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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보에티우스

보에티우스의 『데 헵도마니부스

 

《구마라집 중세 철학 소품 총서 1》


보에티우스의 『데 헵도마니부스』

- 선의 일곱 가지 원리에 대하여


유 대칠 옮김

(토마스 철학 학교 틀 밖 교실)


나의 고민은 후기 중세 철학이다. 그냥 중세 철학이 아니라, ‘후기’ 중세 철학이다. 그렇다고 후기만 잡고 있다간 진짜 후기를 놓치기 쉽다. 후기란 전자와 중기의 자연스러운 역사적 귀결이니 말이다. 보에티우스는 전기의 인물이지만, 중기와 후기에 이르기까지 중세에 있어서 바로 그 인물이라 불릴 만한 학자이다. 그의 저작은 고전이 되어 주해되었고, 그의 존재론적 저작은 하나의 권위가 되어 중세 철학의 시기 동안 인용되고 사용되곤 했다. 그러니 비록 후기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진 나이기지만, 보에티우스를 버리고 후기를 논할 수 없단 결론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읽은 것이 바로 이 저작이다.

읽고 많은 것을 얻었다. 이를 읽으며 중세 존재론의 전반에 흐르는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접해야 했고, 그 순간들은 나 같은 이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의 글을 더욱 더 많이 읽고 정리할 계획이다. 물론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말이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중세 철학의 소품들을 번역할 계획이다. 일반적 출판사에서 출판하기에는 그 규모에서 문제가 있지만, 꼭 읽혀져야 하는 저작이라면 토마스 철학 학교 틀 밖 교실은 번역하여 이 처럼 작은 결실물로 만들 계획이다. 그럼 앞으로 더 나은 구마라집 중세 철학 소품 2번째를 기약해 본다.


2007년 5월 31일 대구 삼덕동 토마스 철학 학교 틀 밖 교실에서

유 대칠


[보에티우스의 본문]


어떻게 실체적 선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실체들이 선한 것인가?


서론


당신은 우리의 일곱 가지 규칙으로부터 어떻게 실체적으로 선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실체들은 선한 것인가라는 것을 포함하는 이 같은 의문의 모호함을 분명하게 설명할 것을 나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은 이 논의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에 관한 저술 가운데 사용된 방식들이 우리 모두에겐 그리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진정 당신이 이 전에 얼마나 완성하게 이 주제를 논의하였는가에 대한 당신의 증인이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나 자신에 의하여 이들 일곱 규칙에 관하여 생각하고 농담이나 웃음거리 됨 없이,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 건방짐과 오만함에 한몫함보다 나는 나의 기억에 나의 사변을 맞출 것이다. 따라서 이 모호함이 간단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숨겨진 것의 수호자에게 유익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단지 이해가 충만한 자에게만 말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수학과 또한 다른 그러한 논의에서도 흔히 그러하듯이 용어와 규칙을 정리하고 우선 귀결되는 모든 것을 다룰 것이다.


용어


영혼의 공통적 개념은 각각의 사람이 이러한 것을 들은 것을 증명하는 진술(enuntatio)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모든 이들에게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공통된 것이다. 만일 이 전제를 취한다고 하자.


“만일 두 동일한 것 가운데 하나의 동일함을 제거한다면, 하나의 동일함은 남겨지게 된다.”


위의 이 같은 명제를 이해하는 이라면 누구가 이를 거부할 순 없을 것이다. 또한 다른 경우의 것은 배운 이들에게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영혼의 공통된 개념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이 있다. 이것은 장소 가운데 있지 않았다.”


대중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배운 이들에게 인정되는 그러한 것이다.


일곱 규칙


1. 존재(esse)와 존재하는 것은 구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는 아직 있지 않기 때문이다(nondum est). 한편 참으로 존재함의 형상을 취하는 것은 존재하고 더욱 더 존립한다(consistit).

2.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에 참여 할 수 있지만, 존재 그 자체는 어떤 방식에서도 다른 것에 참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앞서 어떤 것이 있을 때, 참여는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존재를 수용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3.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다. 반면 존재 그 자체는 자신을 제외하거는 어떤 것으로도 혼합되어 있지 않다.

4. 어떤 것으로의 존재와 그 가운데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구분된다. 왜냐하면 전자에 의하여 우유가 의미되며, 후자에 의하여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하여 존재인 것에 참여한다. 참으로 다르게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이기 위하여 어떤 것 가운데 참여한다. 이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하여 존재인 것에 참여한다. 진정 다른 방식으로 이는 임의의 것에 참여하기 위하여 있다.

6. 모든 단순한 것은 그것의 존재와 하나인 것(unum)과 같은 것을 가진다. 모든 합성된 것 가운데 존재와 그 자체는 다른 것이다.

