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수용과 13세기 유럽 철학의 논쟁
유대칠(토마스철학학교학장)
1.0 서론
우리 나라는 지난 1세기간 정신문화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것은 우리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전환이었다. 이는 고려조가 조선조로 넘어가면서 느낀 그 사상적인 차이, 즉 불교에서 유교로의 전환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한 그러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서양의 12-14세기 일어난 그것과 흡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여 이미 신플라톤주의라는 확실한 기반을 가진 유럽에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리 쉬이 받아드리기 어려운 하나의 숙제였다. 적어도 이 시기 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사람의 논리학자일 뿐이 없다. 그리고 사실 유럽에서 다루어진 그의 사상이란 것도 모두 논리학적인 논의일 뿐이었다. 그는 자연학자도 형이상학자도 아닌 단지 논리학자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때까지 유럽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논리학이란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수단으로서 논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본격적인 의미의 철학은 그때까지 유럽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랍은 상황이 달랐다. 그곳에는 '알 킨디' 이후에 '알 파라비' 그리고 '아베첸나'와 '아베로에스'로 이어지면서 나름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의하고 있었다. 물론 아베첸나까지 이곳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란 『원인론』(De causis),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Theologia Aristotelis)...등 신플라톤주의적인 저서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오해되고 있었고, 그러기에 상당 부분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만을 지성의 최고라고 주장한 아베로에스는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고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 그 자체로 인정하였고, 그의 작품을 일일이 소주석, 중주석, 대주석으로 구분하고 주석을 내어놓았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중세 스콜라철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이러한 영향력은 '시저 브라방'이나 '보에씨우스 다치아'와 같은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아비첸나도 '로저 베이컨'이나 '대 알베르뚜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이미 말한바와 같이 유럽은 이미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플라톤', '플로티누스' 혹은 '프로클로스'라는 철학자가 있었고 '거짓 디오니시오스'와 '에리우게나' 무엇보다 '아우구스띠누스'라는 위대한 철학자도 있었고, 이러한 플라톤적인 혹은 신플라톤적인 사고는 쉬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를 받아드리기는 어려운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도 그리 적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하나의 사상이 충분히 물들어 있는 곳에 다른 사상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문제가 일어난다. 이는 우리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이란 유교국가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올 때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이 당시도 그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지식인이다. 이는 그들이 이를 가장 빨리 받아드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럽의 지식인은 파리에 모여있었다. 황제는 독일에 그리고 교황은 로마에 학문은 파리에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살펴보았다. 이제 그 중심에 놓여진 논쟁을 살핌으로서 더욱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한다.
2.0 大 알베르뚜스 선생과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태도
이 당시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회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여겼는지는 1215년 내려진 금지령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금지령에 따르면 논리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정하지만 그의 형이상학자 그리고 자연철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形而上學的 그리고 自然哲學的 저서는 대학에서 강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적당한 것으로 생각되지 못 했으며, 그 뿐 아니라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이것 사상이 주장하는 세계 영원성이나 특히 아베로에스의 해석에 따른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이성단일성...등은 분명 그리스도교 사회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 알베르뚜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형태를 취한다. 그들은 이를 있는 급진적으로 받아드린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이를 보수적으로 마다한 것과도 아니다. 알베르뚜스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바 보편적 박사(Doctor universalis)로서 무척이나 해박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의가 금지된 이를 자신의 수도회 신학원에서 강의를 강행한다. 이는 교황에게 충성하는 도미니꼬회 수사로서는 무척이나 대단한 용기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을 바탕으로 이를 강행한다. 우리는 이를 그의 저서를 바탕으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는 단지 순수한 한 사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부분에서 신플라톤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는 그가 이미 거짓 디오니시오스...등에 익숙하였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후세에 전하려 노력한 인물이기도하다. 그의 이러한 모습,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지만 신플라톤적인 사고를 지닌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그의 사상을 한 눈에 조망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미리 숙지하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일어난 대학 내의 사태에 대하여 우려하는 이들 중 한 사람-토마스 아퀴나스, 로저 베이콘, 보나벤뚜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위기감은 그의 저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보다 명확해진다. 그는 1254-57년 쓰여진 그의 『영혼론 주해』에서 아베로에스와의 일치를 강조하며 그와는 일부의 차이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1260년과 1270년 사이의 논쟁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전화시킨다. 그는 그의 저서 『이성단일론』에서 아베로에스에 대하여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의 사상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와 신플라톤적인 요소가 모인 아비첸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베로에스적인 해석도 토마스적인 해석도 아닌 아비첸나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며, 그는 아비첸나를 교부의 전통과 조화시키려는 나름의 노력을 한 인물이다. 그는 아랍의 사상들이 단지 비판받거나 그리스도교에 무익한 것이거나 유해한 것이라고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를 적절히 이해하고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1260년 이후 일어난 논쟁에서 자신의 태도를 조금은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분명 1254-57년 사이 쓰여진 그의 저서에서 아베로에스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그 이후 쓰여진 『이성단일론』에서 그렇게 태도를 바꿀 수가 있었는가? 이는 이 시기에 등장한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주장하는 이성의 단일성에 대하여 우려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마다한 인물이다. 그의 태도는 매우 분명하다. 그는 개별적인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것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를 가지기에 개별적인 인간이며, 이는 개별적인 이성혼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의 저서인 『이성단일론』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최종형상은 존재에 의하여 개별적인 것 안에 다수화 되어진다. 인간 가운데 최종의 형상은 오성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혼이다. 그러므로 오성적이고 이성적인 혼은 존재에 의하여 개별적인 수에 따른 다수화가 된 것이다. 존재에 따라서 혹은 수에 따라서 다수화 된 것은 실체에 따라서 다수화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성적 혼의 실체와 수 안에서는 다수이며, 그러기에 역시 죽음 이후에도 다수로 머물며, 오성적인 혼이 불멸하다고 다른 곳에서 증명한 것을 제시하였듯이 말이다."
