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상실한 신앙의 잔혹한 선행(善行)!
- 세르베투스 사살을 돌아보다.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적음
세르베투스에게 가해진 화형(火刑)은 중세 이후 유럽 세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중세 이후 등장하는 유럽, 즉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할 수 없는 무서운 세계, 확고한 하나의 기준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잔인한 세계, 서로 다른 차이는 용납될 수 없는 냉혹한 세계, 그런 유럽의 등장을 보여준다. 잔혹하고 잔인한 유럽, 많은 이들이 ‘중세 유럽’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바로 그 모습을 바로 세르베투스의 시대 ‘유럽’은 보여준다.
이 당시 유럽은 자기 이외 다른 모습은 용납하지 않았다. 유럽의 백인만 온전한 인간이고, 흑인과 황인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존재로 여겼다. 실제로 동물원이나 박람회에 조선인이나 흑인이 진열되기도 했다. 그러한 근거론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비합리적이며, 유럽만이 합리성을 가진 문화라고 믿은 사상적 자만이 있었다. 또 이 자만심은 유럽 내부에도 있었다. ‘외부’로는 황인과 흑인이 아닌 유럽 백인 중심이었고, ‘내부’로는 일종의 전통이란 하나의 교조적 모습이 마련되어가기 시작했다. 그것 이외는 사라져야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세르베투스는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그에 대해 논의하기 전, 우선 간략하게 그에 이르는 유럽 사상의 여정(旅程)을 살필 필요가 있다. 유럽을 떠나 아랍 지방에서 연구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후기 중세 유럽에 다시 유입되면서, 철학과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로 일종의 인간 이성의 최고 권위(權威)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적인 학문을 따르는 것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능동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능동성 속에서 이루어진 수용이란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주체적 수용을 의미한다. 주체적 수용이란 것은 수용자의 입장과 조건에 따른 변화를 긍정함이다. 이러한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단적으로 따르지도 않고, 극단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당시 학자들만의 고유한 견해와 입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시 철학자들의 자기 이성을 통한 긍정적 수용은 어느 정도 성공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중세 학자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시야를 자신감 있게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권위도 그냥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용해야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성에 따라 검증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사상사의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이 10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다. 1000년 로마의 사상과 문화를 간직하던 제국이 무너졌다. 그곳은 많은 학자들은 사라진 제국을 떠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서유럽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줄줄 할 수 있는 1000년 전통의 사상과 문화를 간직한 수많은 고전학자들을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라틴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의 고전이 아니라, 직접 고전어를 읽을 수 있는 많은 학자들을 서유럽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플라톤(Platon)과 플로티노스(Plotinos)도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도 과거 라틴어 번역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유입된 고전학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번역되기도 한다. 고전 문화의 부흥, 즉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장면이다. 본인은 이 역사적 장면을 중시 여긴다. 그렇기에 아마 이후 이 장면에 대한 논의가 소개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서유럽의 학자들은 주체적으로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자기 시야의 훈련을 마쳤다. 여기에 직접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고전학자들의 유입은 고전어라는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리게 했다. 주체적인 시야를 가진 학자들이 직접 고전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떤 철학적 고민을 해결하거나 한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장면은 지중해 연안의 사상사를 연구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흔히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르네상스 등의 사상사의 전환점은 모두 바로 이 장면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서유럽의 학자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성으로 고전을 읽게 되었다. 이 고전엔 『성서』(聖書, Biblia Sacra)도 포함된다. 『성서』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문으로 직접 읽으며, 읽은 이후 스스로의 고유한 이성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루터나 칼뱅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또 다른 한 편 세르베투스도 등장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루터와 칼뱅과 달랐다. 그는 직접 『성서』를 읽고 기존 그리스도교가 인정하는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들이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스로의 이성으로 고전을 읽을 때, 기존의 선입견으로 고전을 읽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배제되며, 오히려 기존의 질서의 회의(懷疑) 혹은 의심(疑心)의 대상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전통을 인정하고 그것이 ‘맞다’는 관점에서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 정신에 충실하게 『성서』를 읽었다. 그리고 그러한 독법의 결과, 기존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기존 그리스도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을 그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수능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일탈은 당시 그리스도교의 신교(新敎)와 구교(舊敎) 모두에게서 사라져야할 존재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이유가 그를 칼뱅의 앞에서 화형을 당하게 한다.
