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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장의 생존기

종교와 독단적을 넘어선 진리에 대한 태도 신앙... 초기 불교 경전 <창키 경>을 읽는다...


초기 불교 경전 가운데 <창키 경>이 있다. 이 글에서 난 진리에 대한 초기 불교의 입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진리에 대한 독선을 경계한다. 이것이 진리에서 멀어지는 길이라 그는 믿고 있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이것만이 바른 것이라는 독선은 곧 거짓과 바르지 않은 것을 만든다. 그리고 그 거짓과 바르지 않은 것에 대한 잔혹한 공격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준다. 서구의 잔혹한 종교의 역사를 보라. 수많은 이들을 죽인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잔혹함의 배후엔 누군가에 대한 잔혹한 맹목 그리고 그 맹목에 따른 독선에 숨어있다. 그가 말한 성서 해석은 정당하다. 그가 말한 성서 해석을 따르면 된다. 우리는 죄인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 행하면 곧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무지하고 독선적 신앙은 항상 재앙을 낳는다. 언젠가 개신교도들이 모인 장소에 인문학 강의를 하려 간 적이 있다. 나는 신이 아니고선 어떤 목사도 누군가가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 함부로 단정할 수 없고, 그 단정이 정당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만일 그렇게 그 목사가 신의 모든 의도와 뜻을 안다면, 그가 바로 신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그 교회와 종교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 여대생이 나에게 찾아와 질문을 했다. 부흥회를 할 때 목사가 행하는 기적이나 혹은 목사가 누군가를 천국행이라고 단언하는 것에 대해 그 여대생은 매우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여대생에게 나는 신앙에 악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종교를 넘어 그가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지 않아도, 그에 대한 신의 보편적 사랑은 유지된다는 나의 교부 문헌의 한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지 않으면, 그리고 성서만을 모시지 않으면, 그에 대한 사랑 이전에 그는 지옥에 가야할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진리 독선 자신만의 지식 혹은 신앙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독단의 결과이다. 이들의 고민은 결과를 정해 두고 이것을 어떻게 바른 것이라고 고집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선 신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신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고백을 전제해야 한다. 슬픈 일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흔하다. 주변에 목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그것은 목사라는 자신들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 앉으면 성서를 읽고 있는 개신교도들을 볼때가 많다.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신을 구하지 위해 그 성서만을 바라보면 나의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 혹은 나의 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오직 진리를 그 종이에 담겨있으며 그 종이 위의 글에 집중한다.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보다 그 글씨가 더 강한 진짜로 그에게 존재한다. 슬픈 일이다. 사람이 글씨만 못하다. 글씨의 기존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이들이 있다. 같은 종교가 아니면, 재앙이 있어도 신의 저주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자신들 가운데 여신도를 성폭행하는 목사가 있음에도 그러한 사회적 문제엔 귀를 닫는다. 성서만 바라본다. 세상의 눈이 아니라, 교회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자고 하지만, 사회적 악을 행하는 교회는 그냥 악이다. 성서만을 보고 옆을 돌아보지 않는 신앙은 악이다. 초기 교회엔 신약 성서가 없었고, 예수는 얼마나 많은 신학적 지식을 가졌는가로 제자를 모르지 않았다. 창녀와 병든 자 그리고 장애인을 찾았다. 당시 구원에서 제외된 이들의 옆에 있었다. 당시 신학이나 신앙의 영역 외부로 예수는 나아갔다. 그의 눈은 성서와 신학의 논리가 아니라,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교회를 보면 아쉽다.

