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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철학이야기/철학사전

양명학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사전>

양명학(陽明學) :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왕수인(王守仁)에게서 시작되었고, 양명학이란 명칭의 그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따왔다. 양명학 이외에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양명학은 일본의 역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일본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바로 양명학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을 긍정하며 막부에게 이단 취급을 받는 양명학은 사무라이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막부를 제거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며, 동시에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일본 역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왕학이나 육왕학이 아니라, 양명학이란 명칭도 메이지유신 이후에 사용된 명칭이다. 그렇다면 양명학이란 사상적 체계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양명학은 주자학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러니 아주 간단하게 주자학의 방법론을 정리해보자. 객체를 수단으로 하여 주체의 이치를 분명하게 한다는 방법은 주자학의 방법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에 약점이 있다. 바로 주체 마음의 이치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매화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서 양명학이 시작한다. 양명학은 왕양명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왕양명은 초기에 주자학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하나 하나 이치를 궁구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기 마음의 내부 이치에 도달하는 것에 회의하게 된다. 효도의 이치를 부모님이란 객체에서 구할 것인가? 효도의 이치를 부모에게서 구한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효도란 무엇인가? 사라지는 것인가? 양명학자들은 행위의 실체 주체인 자아의 마음 가운데 이치가 있으며, 주체의 마음 외부에 추상적으로 떨어져 이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즉 참다운 이치란 객관적 대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마음 속에 있다 한다.

양명학의 사상은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이란 세 가지 모토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심즉리라는 말은 왕수인이 당시 학풍을 주도하던 격물치지설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理, 즉 이치는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것이며, 절대지선(絶對至善), 즉 절대적으로 지극히 선한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치가 바로 자아의 마음이다. "물리(物理, 객관적 사물의 이치)는 자아의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며, 자아의 마음을 제쳐놓고 물리를 찾는다면, 거기에 물리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물리를 제쳐놓고 나의 마음을 찾는 다면 나의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즉, 心 바로 마음이 주객일체, 물아일여(物我一如)의 마음이다. 쉽게 정리하면 마음이 바로 즉 이치이다. 물론 마음이 곧 이치라고 할 때, 마음은 개인들이 저마다 느끼는 상대적인 일상의 마음이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마음은 순수한 본래의 마음으로 양지심(良知心)이 곧 이치, 즉 理라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사리사욕이 완전히 극복된 순수한 마음(心)일 때 그것이 곧 이치(理)라는 것이다. 성인의 마음이 맑은 거울이라면 일상의 삶에서 흔히 보는 보통 사람의 마음은 구름 낀 거울과 같다. 그렇기에 이는 기질 때문이므로 기질을 변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치(理)는 우리의 마음과 다를 바 없이 같으니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양지(良知)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심즉리의 근본사상으로 부터 치양지설, 지행합일 등이 나왔다. '치양지'이란 만민의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마음의 본체를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양지란 타고난 본연의 지이며, 그것이 치중하자는 것이 치양지이다. 양명학에 따르면 나무와 풀 그리고 돌도 양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사람도 양지를 가지고 있음을 당연하다. 단지 사람은 우주 만물의 이치에 순수히 따르지 않기에 양지를 갖추고 있지만, 찾을 줄 모른다. 그렇기에 양지에 치중하는 치양지가 필요하다. 사리사욕이 생기게 되고 그것에 지배받게 되면 참된 마음인 양지가 탁해진다. 그렇게 되면 양지가 약해지기에 이를 막기 위해 치양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치양지는 양명학이 이야기하는 학문의 본체, 즉 핵심이며, 마음의 본체이다.

이제 여기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등장한다. 이 이론은 주희(朱熹)나 육구연(陸九淵)의 이른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다. 알고 난 이후에 실천한다는 주희와 육구연의 논리에 대하여 왕수인은 지행을 합일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왕수인이 주희에 비하여 실천을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왕수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심리적 사실은 지(知)와 행(行)은 근본적으로 합일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주희는 이치를 궁구하는 궁리(窮理)를 지(知)로 생각하고, 그것을 기르고 닦는 함양(涵養)을 행(行)으로 보았다. 그러니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는 치지 이후에 그것을 함양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이치(理)를 먼저 밝히지 않으면 바른 마음(正心)과 마음과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실천도 제대로 있을 수 수 없는 것이라 주희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선지후행을 주장한다. 그러나 주희 역시 지가 앞서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은 오히려 행에 있다고 했다. 지와 행의 불가분(不可分)한 관계의 강조는 공자 이후 유교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양자 가운데 하나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왕수인은 자신의 철학적 근거 가운데 이 둘의 근원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지와 행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이다. 그에게 알면서 행해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는 지는 행 가운데 의도의 주체를 두고 하는 말이고, 행은 그 지의 노력이며,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의 성취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둘은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양명학의 지행합리은 무엇이 다른가? 간단하게 알고 행함은 별개가 아니라고 하나이다. 실천한다는 것은 그 행위의 의미와 의도를 이미알고 있어야 한다. 알아야 행하고, 행한다는 것 자체는 안다는 것이다. 지와 행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전제 조건이 된다. 양명학은 이미 행동하는 인간의 마음 가운데 우주만물의 이치가 존재한다는 심즉리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리알고 이후에 행한다는 주자학과 다르다. 이황의 제자인 조선의 사상가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반박하였다. 유성룡 이후 조선의 유학은 주자학에서 나온 조선성리학 중심으로 기우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조선 유학의 역사에서 양명학자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양명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의 대중화와 민중 유교를 위해 양명학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며,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또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양명학 연구의 시금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의 양명학이 수적으로 조선성리학에 비하여 그 연구 결실이 작은 규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제두 등 조선 후기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중국과 다른 양명학이 모색되었으며, 충분히 독자적인 가치는 가진 사상 체계를 형성하였다. 일본 역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なかえ とうじゅ)나 구마자와 반잔(熊沢 蕃山, くまざわ ばんざん)과 같은 양명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중국은 왕수인의 제자들에 의하여 양명학의 발전이 주도되었다. 하지만 왕수인은 제자들을 교육할 때 하나의 방법이나 길을 보수적으로 고수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자들마다 그 성향에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방식이 고집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사후 제자들 사이에 다양한 입장들이 등장한다. 즉,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헤겔 좌파와 우파로 구분한다. 이와 같이 양명학을 우파와 좌파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양명학 우파는 대체로 정통파이다. 이들은 귀적파와 수증파이다. 이들로는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이들과 사상적 차이를 가지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는 현성파이다.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을 가지며, 나무꾼이나 염정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포함하며 서민 교육에의 실천이란 특색을 가진다. 또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이었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 청나라시대에 양명학을 쇠퇴한다. 고증학에 밀려 주자학의 보조 정도의 역활을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적으로 양명학이 역할을 하자, 중국에서도 다시 부활하였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유허수 (토마스철학학교 연구원)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