스페인의 신학자이며, 자연학자이고 인문주의자인 세르베투스는 수학,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인간 해부학, 의학, 약학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 가운데 특히 의학과 신학에서 그는 남달랐다. 예를 들어, 그는 폐(肺) 순환을 정확하게 기술한 첫 유럽인이기도 하며, 성서를 연구해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전개한 성서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탁월한 인문주의자인 그는 종교적으로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하며, 이를 이론화한다. 결국 그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으로 인해 기존의 가톨릭교회와 새롭게 등장한 개신교로부터 모두 단죄 당하게 된다. 그 단죄의 명분으로 세르베투스는 종교 개혁자 칼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네바에서 화형 당한다. 사상(思想)과 입장의 차이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고상한 신학의 고견(高見)을 제처 두더라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생각의 차이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 그 자체가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칼뱅은 세르베투스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화형을 일종의 ‘선행’으로 확고히 믿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칼뱅이 가진 신학적 견해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다. 개신교의 한 목회자가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뱅의 화형 집행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칼뱅의 행위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지 말자.” 맞는 말이다. 그 목사는 종교개혁사의 시대라는 당시의 시대는 신구교가 다수의 화형을 집행하던 시기이며, 세르베투스의 화형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고 했다. 신앙에 어긋나는 이를 정죄하고, 그를 화형함으로 격리(?)해야한다는 과격한 징벌론을 이야기하는 이도 보았다. 하여간 칼뱅에 대한 수구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칼뱅의 행위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에겐 이 역사적 사건이 가지는 정말 중요한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고집’이다. 당시 신교와 구교는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그 시대는 ‘극단의 아집(我執)’이 가득한 시기였다. 종교가 이성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극단의 아집’이 되어가던 시기였다. ‘아집’이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이다. 이 가운데 남은 없다. 있는 것은 자기뿐이며, 자신의 생각만이 있다. 타자에 대한 사상적 살인이 아집이다.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댈 미워하거나 경멸하고 싶지 않소. 물론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소. 하지만 그대가 올바른 교리를 무시하고,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한다면, 난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소.”
결연하다. 신앙심 가득한 이에게 이 구절은 어떠면 신앙의 결단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결연한 입장은 무섭다. 그리고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생각과 신념이 다른 이는 대화의 대상이 아닌 교화(敎化)와 교육(敎育)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른 이는 사랑의 매를 들어 바로 잡아 정상으로 만들어야하는 교화의 대상일 뿐이다. 이것이 극단적 아집의 결과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키는 것이 교리에 어긋한 거짓 선동자에 대한 선의의 태도라고 여겼다고 해도, 칼뱅 이후 이러한 ‘잔혹한 선행’은 역사적 비극을 만든다.
칼뱅은 자신을 술에 취해 비난한 어느 출판업자의 혀를 불타는 쇠꼬챙이로 자르게 하였다. 혀를 잘린 사람뿐 아니라, 이와 같은 극심한 고문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장애를 가지게 하였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처형 76명 사형 54명이다. 스스로 사상의 자유가 없는 칼뱅의 교조교의 가득한 제네바를 떠난 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뿐인가. 그가 제네바를 통치하던 시기, 싸움을 한 두 사람에게 사형을 실행했다. 서로의 살인이 아니라, 폭력범일 뿐인 이들에게 사형을 실행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더욱 더 잔혹하다. 이 싸움을 반역 행위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문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폭동 계획을 근거로 처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칼뱅 시기 제네바에서 자행된 행태는 마치 과거 독재 정권 시대 독재자에서 반대하는 이를 위하여 만들어진 거짓 진술과 그 진술에 근거한 잔혹한 학살을 연상하게 한다. 세르베투스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이러한 고문과 추방 그리고 살인은 성서적인가? 세르베투스는 수긍할 수 없었다.
칼뱅은 참으로 배타적인 인물이었다. 대화란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 적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사실 당시 신구교의 종교 재판은 피아식별(彼我識別)의 공간이었다. 적군인가 아군인가? 그것을 식별하였다. 칼뱅에게 세르베투스는 적군이며, 자신이 생각한 질서의 외부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라져야할 존재다.