7. 모든 차이성은 분열되며, 유사성은 가까 되는 것이다. 가까이 되는 이것 자체인 것과 같이 다른 것과 관계되는 것은 자연적으로 그 자체인 것으로 존재함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앞서 우리가 전제한 것으로 충분한다. 참으로 그 근거의 해석에 관한 고려에 그것의 논증의 하나씩을 맞출 것이다.


의문


참으로 의문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을 향하며, 모든 것이 그러한 것을 향한 것은 모든 배운 이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선을 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선한 것인가? 참여로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실체로 그러한 것인가? 이는 논의되어야 한다.

만일 참여에 의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여로 흰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그 가운데 존재하는 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성질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참여에 의하여 선한 것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도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향한 것일 수가 없다. 이는 동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여로 인하여 선한 것은 없으며, 실체에 의한 선만이 있다.

그것의 실체는 선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존재인 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 자체의 존재는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존재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존재가 선한 것이라면,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이것은 선한 것이다. 그리고 존재와 선한 것의 존재(esse boni)는 그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성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실체적 선이다. 만일 존재 그 자체가 그 가운데 선한 것이라면, 선한 것이 존재함에 같이 실체적이며, 제일 선에 유사한 것이고, 이에 의하여 그것 자체가 선하다는 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유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 의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란 것에 귀결된다. 이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체적 선이 아니며, 이로 인하여 그 가운데 존재도 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선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선성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선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식으로도 선한 것일 수 없다.


해법


그러한 의문에 관한 해법이 아래와 같이 다루어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분리되어질 수 없지만, 영혼과 인식에 의하여 분리되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어떠한 것도 질료적 주체로부터 삼각형과 다른 그러한 것이 분리되지 않을 경우, 정신에 의하여 분리되어지는 한에서 삼각형 그 자체의 속성은 질료 없이 사고되어진다.

그러므로 우선 제일 선의 현존을 영혼으로부터 잠시 미루어두자. 이것의 존재는 모든 배운 이와 배우지 못한 이 그리고 이교도의 종교 견해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잠시 동안 제일 선으로 결코 유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한 존재가 가능한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운데 ‘선한 것으로 있는 존재’와 ‘존재하는 것으로 있는 존재’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희고 무겁고 둥근 것으로 있는 하나의 동일한 선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실제 그 자체는 있는 것과 그것의 둥금, 그것의 색 그리고 선성은 다른 것이다. 만일 이들 가운데 각각의 것이 실체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라면, 무게는 색과 같은 것이고 혹은 선한 것이 되며, 그리고 선은 무게와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은 본성이 이러한 것이 야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존재인 것과 어떤 것이 존재임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선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그 자체는 선을 가지지 않는다. 만일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선으로부터 선한 것들이 아니고, 선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존재로 존재함과 선으로 존재함은 다르다. 만일 그것들이 전적으로 선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며, 그렇다면, 그것들은 공간의 차원에서 무게를 가진 것도 색을 가진 것도 연장을 가진 것도 아니며, 이러한 성질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선만이 있다.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원리로 존재함으로 보이며, 그것들로 보이지 않고 그것으로 그렇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의 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있고, 그러한 것은 선과 무(無)도 아닌 것으로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지 않으므로 만일 단지 선으로 있는 것이 존재와 동일한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의 존재는 선의 의지로부터 나오며, 선은 존재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제이 선, 그것이 그것의 존재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선 그 자체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존재 그 자체는 제일 선이란 것과 올바르게 존재하는 것 그 가운데 존재가 선한 것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으로 선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가운데 존재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그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문은 해결되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 가운데 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선과 유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아무리 그것의 존재가 선 그 자체인 사물일지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는, 제일 존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사물의 존재일 수 없다. 즉 선과 같다. 따라서 존재는 선 그 자체이며, 그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나 존재하는 것 그 가운데 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선 이외의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선한 것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선은 존재하는 것 그 가운데 존재할 수 없다. 선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선으로부터 가지지 않는 존재 그 자체는 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과 인식에서 제일 선이 구분되는 한에서 이것들은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그 가운데 선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실적으로 실존할 수 없으므로, 참으로 선한 것이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멩도 그것의 존재가 선한 것과 실체적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것과 유사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선한 것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존재하는 것 가운데 선한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들은 선으로부터 구분되거나 구분되지 않을 수 없는데, 제일 선 그 자체는 존재 그 자체이며, 선 그 자체이고, 선으로 존재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반론


흰 것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흰 것은 아닌지, 흰 것이 존재하기 바라는 신의 의지로부터 그들의 존재가 나온 것은 아닌지?


