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정(白頤正) 1247(고종 34)∼1323(충숙왕 10). 고려 충선왕 때의 유학자이며, 본관은 남포(藍浦)이고, 자는 약헌(若軒)이며 호는 이재(彝齋)이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문절(文節)의 아들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하여,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하였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8월에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주로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돈이(周敦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체계를 세운 주희(朱熹)로 인하여 시작된 주자학(朱子學) 혹은 정주학(程朱學)를 깊이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 주자학의 서적과 주자의 《가례 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이후 후진양성에 노력하여, 많은 인물을 양성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이곡(李穀), 이인복(李仁復), 백문보(白文寶) 등이다. 그리고 학문에서 그는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고려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내재화함에 있어 큰 일을 일군 인물은 백이정이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이어졌고, 이제현은 이색(李穡)에게 이어졌으며, 이색은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으로 이어졌다. 권근 등이 조선성리학의 성립에 많은 이론적 기반이 된 것을 고려한다면, 백이정의 역할은 조선성리학에서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이러한 백이정에 대한 태도는 성리학의 국가 조선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의 선조 때 김제남(金悌男), 최기남(崔起南)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 권보(權溥)와 함께 백이정을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였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신도비 등이 남아 있다. 유고로는 〈연거시 燕居詩〉, 〈영당요 詠唐堯〉, 〈한벽루 寒碧樓〉, 〈여홍애집구 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연거시>를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연거(燕居, 편안한 집)-백이정(白頤正) / 矮屋蕭條十肘餘(왜옥소조십주여) : 작은 집이 쓸쓸하고 적막하고 / 焚香靜讀聖人書(분향정독성인서) : 향에 불을 사르고 성인의 글을 조용히 읽어본다. / 自從人爵生天爵(자종인작생천작) : 인작(人爵)에서 천작(天爵)이 절로 나온다고 하지만 / 情欲秋林日漸疎(정욕추림일점소) : 정욕은 가을 숲에 날이 기우는 듯 사라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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