칼뱅은 자신과 다른 예정설과 성서의 권위 그리고 삼위일체, 유아세례, 성만찬 이론을 가진 이들을 교화하고 교육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긍하지 않는 ‘외부자’는 용서치 않았다. 근대 철학의 종결자 헤겔(G.W.Hegel)을 보자. 그는 정-반-합을 이야기한다. 결국 ‘반’은 ‘정’의 대립자이며, 결국 이들 사이 차이를 제거되어야할 대상, 합으로 종합이 되면 사라져야할 것! 한마디로 없어져야할 것이 되고 만다. 이 말을 종교 개혁기에 적용해보자. 칼뱅에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어떤 이였을까? 아마도 그 차이는 거부되어야할 무엇이었을 것이다. 종교적 의무까지 거기에 부과된다면, 칼뱅에게 차이의 소멸 과정은 그 자체가 종교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종교인으로 이단을 제거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세르베투스와 자신의 차이를 칼뱅은 제거해야할 대상이며, 결국 세르베투스는 교화하여 칼뱅화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단을 이단으로 둘 순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종교적 의무라 믿었을 것이다. 이 믿음이 비극을 낳는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역사의 슬픔 상황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성서 연구의 결실을 내어 놓는다. 세르베투스는 신약 성서를 이전 해석의 도움 없이 직접 읽고 성서 속에서 성서의 참 뜻을 구하고자 했다. 인문학자로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 직접 고전을 해석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가 잘못된 것이란 파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즉 기존의 성서 해법과 다른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새로운 해법에 따라 자신의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담은 『삼위일체의 잘못에 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1531))을 출판한다. 기존의 삼위일체를 거부하며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신의 말씀이 결합한 것으로 보았고, 성령 역시 사람들의 영혼 가운데 활동하는 신의 능력이라고 주장하였다. 깊은 신학적 논의는 제쳐두고, 기존 그리스도교의 핵심 내용 가운데 일부가 성서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ii (1532))에서 더욱 더 분명해진다. 또 그는 이 모든 자신의 입장들을 정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재정립』(Christianismi restitutio (1553))을 출판한다. 『그리스도교의 재정립』은 제목만으로도 도전적이다. 한국어로 칼뱅의 주저는 『그리스도교(기독교) 강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종교의 정립』(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35))이란 제목으로 번역될 수 있다.
Institutio란 라틴어는 instituo의 명사형이다. instituo는 ‘건축물을 짓는다’ 혹은 ‘규정하다’, ‘계획하다’, ‘설립하다’, ‘가르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이러한 말의 의미를 살린다면, 그리스도교도들의 종교, 즉 그리스도교를 설립하고 정초하며 규정하며 가르친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따라 당시 Institutio라는 단어는 특정 학문을 규정하고 그 학문의 기초에서부터 초석을 다지며 작업하는 교과서나 참고서와 같은 서적의 제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프리스치아누스(Priscianus)에 의하여 라틴어의 구조를 철저하게 소개한 라틴어 문법서의 제목이 『라틴어 문법의 정립』(Institutiones Gramaticae latinae)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히브리어 문법서인 크리스토퍼 헬리히(Christoph Helwig)의 『헤브레아어 개요적 정립』(Hebraeae Linguae Compendiosa Institutio, (1610))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Institutio는 칼뱅만이 신학 작업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 루터 노선의 신학자인 니콜라우스 셀네커(Nikolaus Selnecker)의 저작 역시 『그리스도교인들의 종교의 정립』(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이다. 심지어 근대 철학의 대부(大父)인 크리스티안 볼프의 저작 역시 『형이상학 정립』(Institutiones metaphysicae)이다. 칼뱅은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법학도이기도 했다. 즉 법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그 당시 그는 법학도로 가이우스(Gaius)의 『법학 정립』(Institutiones)을 접했을 것이다. 또 신학적으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 군주의 정립』(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 1516)을 알았을 것이다. institutio라는 단어는 당시 지식인인 칼뱅에게 익숙했을 것이다. 그의 책에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이 단어는 당시 많은 책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칼뱅은 정립(Institutio)을 이야기했고, 세르베투스는 재정립(Restitutio)을 이야기했다. 두 인물이 가진 책의 제목이 이 둘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다. 칼뱅은 삼위일체를 믿었다. 세밀한 차이를 둔다고 해도, 고대 교부들에게서 일차적으로 정립되고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삼위일체의 견고한 틀을 유지하며, 그것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달랐다. 교부들에게서 중세 스콜라 철학자와 신학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삼위일체를 그는 성서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미 대가(大家)이며, 스스로 권위(權威)가 되어 제네바의 거성(巨星) 칼뱅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종교의 정립』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그가 가진 새로운 그리스도교, 즉 새로운 기반 위에 새롭게 세워져야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입장이 녹아든 『그리스도교의 재정립』란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목만으로 이미 충분히 칼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기존의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다. 세르베투스에게 칼뱅은 반쪽 개혁자였다. 이미 중세 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을 그저 적당히 자신의 입맛에 따라 정립한 것일 뿐이다. 세르베투스의 눈에 여전히 온전한 복원은 없었다. 이것이 당시 신학과 교회에 대한 세르베투스의 입장이었다. 세르베투스는 다음과 같이 칼뱅에게 편지한다.