그는 이 문장에서 분명히 이성의 단일성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 저서 이외에도 『15명제에 대하여』에서 그는 15가지의 명제를 모아 이를 일일이 비판한다. 그 처음 명제가 "모든 인간의 이성은 단일한가 수적으로 동일한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고, 이러한 주장을 그는 위의 이유에서라도 "신학에 따라서도 잘못이고 철학에 따라서도 잘못이다. 그리고 말되어진 이유는 철학의 무지이다."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물든 파리의 학자들(parisienses)을 직접적으로 불으며 비난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이성에 의한 것이고 신학이란 신앙에 의한 것으로 구분된 학문인 것을 전제한다면, 이는 이성에 의하여도 그리고 신앙에 의하여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개별적인 인간의 인식, 즉 내가 인식한다 혹은 내가 생각한다는 라는 cogito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한다"라는 그들의 명제에 대하여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즉 개별적인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가지는 한에서 자신의 개별적인 이성혼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다섯 번째 명제인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명제 역시 비난한다. 그는 "모든 것이 존재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일 말한다. 모든 것은 본질과 실체적으로 본성적인 존재에 의하여 원인 된 것이고, 하나로부터(ab uno) 모든 것이 실체적이고 본성적인 존재에 의하여 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처럼 이러한 논의를 단지 성서에 의하여, 즉 신앙에 의하여 그 잘못을 논한 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하여, 즉 이성에 의하여 잘못을 지적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새로운 권위를 거부하거나 그 가치를 평가 절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 나름의 중도를 가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후에 보여질 토마스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여 아우구스띠누스를 대표하는 교부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옹호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취한 그에게서 토마스가 등장한 것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알베르뚜스에게 이러한 반응을 일으킨 파리의 학자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즉 과연 그들이 말한 것이 어떻게 기원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3.0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내용
필자는 여기에서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필자가 다루고 하는 이들은 "시저 브라방"과 "다치아의 보에씨우스"이다. 이들은 당시에 들어온 새로운 철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어찌 보면 신앙과의 어설픈 타협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아베로에스의 이론을 깊이 따르고 있으며, 이는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과 그에 대한 아베로에스의 주석에 대한 탁월함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다루기 전에 아베로에스의 견해를 음미해보아야겠다.
3.0.1 아베로에스 철학의 개요
우리에게 "이중진리설"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그는 일찍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소, 중, 대주해서를 내어놓을 만큼이나 열심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당시 아비첸나와 알 파라비등에 의하여 아랍을 지배하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는 주해서뿐 아니라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하여"...등과 같은 독자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다룰 그의 철학적인 사상은 '이성의 단일성'과 '세계영원성' 그리고 이를 주장하게 하는 근거로서 '이중진리설'이다.
