 무엇일까? 인간 사회의 예로 들면 개별자는 ‘개인’이다. 개인은 더 이상 나누면 철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더 이상 하나의 개인, 즉 개별자로 의미가 없어진다. ‘이황’이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동일성(同一性, identity)을 유지하는 한에서다. 이 개별자 ‘이황’은 ‘인간’이란 술어(述語)로 서술된다. 또 이 ‘인간’이란 술어는 ‘이이’와 ‘류성룡’에게도 적용된다. “이황은 인간이다”와 “이이는 인간이다” 그리고 “류성룡은 인간이다”는 모두 참된 명제다. 거짓이 아니다. 여기에서 이들 다수의 개별자들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인간’이란 술어를 우린 ‘보편자’라고 부른다. 언젠가 한 무리의 인문학 모임에 가서 발표를 하나 질문을 받았다. ‘이황’도 수백 가지 세포들이 모인 보편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자는 보편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편자는 단순히 전체 집합과 그 집합의 원소의 관계가 아니다. ‘이황’은 다수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때 보편자는 다수의 세포들에 대하여 서술되는 ‘세포’라고 술어다. 보편자는 기본적으로 술어다. 그것도 다수에 대한 공통 술어다. ‘이황’은 다수의 세포에 대하여 서술되는 공통 술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황’이 보편자가 될 순 없다. ‘이황’은 다수의 개별자에 대한 공통 술어가 될 수 없는 개별자일 뿐이다. 조선 시대 한 명의 철인이며, 이이와 논쟁을 한 인물이다. ‘이황’과 ‘이이’ 그리고 ‘류성룡’은 죽었지만, ‘인간’이 사라지진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개별자는 생기고 소멸해도 보편자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개별자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내 옆에 있는 개별자일 뿐이다. 보편자인 ‘인간’은 만져지지 않는다. 감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보편자는 이렇다. 지각이 되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다수에 대하여 공통되게 서술되는 술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지식 혹은 명제는 영혼 외부의 실재 대상과 영혼 내부의 개념이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영혼 외부엔 동화사 대웅전이 있는데. 이를 노트르담성당이란 개념으로 파악한다면, 이는 잘못된 지식이다. 그렇다면, “이황은 인간이다”라는 명제가 참이기 위해 ‘이황’과 ‘인간’은 영혼 외부에 실재해야 한다. ‘인간’에 준한 존재가 영혼 외부에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인간’이란 보편자는 영혼 외부에 실재한다. 또 이 보편자는 감각되지도 태어나기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인간’이란 보편자에 의하여 각각의 개별자들은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론적 영역에 참여함으로, ‘인간’으로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서유럽 사람들을 보자. 개별자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덧없다. 그러나 보편자는 영원하다. 개별자는 감각되며, 생겨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보편자는 이와 달랐다. 초월적이다. 중세 서유럽 사람들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개별자의 세상이 너무 잔혹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자의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보편자가 진짜이며, 개별자는 가짜다. 현실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내세에 대한 동경! 현실을 넘어선 신에 대한 동경! 이러한 맘들이 결국은 보편자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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