“칼뱅, 자네는 교황이 반그리스도교적이라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면,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의 이론인 삼위일체와 유아세례 역시 악마의 교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일세.”
세르베투스는 스콜라 신학이 그리스 철학의 관점 속에서 읽어낸 성서 속의 다양한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정립을 넘어선 재정립을 실행한 것이다. 당시는 ‘의심의 시대’다. 세르베투스의 의심은 대단한 의심이었다. 다른 이들도 의심을 했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많은 종교 개혁가들은 기존의 질서를 의심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가톨릭교회 내부에선 예수회가 등장하게 되고, 일부는 가톨릭교회에서 벗어난 새로운 교회를 일구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의심에서 가능했다. ‘의심’은 새로움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강하게 반대하며 비판한 카스텔리오(S. Castellion)의 책 이름 『의심의 기술에 대하여』(De arte Dubitandi (1562))가 그 시대의 흐름을 말해준다. 의심은 새로운 대안에 이르는 출발점이다. 의심이 수많은 사상사와 학문사의 대가들이 낳았다.
세르베투스의 의심은 거부의 대상이었다. 그 의심의 결과로 그는 5시간 동안 칼뱅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채로 화형을 당한다. 이 잔혹한 행위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당시 신앙은 의심, 즉 이성의 근본적인 활동을 거부했다. 의심의 거부는 곧 다양성의 거부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의심은 루터와 칼뱅 그리고 예수회와 같은 다양한 학문적 결실을 만든다. 그러나 의심은 거부는 이러한 다양성 자체를 막는다. 신앙 자체는 동일하다.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의 신과 부활한 예수다. 이를 둘러싼 다양한 신학의 논쟁은 이성의 회의에서 기인한다. 그 회의는 다양한 신에 대한 여정을 만든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는 신을 향한 여정있고,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오캄(William Ockham)과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도 자신들이 생각한 여정이 있다. 이들은 서로를 논쟁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서로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긴 것과는 다르다. 오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그를 제거의 대상, 즉 이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시기는 다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 시작한다. 생각이 다른 것과 믿음이 다른 것이 동일시되기 시작한다. 가톨릭 교회를 다니면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는 목사가 생기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번 갈라진 교회‘들’은 내부 단속을 강화시킨다. 중세가 아닌 바로 이 시기에 다수의 화형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세르베투스는 신구교가 적어도 같이 인정하던 삼위일체를 거부했다. 그러니 그는 더욱 더 제거되어야할 인물로 여겨졌다.
칼뱅의 시대, 설교 시간을 웃었다고 투옥을 당한 이가 있었고, 부모를 구타한 불효자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닌 죽어야할 죄인이 되어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있을 수 없었다. 문제제기 자체가 스스로 제거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잔혹한 선행이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54명이 처형당한다. 이 가운데 세르베투스도 포함된다. 생각이 다름은 죽어야하는 이유가 되었다.
칼뱅의 사후에서 그리스도교의 잔혹함은 멈추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예수의 뜻이란 이름으로 양심의 가책 없이 잔혹한 선행을 저질렀다. 1585년-1635년 사이의 약 50년 동안, 마녀 사냥이란 이름으로 50만 명에서 최대 9백만 명이 사살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선 인노켄티우스 8세가 전염병과 폭풍이 마녀의 소행이라고 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제네바에서는 1542년부터 1545년까지 흑사병이 돌자, 이를 마녀의 소행이라며, 무고한 이를 고문하여 자백을 받고, 이를 근거로 마녀사냥을 시작하였다. 이때 제네바의 권력자가 행사하는 무오류성(無誤謬性)을 비판하고 의심하던 이도 1545년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슬픈 종교 잔혹극의 역사다.
16세기 유럽에서 남아메리카로 선교를 떠난 가톨릭 신도들은 840만 명에서 135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을 학살하였다. 이후 그들은 적어도 6000만 명에서 800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은 1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학살한다. 개신교회는 이곳에서도 가톨릭교회에 지지 않는다.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간 청도교들은 자신들의 ‘신’을 내세워 약 1억 명의 원주민을 학살했다. 그의 땅과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고, 그들을 사회적 최하층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언제가 나는 잔혹한 백인들이 흑인을 구타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를 화형 시키는 ‘사진’을 보았다. 그림이 아닌 ‘사진’이다. 즉 그리 오래지 않은 ‘현대’의 일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사진을 보라. 고통 속에 끈에 묶여 화형 당하는 이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시선을 보라! 그들에게 이 일을 어쩌면 악에 대한 도전이며,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다. 슬픈 현실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신을 믿지 않는다고 그가 악한 사람은 아니다. 죽어야할 사람은 더욱 더 아니다. 그런데 신을 믿지만, 신을 믿는 방식의 차이 혹은 신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죽음의 이야기가 되던 시기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진행 중이다. 다수성(multitude)이 용납되지 않으며 그저 무엇인가 강제된 하나의 통일성이 지배해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 무섭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말을 들어보자.