그는 이성이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성이란 분리된 것이고, 순수한 거시며, 비물질적이라는 『영혼론』3권 4-5장의 기본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는 이성이란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기에 그 스스로는 무엇도 아닌 것이며, 이는 어떠한 감각기관도 가지지 않는 것이기에 육체에 의존하는 것일 수 없다는 말이다. 코는 냄새를 인식하기에 그 스스로는 냄새를 결핍하여야한다. 그리고 눈은 빛을 그리하여야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이성은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서 백지와 같은 것이어야 하며, 이는 육체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이성은 육체를 벗어난 것이어야 하고, 간단히 말해서 육체, 즉 질료를 벗어나서는 개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이성은 모든 이에게 단일하다는 것이다. 질료는 토마스에게도 그리하였듯이 분명 아베로에스에게도 개체화의 원리임에 틀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이성의 단일성을 주장한 것이다. 분명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그의 종교인 이슬람에도 알맞은 것일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교리인 개인적인 선악에 대한 상벌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교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전통적인 이해에 의하면 창조는 시작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교리에 철학적으로 수긍하기를 거부한다. 그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따라서 "스스로에 의한"(per se) 운동을 하는 원동자를 신으로 이해한다.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그에 따라 이리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이 제일질료의 존재를 낳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 제일질료는 어느 것도 아닌 순수 현실태이며, 이는 사실 비존재와 같은 것이기에 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는 신과 함께 영원한 것이라 말이다. 그에게 신이란 순수한 능동인이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질료는 그러한 현실적인 것이 일어나게 하는 그러한 것이다. 그 이유는 원동자(natura naturans)가 움직이는 그러한 것(natura naturata)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현실적 운동이 영원하다면 그에 따른 제일질료도 영원해야 한다. 그러기에 그에게 세계는 언제나 있어야 했던 것이고, 창조는 영원한 것이란 말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성의 위대함을 믿었고, 그의 이성의 최고를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당시 철학에 가해지는 공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방어하려 하였고, 왜곡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순수한 것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알 가찰리의 신학적인 공격을 철학적으로 막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를 작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아베로에스 만큼이나 중세철학일반에 영향을 준 인물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참으로 큰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신앙 역시 따른 신앙인 이었다. 그는 이 둘에서 나오는 두 가지 형태의 진리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그런 그의 이론을 이중진리론이라 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이에 대표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 것이다. 또한 그는 신앙에 있어서는 신의 계시에 의한 코란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중세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3.1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논쟁의 의의
아베로에스는 자신의 그러한 이론으로 인하여 이슬람세계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그의 추방은 역사로부터 그리고 철학의 흐름으로부터의 추방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는 당시 신플라톤철학만을 고수하던 지식층에 큰 사상적인 충격이라고 할 것이다. 그 당시까지 유럽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의 시대가 아니었다. 아우구스띠누스 이후로 그때까지 철학자라 할만한 이는 단지 에리우게나만을 가질 뿐이라고 할 지경이다. 이 시기의 철학은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벨라르두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사하는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알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구논리학에 의한 논리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학은 그에게 분명 철학 그 자체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의 수단으로서 철학의 대상인 것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로 볼 때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포함되는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그 당시의 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로 보지 못했고, 보에씨우스를 통하여 번역된 논리학저서로 인한 논리학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철학의 중심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그리고 프로클로스와 가짜 디오니시오스 그리고 아우구스띠누스가 있을 뿐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아베로에스를 비롯한 아랍의 저서들과 사상의 유입은 하나의 새로움으로 다가오며,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의 충격은 당시 지식인들이 모여있던 파리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의 눈에 비추어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 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 둘은 세계에 있어서 영원성을 주장하는 등과 같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 보여졌다. 그 중에 아베로에스의 이성의 단일성에 대한 주장은 매우 큰 문제로 당시 지성계에 대두된 것으로 부여진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이가 시저 브라방...등이라 할 수 있다. 어찌보면 그는 이성과 신앙의 어설픈 연결을 포기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라는 위대한 이성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해석한 아베로에스의 해석 역시 높이 평가하고 이를 따랐다. 이러한 움직임이 당시 파리의 인문학부, 즉 현재의 철학부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당시 신학계에 매우 큰 문제임에 확실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하여 토마스와 알베르뚜스는 이를 비난하고 이를 수정하기를 촉구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가운데 알베르뚜스가 행한 일련의 반박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 그러한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은 단지 몇몇 학자의 것만은 아니며, 교회차원에서도 이를 금지한다. 그러한 가운데 알베르뚜스는 이를 강의한다. 그리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부의 가르침에 적용하려 하지만 이는 토마스의 것에 비하면 아직은 조심스러운 정도이다. 하지만 알베르뚜스는 그의 학문적인 태도에서 위에서 살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단지 신학적인 잘못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잘못임을 지적하고 그 역시도 이를 철학적으로 대응한다. 이는 철학을 신학의 권위로 누르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사고를 이성의 사고로 설득하려는 알베르뚜스의 노력인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에세 성서를 들고 찾아가 그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서, 즉 이성으로서 그들의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알베르뚜스의 태도에서 우리는 토마스라는 인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의 스승으로서 알베르뚜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당시 일어난 논쟁이 가지는 하나의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신앙의 권위로 서로를 대적한 것이 아니라, 이성 대 이성으로 서로를 대적하였다는 것이다. 즉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상 어쩌면 처음으로 철학의 문헌적 이해의 차이와 그로 인한 스스로의 이성을 이용한 논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당시의 논쟁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3.2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란?