 

<창키 경>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것이 진리이고 저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한다. 이것은 진리를 실천하는 것도 아니며, 진리를 보존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독단 가운데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이가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에 근거한 꾸준한 자기 반성과 궁극적 진리에 대한 신중함을 가져야할 뿐이며, 자신의 진리만이 바르고 다른 이들의 것을 거짓이라고 선을 긋는 것은 바른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감동이다. 스스로 한 종교 혹은 가르침의 창시자인 그가 스스로 진리를 고집하지 말라고 한다. 감동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신앙이란 가까이 모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까이 모신다는 말은 귀를 기울린다는 말인다. 귀를 기울린다는 말은 법(진리)를 듣겠다는 것이다. 듣겠다는 것은 간직하겠다는 것이다. 간직하겠다는 것은 궁리하고 조사하겠다는 말이다. 궁리하고 조사하겠다는 말은 법에 대해 선정 속에 들어 지속하겠다는 말이다. 지속하겠다는 말은 의욕하겠다는 말이다. 의욕하겠다는 말은모색하겠다는 말이다. 모색하겠다는 말은 비교하겠다는 말이다. 비교하겠다는 말은 정진하겠다는 말이다. 정진하겠다는 말은 최고의 진리를 체득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혜를 바라보겠다는 말이다.

 

그의 신앙은 독선이 아니다. 독선은 이성을 벗어난다. 이성의 외부를 향한다. 합리성을 벗어난다. 그냥 이것이 법이라고 하면 그것을 법으로 암기하고 따른다. 주체적으로 그것을 조사하고 비교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타마 싯다르타는 조사하고 비교하고 궁리하고 의욕하며 모색하겠다는 것이 정진, 즉 수련이라고 믿는다. 이 수련은 진리를 체득하게 하고, 이렇게 되면 가까이에 진리를 모시게 된다. 그에게 신앙은 주체적인 이성의 결단과 그 결단에 의하여 이해된 삶의 지속, 그리고 그 지속으로 그 진리가 몸에 녹아들어 체득되어 육화되는 삶이다. 이것이 그에게 신앙이다. 신앙은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고뇌하고 궁리하는 것이다.

 

비교하고 조사하기 위해 자신에게 법이라고 주어진 것의 외부를 향한 귀도 열려야 한다. 그렇게 독단이 아닌 열린 귀로 진정한 법이 들어온다. 어찌보면 이러한 신앙과 수련은 일종의 대화이다.

 

불교의 경전은 대화로 진행된다. 마치 플라톤의 대화편과 같이 그렇게 대화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하여 싯다르타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암기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과 고뇌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 고뇌에 대하여 답한다. 제자들은 귀를 열어 싯다르타의 말을 듣고, 그렇게 들어 담은 그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 실천의 방식에 다양한 흐름이 생기며 다양한 불교의 유파가 일어나지만, 서로에 대하여 칼을 향하여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독단과 독선에 대해 싯다르타는 꾸준히 경계한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다가려는 맘을 일으킨다. 신앙은 그 대상인 진리를 향하여 부단한 자기 결단을 통하여 스스로를 매일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아프면서 행복한 생멸의 과정 그 자체다. 신앙은 고정된 그것이 아닌 역동적으로 나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이에게 진리를 다가간다.

 

니체가 생각난다. 니체의 초인이 생각난다. 초인... 자신을 가두지 말고, 자신을 깨며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자. 그 초인의 삶, 그것이 신앙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종교란 꼭 고정된 어떤 신이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 신앙은 고정된 신을 향한 나아감이 아닐 수 있다. 그 신앙이 고정된 신, 누군가가 해석하고 누군가가 규정한 신으로 한정된다면, 그 한정된 신, 어떠 개념으로 규정된 신을 향하는 이들은 고정된 무엇을 향하여 달리는 존재, 현실 속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이 생명을 떠난 어떤 관념 속 신만을 독단적으로 따르고, 살아있는 자신과 이 세상을 무시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죽은 신이란 이런 신이 아닐까? 신, 그 진리... 그것도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하하고 절대적인 존재다. 그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 규정되지 않는 존재를 향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결단과 궁리 그리고 고뇌로 조금씩 다가가는 것, 그 힘든 진리를 향한 수행의 삶이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창키 경>에서 신앙을 고민해 본다.

 

유 암브로시오 씀 201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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