“반란하는 놈들이라면 누구든 찌르고 때려죽이세요. 만약 당신들이 그러는 동안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잘된 일입니다. 그 보다 더 축복받은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신의 말씀과 계명을 위해 죽는 것은 죽음과 악마의 손아귀에 있는 이웃을 구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진정 잔혹한 선언이다. 생각이 다르면 살인도 가능하다. 그 살인의 과정은 악마와의 전쟁이며, 그 전쟁 가운데 죽는 것은 그 자체로 이웃을 구하는 봉사의 선행이며 권장해야 할 일이다. 참으로 잔혹한 일이다. 세르베투스를 죽이는 것은 신의 뜻을 지키는 것이며, 악마의 손아귀에 빠질 위험에 처한 이웃을 구하는 ‘선행’이 된다. 참으로 잔혹한 선행이다.
중세를 보자. 중세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다양한 사상들이 가득하다. 물론 중세도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교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이들을 대환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를 죽어야할 존재로 보진 않았다. 예를 들어, 아비첸나(Avicenna)를 보자. 아비첸나는 무슬림이다. 즉 이슬람교에 신앙을 두고 있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신앙적 기본 속에서 다른 해석을 한다. 이 둘은 모두 유일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의 계명을 준수하며, 신의 영원성을 인정하며, 그 신에게 죄를 고백하며 사죄함을 받는다. 또한 이 신은 인간과 우주의 창조주이며, 심판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둘은 이 유일신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를 일으킨 아담,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5대 선지자로 여긴다. 이들은 신이 아니다. 즉 예수는 신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과 신념을 가진 종교가 이슬람이며, 아비첸나는 바로 그러한 종교를 따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중세 철학자들에게 아비첸나는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다. 아베로에스(Averroes)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중세 철학자들에게 ‘주해자 그 자체’(Commentator)라며 높임을 받은 인물이며, 많은 학자들이 그는 비판적으로 읽었지만, 직접적이든 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 강의 헨리(Henry of Ghent),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 등의 많은 중세 철학자들이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신앙이 다르고, 신에 대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중세 무슬림이 무용(無用)하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성’이란 측면에서 그들의 이성적 사유의 결실이 유용하다고 본 적이다.
13세기 시제 브라방(Siger Brabant)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로 아베로에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물론 그는 강력한 도전을 받고, 그의 사상 일부는 금지령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를 화형으로 인하여 죽여 사라지게 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보편구원설(universalism)을 주장했다. 보편구원설은 오직 예수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전통적 그리스도교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입장 역시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의 성서 연구의 결실은 이후 교부들에게 활용되었다. 그 역시 교회의 아버지, 즉 교부였다. 정통 교회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가졌지만, 그의 <아가서 주해>와 <로마서 주해>는 초기 그리스도교 학자인 루피누스(Rufinus, 365-410(411))의 라틴어 편집 번역 한 것으로 중세인들에게 읽혔졌고, 그 이외에도 <창세기 주해>, <판관기 주해>, <시편 36-36편 주해> 모두는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으로 읽혀졌다. 또한 성서 번역가인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20?)는 비록 오리게네스의 신학적 부분의 많은 것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아가 주해>, <이사야서 주해>, <에레미야서 주해>, <에제키엘서 주해>, <루가복음서 주해>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의 번역에 의하여 중세 많은 이들이 읽었고, 특히나 중세 수도원에서 널리 읽혔다. 신학과 철학에서도 그는 비잔틴의 수도자인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와 9세기 서유럽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스코투스 에리우게나(Scotus Eriugena)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역시 화형을 당해 사려져야할 존재가 아니었다. 교황의 교회 권력과 황제의 국가 권력에 관하여 기존 그리스도교와 다른 이론을 제기한 학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화형 되어 사라질 대상은 아니었다, 실재로 중세는 매우 다양하다. 신에 대해서도 매우 다양한 이론이 있고, 이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공존하며, 어떤 개념을 공유하기도 하고,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면모들이 충돌할 경우엔 강하게 논쟁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저마다 가진 고유성들은 서로와의 충돌하여 논쟁함으로 분명해지며, 서로 다른 수많은 입장들이 공존하면서도 고유한 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획일화에 의하여 다양한 입장들이 거부되지 않았다. 중세는 입장‘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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