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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의자리

유학장만의 중세 형이상학 이야기1

유학장만의 중세 형이상학 이야기 1

 

[이 글은 나만을 위한 글이다. 혹시나 수준 미달이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면, 읽지마라. 읽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훌륭한 분들의 좋은 글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분들의 글을 읽어라. 이 글은 근본적으로 나만을 위한 나만에 의한 글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번역한 말이 아니다. 동아시아 철학의 말이다. 바로 동아시아 철학의 시원 가운데 하나인 역전계사전에 등장하는 말이다.

 

형이하의 것은 라고 하며(形而下子爲之氣)

형이상의 것은 라고 한다.(形而上子爲之道)

 

여기에서 형이하의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준한 것으로 보았다면, 이러한 것과 논의 대상이 다른 것, 형이상에 대한 것, 즉 감각적 형태를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것으로 형이상학이란 이름을 가져왔다. 우주의 기운에 대한 연구라기보다 우주의 혹은 이치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physis(퓌시스)라는 하는 말은 그리 쉽게 받아드릴 수 없는 말이다.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본의 철학자들이 서구의 사상을 가져오면서 이를 두고 자연이라고 번역을 하였겠지만, 이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physis를 온전히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가의 의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 physis는 스스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란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자연이란 역어로 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ousia(우시아), 라틴어로 substantia(숩스탄티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를 동아시아에선 실체’(實體)라고 대체로 번역한다. 이 실체는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각으로 파악 가능한 것은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변화하는 세상이다. 변화하는 세상만이 감각의 대상이다. 불변의 세상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실체는 그 자체로 변화하지 않는다. 생성이 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 되거나 어디에로 이동 가능(可能)한 상태에서 그것이 현실(現實)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혹은 되고 있는 변화의 도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4원인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능태에 있는 질료인을 작용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형상을 구현하면서 어떤 것이 생성된다. 즉 건축가(建築家)라는 작용인 벽돌과 시멘트 그리고 철근이란 질료들을 가지고 건축물(建築物)의 완공(完工)과 그 가운데 거주(居住) 혹은 매매(賣買)를 목적으로 질료들에 건축물이란 형상인을 부여한다. 이렇게 집이 될 가능태에 있던 것은 현실적인 집이 된다. 이러한 것은 동물의 탄생 등에서도 활용이 된다. 이러한 변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학의 논의 대상이다. 이 각각의 논의들은 자연에 대한 것’(physikon. 퓌시콘)이라 불렸고, 이러한 성징의 여러 개를 통칭하여 “‘자연에 대한 것들(혹은 책들)’(physika 퓌시카)'라고 불렀다. 이후 1세기 경 안드로니코스(Andronicos)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편집하면서 자연학에 대한 책들의 다음에 온다는 의미에서 Physica이후혹은 다음이란 의미의 목적격 지배 전치사 meta를 더한 것이 meta ta physica가 된다. 한국어로 그 의미를 전달한다면, ‘자연에 대한 책들의 다음정도가 될 수 있겠다. ta meta ta physika하는 것은 먼저 앞에 나온 ta는 정관사다. 중성 복수 주격 정관사다. 어쩌면 ta biblia meta ta physika인데, 여기에서 biblion이 생략된 것일지 모르겠다. 이를 한국어로 그 의미를 전달하면 자연에 대한 책들의 다음 책들정도가 되겠다. 나는 그리스어에 대한 깊은 고전학적 지식이나 문법학적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아직은 문법책을 옆에 두고 공부하여 글을 이해하는 수준이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긴 힘들다. 그냥 추측이다. 정관사를 이런 식으로 보면 책들이라고 읽히게 된다. 사실 한 권의 책이 아닌 몇 권의 책들이다. ta biblia meta ta physika의 형식이 ta meta ta physika가 되고, 이것이 하나의 고유한 명칭으로 metaphysika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 편찬 과정에서 나온 이러한 것들 즉 자연에 대한 책들의 다음 책들은 자연학의 논의 대상을 넘어서는혹은 초월하는이란 의미로 확대 재생산된다. 즉 형이상자, 는 동아시아에서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의 배후에 존재론적으로 존재하는 초감각적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책들의 다음 책들은 이제 자연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책들로 논의가 변화되고, 이 변화된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a는 당시 동아시아의 형이상에 대한 학문, 즉 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이름으로 번역이 된다



[출처에 대한 명확한 공개 없이 맘대로 사용하지 마라! 열받는다! 이 글은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 학장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