답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와 흰 것의 존재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존재하게 한 이는 선하며, 진정 절대로 흰 것이 아닌 까닭이다. 선한 이의 의지에 의하여 그것이 존재하는 것 가운데 선한 것이다. 그러나 흰 것의 의지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 가운데 흰 것인 속성과 같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 희지 않은 이가 흰 것인 것을 의지하기에 흰 것이다. 또한 선한 이가 선한 것을 의지하는 이가 선한 것으로 그것의 존재를 바라는 한에서 그것은 선한 것이다.


두 번째 반론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도 의지하는 이에 의하여 정의로운 것인가?


답변


그렇지 않다. 선한 존재는 본질과 관련되며, 참으로 정의로운 존재는 행위와 관련된다. 존재와 행함은 같은 것이며, 그렇게 선한 존재와 정의로운 존재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재가 행함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한 존재와 정의로운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존재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 가운데 모든 이에게 공통된 존재가 있다. 모든 것은 참으로 선한 것이지만,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선한 것은 류적인 것이고, 정의로운 것은 참으로 종적인 것이며, 종은 류의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것은 정의로운 것이고,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번역 이후]


<라틴어 형용사>

중세 의미론적 논의에서 항상 형용사의 번역은 하나의 난관이다. 우리말에 형용사(그림씨)는 동사(움직씨)와 함께 용언(풀이씨)에 속한다.1) 즉 우리말에 의하여 사물의 동작을 표현하는 동사나 상태 혹은 성질을 표현하는 형용사 모두 술어의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라틴어는 그렇지 않다. 라틴어에 있어 형용사는 명사에 가깝다. 고대 로마인에 의하면 라틴어는 기본적으로 명사(nomen), 동사(verbum) 그리고 불변화사(particulum)로 구분하고, 다시 명사를 실명사(substativum), 형용사(adiectivum), 수사(numerale). 대명사(pronomen)로 구분하였다.2)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우리 한국어와 인도유럽어족의 라틴어와는 그 품사의 구성을 비롯한 언어의 기본적 틀이 다르다. 우리에게 ‘하얗다’와 ‘희다’는 형용사이다. 명사적이지 않으며 분명 술어의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라틴어에서 ‘희다’라는 말은 우리말처럼 사용되지 않는다. album이란 라틴어는 고대 로마인의 관점에선 명사의 한 부류이지만, 이에 준한 우리말은 명사가 아니라, 술어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album이 꽃이나 나무 그리고 인간과 같이 실명사와 동등한 것은 분명 아니다. 왜냐하면 album이 ‘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우리말에 맞추어 설명한다면, 라틴어에선 ‘흰’이 명사에 준하지만, 우리에겐 이것이 명사가 아니다. 명사로 만들기 위하여 ‘흰 것’이라고 ‘-것’을 더하는 수가 있지만, 이것도 의미론적으로 완전하지 않다. 라틴어 형용사인 이 ‘-것’에 준한 것이 더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것’을 더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등장한다.

중세 의미론에 의하면 절대명사와 내포명사는 구분된다. 예를 들어, albedo와 album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를 우리말에 준하여 ‘흼’과 ‘흰 것’이라 번역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문법에서 ‘-것’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추상화하려 부르는 말이다. ‘입을 것’과 같이 말이다. 명사와 대명사의 뒤에서 소유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언니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album은 이러한 우리말 의미의 ‘-것’이 추가된 것과 의미가 다르다.

더 세부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은 관형사형(매김꼴)과 형용사가 구분된다. 우리말에 있어 관형사형은 관형사과 같이 명사, 대명사와 같은 체언(임자씨)을 꾸미는 용언의 활용형이다. 앞의 말에 대해서는 서술어이며, 뒤의 말에 대해서는 관형어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으)ㄴ'이 붙은 ‘읽은’이나 ‘본’ 등이 그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불휘 기픈 남”에서 ‘불휘’에 대하여 ‘기픈’은 술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관형사의 구실을 하고 있다.3) 그렇다면 ‘흰 것’은 우리말로 형용사 ‘희다’가 관형사형으로 변화한 ‘흰’에 ‘것’이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 album이 과연 이와 같은 문법적이고 의미론적 내용을 가진 것인가? 아니다. 라틴어 album은 단순히 그저 형용사일 뿐이다.

이러한 난점에서 불구하고, album을 ‘흰 것’이라 사용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더 나은 역어에 앞선 차선책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의 번역에서 역자는 bunum을 ‘선한 것’이라 옮기고, album을 ‘흰 것’이라 옮겼다. 이를 이해해 주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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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은 토마스 철학 학교 유대칠이 번역한 것이며, 글의 모든 권한은 토마스 철학 학교 유대칠에게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이용을 허락하며, 단지 인용이나 인터넷상의 이용시(블로그, 홈페이지, 카페, 미니홈피,클럽...) 출처를 명시해야만 한다. >