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 시기에 대구 출신의 기녀(妓女) 출신이다. 그녀는 일제 강점이란 암울한 시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며, 페미니스트이고, 언론인이었다. 그는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시고 사회운동에 눈을 뜬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주의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단지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실천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공산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이던 1925년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1927년 신간회와 근우회와 같은 조직 창립에 참여하였고, 강연과 논설 등 활동을 하였다. 또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고, 1930년 근우회사건으로 투옥된다. 여성으로 그는 여성의 권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가정과 결혼으로 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나혜석(羅蕙錫), 김일엽(金一葉), 김명순(金明淳) 등이 여성해방을 외치지만, 겨우 한다는 것이 남녀평등 정도라는 점을 두고 소극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가정과 남성으로 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자유와 권리의 옹호란 존재하기 힘들다고 여겼다. 그는 여성의 성 자유와 성적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가부장제의 폭력성과 유교적 도덕윤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녀는 연애와 성욕은 별개의 문제라고 하였다. 1929년 기자와의 대화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동안 연애가 힘든 조건에서 필요에 따른 성욕 해소에 대하여 질문 할 때, 정칠성은 성욕(性慾)과 연애(戀愛)는 당연히 갈라져야 한다고 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성욕과 연애가 갈라져야 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면을 가지지만, 그녀는 당당하였다. 그의 삶도 그러했다. 그는 1926년 남편 신철과 이혼하였다. 그리고 전 남편 신철은 정칠성의 벗인 정종명과 동거하였다. 그러나 정칠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성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녀 삶의 한 면이다. 성과 성의 관계는 지배나 종속의 관계로 보지 않았다. 그녀의 이론과 그의 삶으로 드러난 그녀 삶의 한 면이다. 이렇게 이혼과 벗과 전남편의 동거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사상적 동지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북한으로 간다. 이후 1948년 조선민주연성동맹중앙위원이 되었고,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이 되었다. 또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된다. 하지만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의 숙청 때 숙청된다.
유허수 (토마스철학학겨 연구원) 정리
참고 자료 (더 읽어보세요) :
이미원,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37] 민족을 지켜낸 여성들(김락·남자현·정칠성)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정칠성 -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 (주간경향 (2009년)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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