그러면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진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란 무엇인가? 이들은 새로이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랍의 해석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 중에 단연 아베로에스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우리는 아베로에스주의라고 하지만 이들은 아베로에스에 대한 존경보다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을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신앙과 이성의 연결이 아니라 급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이성을 따르기에 필자는 이를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물론 필자가 이미 아베로에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말한 것과 흡사하다. 세계에 대한 영원성, 이성의 단일성에 대한 것 그리고 이중진리론이다. 그 중에 필자는 주로 『영혼론』에 대한 이들의 문헌적인 해석의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이중진리설을 논하기로 한다
3.2.1 이성의 단일성
이 논의가 철학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 논의가 처음으로 철학사에 두드러지게 일어난 문헌에 대한 문헌학적인 이해의 차이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의 차이로 인한 논쟁, 즉 서로가 서로의 이성에 호소하는 논쟁이기 말이다. 이 논쟁이 핵심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3권 4장 과 5장이다. 바로 이를 두고 해석의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아베로에스는 이성을 비혼합적이고 순수하고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을 따라서 이성을 이 인간과 분리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 인간의 인식은 이 인간의 감각상과 능동이성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한다. 즉 이 인간과 이성은 작용의 측면에서 서로 이어진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분명 구분된 것이다. 한 마디로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그의 저서인『영혼론 3권의 질문들』(Quaestiones in tertium De Anima)를 따라가 보며 알아보자.
"비물질적인 형상 가운데 근본적인 능력은 물질적 형상 가운데 근본적인 능력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성은 비물질적인 형상 가운데 근본적인 능력이다. 『영혼론』3권에서 논의되는 증명은 이성이 단일하고 비물질적이고 비혼합적이라고 한다. 성장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은 동일한 물질적 실체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성은 성장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과 함께 동일한 실체에 뿌리내려질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다른 영혼의 능력은 육체와 관계하지만, 이성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육체와 관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육체로부터 구분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러면 이성은 개별화가 정지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인데, 이성은 질료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다시 따라가 보자.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의 이성만이 있는 듯하다. 비물질적인 형상은 결코 종적으로 하나의 것이 아니며, 수에 따라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비물질적인 형상이고 종 가운데 하나 뿐 이다. 그러므로 수 가운데 다양성이 아니다. 이것에 대하여 주해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만일 이성이 인간의 수에 따라 헤아려지는 것이라면 이성은 인간육체의 능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은 육체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에 따라 헤아려질 수 없다."
그러기에 그에게 이성은 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이성이 있는 것이다. 시저는 이처럼 아베로에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동조하며 그들의 의견을 수용한다. 즉 이 인간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고한다는 아베로에스의 의견에 동조한 것이다. 그러한 그의 사고는 아베로에스가 아랍에서 문제가 되었듯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에도 문제가 되었다. 이는 사후에 있을 개인에 대한 상벌의 그리스도교적인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장 신학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살아가는 신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이성과 신앙에 대한 어설픈 결속을 설명하기를 거부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를 모두 인정하는 이중진리설을 주장한다. 즉 그는 성서의 것도 진리이며,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또한 이성 역시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급진적인 이성주의자라고 할만큼 이성을 신뢰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성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철학이 아니었다. 오직 이성에 의한 것만이 진정한 철학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탐구에서 나온 이성의 진리는 신앙의 진리에 비하여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도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중진리설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후에 헤겔을 기다려 볼 만한 것 일게다.
3.3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 반대자들이 행한 논쟁의 의의
그리스도교 사회는 오랜 시간을 플라톤이라는 강력한 틀로 자신을 지탱시키고 있었다. 12세기말에서 13세기 그리고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리스도교 사회의 이러한 흐름은 큰 도전을 받게 된다. 그것은 플라톤의 강력한 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인 것이다. 교부의 권위와 신앙을 강조하던 그리스도교 사회에 자연철학자이며 형이상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를 해석한 이련의 무리들이 함께 유입된다. 즉 아랍의 철학자인 아베로에스와 아비첸나등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자로서 그리고 아베로에스는 주해자(commentos) 그 자체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의 해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리스도교 사회에 큰 충격을 준다. 그러한 흐름 가운데 등장한 것이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며, 이의 주해자인 아베로에스의 이론을 따르는 이들로서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이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철학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하고, 이를 넘어선 것은 철학이 아니라 한다. 그리고 이성이 진리와 신앙의 진리를 모두인정하고 이성의 진리인 세계영원성과 이성의 단일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 우선 이성의 단일성은 개별적인 인간의 도덕적인 면에 대한 어려움를 가지며, 또한 인식론적인 어류움을 가진다. 반면 이들로 인하여 철학사는 이성에 의한 이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이 알베르뚜스와 토마스...등과 함께 한 논쟁은 그것이 문헌에 대한 이성의 입장을 이성이 대응하는 것이다. 즉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적인 학술적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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